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마치고 인사하는 배우들

공연을 마치고 인사하는 배우들 ⓒ 조은미

 
두루미가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옵니다. 두루미는 부드럽지만 힘찬 날개짓을 하며 객석 사이를 날아들어요. 제 옆을 지날 때 두루미 머리 위에 있는 붉은 점과 맑은 눈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통일? 그런 거 하지 마."

DMZ에 모여 사는 동물들이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싸우라고, 전쟁 이후 DMZ가 생겼고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으니 동물들이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습니다. 사향노루, 산양, 토끼, 두루미가 모여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터전, 이곳에 동물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소녀가 등장하자, 동물들이 인간들을 비웃으며 그렇게 말하죠.

만신이 된 소녀
 
 창극 <만신 : 페이퍼 샤먼> 공연 후 인사하는 배우들

창극 <만신 : 페이퍼 샤먼> 공연 후 인사하는 배우들 ⓒ 조은미

 
26일 국립극장에서 창작 창극 '만신 : 페이퍼 샤먼'이라는 공연을 봤습니다. 박칼린 감독이 연출하고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은 이 창극은 역동적인 무대와 전통리듬과 세계의 리듬이 어우러진 멋진 음악, 국립창극단과 출연진의 열연이 돋보입니다. 내용은 신내림을 받은 한 소녀가 만신(무녀를 높이 부르는 말)이 되어 세계 곳곳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여정을 다룹니다.
 
무녀가 된 소녀 '실'은 전 세계 샤먼들과 영적으로 만나고 그들의 아픔을 들으며 함께 치유의 시간을 가지는데요. 아마존 숲이 파괴되어 동식물이 멸종되고 이어 사람마저 멸종된 이야기, 노예로 팔려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실려 가다가 수장된 아프리카 사람들 이야기, 골드러시로 몰려든 백인들의 약탈로 죽임을 당한 나바호족 이야기,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는 전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전쟁 이후 DMZ에 살아가게 된 동물들이 한반도 사람들에게 계속 반목하고 통일도 하지 말고 지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지 느끼게 하죠. 특히 6·25전쟁 74주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오물풍선이니 미사일이니 하며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어 있어 더욱 그러합니다.
 
실이라는 아이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끝에 점지된 아기입니다. 이 아이는 영험한 힘을 지녀 평범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실의 어머니는 아이를 숨겨서 키우라는 전언을 듣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좋아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던 아이는 결국 자신의 의지로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무녀라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치유의 힘으로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녀는 신과 사람, 자연과 교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힘이 있어요.
 
"치유사, 힐러, 무당, 마녀, 마법사, 수호자, 위치 닥터, 드루이드, 투앗드다나안, 만신, 샤먼…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예민한 자들이여."
 
작품 속 대사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는 치유사 샤먼들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대신 기원해 주는 사람들이죠. 종교적 의미를 떠나 이들의 치유 역할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마존 숲이 파괴되어 이내 자신의 삶도 완전히 파괴된 남자가 이야기합니다. 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위로의 기도를 해주죠. 숲을 다시 되돌려주겠다는 약속도 합니다. 물에 빠진 영혼을 건져 올리고 (세월호 아이들이 생각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고향 영토가 온통 피로 물든 사람들의 피를 씻어주고, 불타버린 숲이 되살아나는 소망을 심어줍니다.
 
이런 치유의 의례를 하기 위해서는 맑은 물과 강이 필요합니다. 또 파괴되지 않은 안전한 숲이 필요하죠. 깊은 강과 숲이 있을 때 온전히 사람과 자연이 만나고 그곳에 치유의 여정이 시작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치유의 공간인 강과 숲을 지키는 일에 힘을 보태는 우리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수고가 더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성동 생추어리의 올챙이 엄마
 
 습지를 설명하는 함정희 팀장

습지를 설명하는 함정희 팀장 ⓒ 염형철

 
공연에 등장한 야생동물의 천국 DMZ에 비교할 건 아니지만, 우리도 생명들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작은 공간인데, 거기에서는 매일 기적이 벌어지고 있어요. 자라가 알을 낳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흰뺨검둥오리 아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기도 해요. 지난봄에 심었던 해바라기들은 이제 노란 얼굴을 빛내며 늘씬하게 자라 어린 동물들에게 그늘이 되어 줍니다.
 
한 번은 올챙이들이 새들에게 다 잡아먹혔다고 속상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새로이 태어난 올챙이들을 계속 들여다보며 언제 다리가 나올 거냐고 재촉하며 기다리던 사람. 그는 바로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에서 '생동 생추어리'를 만들어 가는 함정희 팀장입니다.
 
수시로 한강 직원들 단톡방에 생추어리 소식들 올리는 정희. 그녀가 아가새들 사진을 올리자 누구 아가인지 물었죠, 그러자 정희는 "우리들 자식입니다. 올챙이도 새들도 다 우리 자식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올챙이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성동구 중랑천에 만들어가는 생동 생추어리 덕분에 한강 가족이 많이 늘었습니다. 염형철 대표의 상상력에서 출발한 생추어리는 작년만 해도 준설토와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가시박이 뒤덮었던 황량한 곳이었지요. 이 공간이 1년도 안 되어 온갖 생명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정희, 재혁, 형철, 기철, 우중가와 같은 한강 사람들에 더해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보탠 덕분입니다.
 
언젠가 이곳 생동 생추어리에도 버드나무 우거지고 수달과 삵, 자라와 원앙이 강과 숲의 일원으로 살아가겠지요. 그 때에는 만신 '실'이라는 치유사가 이곳에 와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이야기를 들으며 아픔을 치유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이 아니더라도, 강과 숲이 정령들이 위로의 노래를 불러줄 수도 있고요.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치유의 강과 숲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황량한 준설토 더미를 생추어리로 바꾸고 있습니다.

황량한 준설토 더미를 생추어리로 바꾸고 있습니다. ⓒ 함정희

덧붙이는 글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뉴스레터 '은미씨의 한강편지'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만선페이퍼샤먼 생추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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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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