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티캐스트

 
도쿄의 청소부로 지내고 있는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해 뜨기도 전 일어나 새벽같이 출근 준비를 한다. 싱크대에서 세수, 양치, 면도를 하고 화초에 물 주는 일을 잊지 않는다. 유니폼을 입고 차 키와 동전을 챙겨 자판기 모닝커피로 아침을 대신하는 남자다.
 
출근길에는 카세트테이프로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Perfect Day)를 들으며 스카이 트리를 바라본다. 도쿄 시부야 구의 공중 화장실을 돌며 청소를 시작한다. 히라야마는 청소에 진심이다. 직접 청소도구까지 만들고, 이용객이 불시에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밖에서 기다린다. 편히 일을 보도록 나름의 배려이면서도 바람과 나무, 햇볕을 느끼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기분 좋은 소확행이다.
 
점심에는 나무 친구를 보면서 공원에 앉아 우유와 샌드위치를 간단히 먹는다. 바로 이때다. 빛과 나뭇잎의 아름다운 코모레비. 늘 흑백필름을 넣어 찍는데 초점이 맞지 않거나 노출이 잘못돼 망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티캐스트

 
그는 퇴근 후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씻고 지하철 상가의 오래된 술집에서 쌓인 피로를 푼다. 돌아와서는 아담한 2층의 소박한 방에서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읽으며 마무리한다. 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하루인가. 땀 흘려 일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작가의 글귀를 읽다가 잠드는 매일이 소중하다.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한 번도 부끄럽거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다. 오히려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조금씩 변하는 자연을 보는 게 즐거운 오늘이다.
      
주말은 조금 다른 루틴이다. 손목시계를 차고 자전거를 굴려 코인 세탁소에 방문한다. 주중에 찍은 필름을 맡긴 사진관에서 현상된 사진을 찾아온다. 다다미 위를 축축한 신문지를 굴리며 청소하고, 애장품인 카세트테이프도 꼼꼼하게 먼지를 턴다. 사진을 보며 괜찮은 사진만 골라 보관한다. 이번에는 버릴 사진이 더 많았지만 다음번에는 건질 사진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오후에는 오래된 헌책방에 들러 100엔의 문고판을 한 권 골라 왔다. 서점 주인은 세련된 히라야마의 안목을 감탄하지만 쑥스러울 뿐이다. 단골 선술집의 주인장이 내어주는 오늘의 메뉴를 안주 삼아 술 한 잔에 일과를 마무리한다. 비슷한 또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흘렀다. 별 탈 없이 흘러가던 완벽한 날에 서먹했던 조카가 찾아오며 변화를 맞는다.
 
하루가 모여 만든 일상의 행복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반짝반짝 새하얗게 만들어 놓는 일을 따라 어지럽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만끽한다. 시를 읽고 감상하는 태도로 꾸준히, 조용히, 지긋이, 바라본다. 화장실을 깨끗이 닦고 어루만지는 손길은 ASMR 같아 천천히 빠져든다. 꼼꼼하고 체계적인 일머리를 지켜보다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스스로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직업인의 소명까지 엿보인다. 돋보기를 비춰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의 묵은 때까지 기어코 닦아내고야 만다. 인간 누구나 평등하게 비우는 화장실이야말로 깨끗하게 시작하는 출발점이니까.

히라야마는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 속 운전사 '패터슨'과 겹진다. 매일 패터슨 시내를 관통하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과 속에서 시에 녹아드는 자연과 도시의 익숙한 풍경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던 일상 말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일렁이는 물비늘처럼, 조바심 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도 꽉 찬 하루치 행복을 다 쓰는 사람이 히라야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소박한 이층집에서 단출한 가재도구만 갖춘 채 식물을 키우는 노년의 남자. 조카에게 유일한 방을 내어주며 창고에서 비좁은 잠을 청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삼촌이다. 성실하지만 느긋한 태도, 푸근한 미소와 아련한 눈망울은 과거를 궁금하게 한다.
 
카세트테이프로 1960-1970년대 명반을 소장하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읽으며 깊고 넓은 예술 취향을 더해간다. 테이프 하나를 비싼 값에 팔 수 있다고 주변에서 부추기지만 애장품을 파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수집가다.
 
독일 감독이 일본에서 만든 영상 시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 ⓒ 티캐스트

 
<퍼펙트 데이즈>는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슨'이 3일 만에 시나리오를 쓰고 17일 만에 찍은 영화다. 다른 일정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 사랑하는 도시 도쿄를 향한 러브레터를 써 내려갔다. 영화로 만들게 된 계기가 독특한데 안도 타다오, 반 시게루, 구마 겐고 등 세계적인 건축가, 디자이너 16명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도쿄 시부야 구의 17개 공중 화장실을 개보수하는 'THE TOKYO TOILET'의 기획자들은 단편 영화와 사진집을 제안했고, 장편 극영화로 탄생하게 됐다.
 
빔 벤더슨에게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영화감독인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 <꽁치의 맛>의 '히라야마'의 이름을 써 오마주 했다. 주옥같은 올드 팝송을 선곡해 장면마다 테마곡으로 썼다. 4:3의 고전적인 화면 비율,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 책 등 아날로그적인 오브제를 사용해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그가 꾸는 꿈은 빔 벤더슨의 아내이자 사진작가인 '도나타 벤더스'의 작품으로 채워 신비로움을 더한다.
 
올해로 68세를 맞은 '야쿠쇼 코지'는 진짜 청소부처럼 보이기 위해 청소부에게 실전 청소법을 배웠다. 연기랍시고 어설프게 흉내 내지 않았고, 열심히 청소하는 열정을 선보이자 내일부터 출근할 수 없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배우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도록 연기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야쿠쇼 코지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현실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법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가끔 청소를 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찌든 때를 벗기고 더러웠던 부분을 문질러 제거한 후 깨끗해진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치 복잡하게 엉긴 마음의 실타래를 말끔히 풀어낸 듯해 후련하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난 후 마음도 비슷했다. 입꼬리는 웃고 있지만 눈동자 가득 고인 눈물을 금방 쏟아낼 것 같은 아리송한 표정의 엔딩.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이 흐르며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박제된다. 눈물은 슬퍼서만 흘리는 게 아니다. 완벽한 날들이 계속되었을 때 맞는 행복한 기쁨. 감동스러운 순간에도 우리는 울고 웃는다.
 
그저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퇴근 후 휴식을 취하다 잠자리에 드는 나른한 시간으로 초대한다. 스마트폰 중독, 도파민에 절여있던 생활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정신없이 보낸 오늘 하루, 뒤틀린 삶의 균형을 되찾을 여유를 영화 한 편으로 챙기고 싶다면 <퍼펙트 데이즈>를 추천한다.
페펙트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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