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아트센터는 지난 4월 23일부터 뮤지컬 <버지니아 울프>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모더니스트이로서 페미니즘의 교과서라는 작품들을 두루 남겼다. 뮤지컬은 관객들에게 그의 삶의 깊이와 집필로 인한 고뇌를 전달한다. 그리고 작품에서든 삶에서든, 마지막 결말은 자기의 고유한 선택이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심어준다. 뮤지컬을 관람하는 일은 보고 듣고 즐기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으며,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적 상황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종합예술임을 일깨워준다.
 
"원고지 앞에서 필요한 건 솔직함"
 
내 이야기의 결말은 글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결말은 나의 의지 (사진=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 내 이야기의 결말은 글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결말은 나의 의지 (사진=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 할리퀸크리에이션즈

   
조슈아는 직장에서 느닷없는 해고로 절망에 빠진다. 강가에 쓰러져 있는 애들린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1927년(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1929년 출간)의 영국으로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상상력이 서사의 출발이다. 애들린은 독일의 폭격으로 허물어진 런던이 아닌, 그대로 살아있는 풍경에 감탄한다.
 
애들린과 조슈아는 지금 이곳이 소설 속 공간이라는 걸 깨닫고는, 일종의 합의를 맺는다. 과연 조슈아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고 유명한 작가의 대열에 오를 수 있을까. 애들린은 자신이 살았던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하여 둘은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창작의 글쓰기를 위한 협업이 시작된다.
 
"나의 죄, 신에게 구원을 바란 죄"
  
애들린의 고해 뮤지컬의 전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변곡점. (사진=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 애들린의 고해 뮤지컬의 전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변곡점. (사진=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 할리퀸크리에이션즈

 
극의 진행에서 가슴 저릿한 변곡점은 십자가 앞에서 애들린이 자기 내면을 분출하는 장면일 것이다. 극의 전반부에서 애들린은 재기발랄하며 웃음도 많고 활달한 모습으로 비친다. 우리에게 익숙할법한 버지니아 울프의 외연적인 모습과 무리 없이 연결되진 않는다.
 
애들린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12살까지 가족들과 함께 왔었던 장소(소설 '등대로'의 배경)를 조슈아의 도움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며 살아온 과정 모두 자기의 삶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애들린은 자기가 지금 집필하는 소설에 조슈아는 없다고 고백한다. 당황한 조슈아는, 그럼 어떻게 자기 글이 조금씩 인정받고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글은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 어떤 결말이라도 나의 의지로."
 
남녀 2인극이라는 설정이지만 응당 보여줄 법한 애타는 연정은 없으며 그마저도 소소하다. 이런 설정이 당연하게도 글쓰기든 무엇이었든, 나의 의지이자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강인한 메시지인 점을 도드라지게 해준다. 조슈아의 의문이었던,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도 온전히 자기 의지였다는 게 확인된다.
 
뮤지컬이 끝나고,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남겨진 묵직함은 무얼까. 애들린의 죽음이 그저 안타깝거나 소극적인 미련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까닭이겠다. 나이젤 니콜슨(버지니아 울프 전기 작가)은 버지니아 울프가 '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 그 자체라고 했다. 우리가 버지니아의 작품에 매료된 이유 아닐까. 그리하여 마지막 선택마저 그가 바라마지 않았던 삶의 보존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되며 존중하는 이유일 테다.
 
불길한 기대감 당신의 소설이 내 삶을 바꿔주기를 (사진=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 불길한 기대감 당신의 소설이 내 삶을 바꿔주기를 (사진=할리퀸크리에이션즈 제공) ⓒ 할리퀸크리에이션즈

   
"우리는 같은 페이지에 머물렀다. 다음 페이지를 넘겨라."
 
무대 세트의 골격은 단출하다. 바닥 언저리는 강물과 땅이 맞닿은 듯 층층으로 물결모양에 여러 개의 돌이 채워져 있다. 조슈아의 거주지는 옥탑방인 듯 당시의 가난이 축약돼 허름하다. 버지니아가 주장했던 '자기만의 방'이 살짝 연상되기도 한다. 무대를 변용하기 위해 사용된 영상 빔은 무대를 확장시키며 여러 해석의 공간을 열어주고 몰입감을 형성해준다.
 
음악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피아노 트리오는 극의 요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가 정서적으로 와닿게 만든다. 특히 현대음악, 재즈, 클래식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연주로 극의 분위기에 흠씬 젖도록 돕는다. 그중에서도 십자가 앞에서 애들린이 혼신으로 토해낸 내면 연기에 공감하도록 집중시킨 점은 배우의 연기와 더불어 가히 압권이었다.
 
<버지니아 울프> 제작사 할리퀸크리에이션즈는 최근 <레 미제라블>과 <미스 사이공>을 선보였었다. 서울 마포구에 터를 잡은 종합문화공간이다. 공연의 기획부터 제작과 홍보를 맡고 있으며 극장과 전시관도 운영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거론했던, 여성이 자립하기 위한 조건은 지금에서도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도전적이되 혁신적이며 시대를 비판하고 비전을 제시했으니,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모티브로 제작했다. 소설에선 중산층 주인공과 퇴역 장교를 은연히 연결하는데, 뮤지컬에서도 애들린과 조슈아는 다른 시기의 인물인데다, 여기에 상상력이 결합됐다. 그리하여 소설 읽기를 추천한다. 먼저 읽든 관람 후에 읽든, 뮤지컬의 여운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다.

공연은 7월 14일까지 관객을 기다린다.
버지니아울프 애들린 조슈아 충무아트센터 댈러웨이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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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의 질서를 의문하며, 딜레탕트Dilettante로 시대를 산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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