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지전의 실화, 국군은 어떻게 백마고지에 태극기를 꽂았나'편

'영화 고지전의 실화, 국군은 어떻게 백마고지에 태극기를 꽂았나'편 ⓒ tvN 갈무리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 1952년 10월 6일-15일)는 6.25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중공군을 현재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에서 격파했던 전투다. 불과 10일간의 전투기간 동안 무려 1만 4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왜 불과 395M의 고지 하나를 더 차지하기 위하여 삶과 죽음의 전장을 넘나들어야만 했을까. 지난 26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4회에서는 '영화 고지전의 실화, 국군은 어떻게 백마고지에 태극기를 꽂았나'편을 다뤘다.
 
고지전(高地戰)은 주변보다 높은 고도에 있는 진지에서 벌이는 전투를 의미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한반도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약 1년이 지나면서부터는 38선 인근에서 고지전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선이 고착화된다. 영화<고지전>, <태극기 휘날리며>등 한국전쟁 당시의 고지전투를 조명하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약 2년간에 걸쳐 벌어진 고지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힌다.
 
당시 참전용사는 "눈앞에 포탄이 날아오고 저녁마다 전우들의 시신이 쌓여갔다. 전투를 치른 고지 정상은 전투마다 1M씩 깎여나갔다"(국방홍보원)고 증언했다. 1951년 7월, 소모전이 되어가는 전쟁에 지친 UN군과 공산군은 휴전협상에 돌입한다. 한국 정부는 '통일 없는 휴전은 없다'는 없다며 반대했지만, 실제로 협상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측 주도로 진행된다.
 
총성없는 전쟁터, 휴전회담

휴전회담은 총성없는 또다른 전쟁터였다. 양측은 북한의 진영인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갖기로 했고 회담장에는 공통으로 백기를 들고 입장하기로 상호 합의했다. 그런데 공산군 측은 유엔군 협상단이 탑승한 차량에 백기를 달고 일부러 개성 시내를 돌게 해 마치 유엔군이 항복하러 온 것처럼 개성 시민에게 선전했다고 한다.

또 회담장에는 유엔 측 의자를 일부러 낮게 잘라놓는 꼼수를 써서, 마치 공산 진영이 유엔 측을 깔보듯 내려다보는 구도의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교묘한 심리전이었다.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자 양측은 군사분계선을 협의해야 했다. 공산진영 측은 전쟁 이전의 38도선을, 유엔 측은 휴전회담 시작 시기에 양측의 점령지를 기준으로 한 군사분계선을 각각 제안했다. 당시 한국은 공산진영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 지면, 잃을 땅이 더 많아지는 형국이었다.
 
휴전회담은 양측의 첨예한 입장차이로 내내 난항을 거듭했다. 양측은 이번엔 포로 협상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으나 강제송환을 주장하는 공산진영과, 포로의 의사를 반영한 자유 송환을 주장하는 유엔 측의 입장이 엇갈려 불발됐다. 공산 진영 측은 포로들의 자유 송환을 허용하면 공산 체제를 거부하는 포로들로 인하여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했고, 심지어 송환해야 할 포로들의 숫자를 축소하여 조작하기도 했다.
 
한편 휴전회담중에도 휴전선 인근 각지에서는 고지전투가 계속 진행 중이었다. 휴전회담이 불발될 때까지 전선의 군인들은 다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눠야만했다.

전투 결과에 따라 군사분계선도 실시간으로 바뀌는 상황. 그동안 양측은 한뼘이라도 더 유리한 군사분계선 확보를 위하여 더욱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평화를 위한 협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투를 독려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자유진영 측이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하여 꼭 차지해야 했던 지역이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로 꼽히는 강원도 철원, 김화, 평강군 일대였다.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한국전쟁 초기에 공산군도 이곳에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켰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강원도 철원은 곡창지대이자 남북과 서울을 잇는 도로가 관통하는 교통 요충지로서 우리 국군으로서는 반드시 사수해야했던 지역이다.
 
이 당시의 수많은 고지전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 백마고지였다. 이름의 어원은, 하늘 위에서 바라본 고지가 포탄의 하얀재에 덮여 백마처럼 보인다는 설과, 전투 중 조명탄이 내려오는 모습이 백마를 연상시킨다는 설 등이 있다.

백마고지 전투의 의미
 
백마고지는 사실 고지치고는 완만한 능선에 가까운 지역이다. 백마고지를 기점으로 위쪽으로는 산이 많지만 아래로는 평지가 펼쳐지는 형태였다. 국군의 입장에서 백마고지를 적에게 빼앗긴가는 것은 인근의 평지 일대까지 모두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든다는 의미였다.
 
1952년 10월 6일 오후 7시 15분,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38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국군 제9보병사단이 지키고 있던 백마고지를 밀물처럼 공격한다. 38군은 미군을 격파하여 '만세군'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중공군 내에서는 최정예 부대였고, 백마고지 점령을 위하여 3개월간 특수훈련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중공군은 백마고지 인근의 역곡천을 범람시켜서 병참선을 차단하고 국군를 외부로부터 고립시켰다. 국군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3배가 많은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단독으로 맞아 싸워야 했다. 참전용사는 전투 첫날 "첫날밤에 포를 얼마나 쏘았던지 포신이 벌겋게 달아서 물을 퍼다가 끼얹어야 했고, 지반이 내려앉아 나무토막으로 포상을 고정하면서 밤새도록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백마고지 전투를 이끈 지휘관은 김종오(金鍾五, 1921-1966) 장군이었다. 그는 훗날 국방부가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 김홍일 시홍사 사령관) 으로까지 선정된 전쟁영웅이었다. 하지만 1951년 3사단장 재임 시절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던 오점이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다시 중공군을 만나게 된 김종오의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김종오는 귀순한 중공군 장교를 통하여 미리 상대 공격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이에 국군은 역곡천 범람을 대비하여 미리 10일 치의 물자를 저장해놓고, 포격에 훼손되지 않게 통신선을 땅속깊이 매설했으며, 중공군을 포격할 위치를 정밀하게 지정해 놓았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국군은 중공군의 첫 공격을 훌륭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인해전술을 바탕으로 한 중공군의 공격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중공군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결국 정상 근처까지 접근했다. 이에 국군은 비장의 카드인 '진내사격'를 요청했다. 이는 적군이 진지 가까이 침투하여 아군과 너무 가깝거나 뒤섞여서 구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군 진지를 표적삼아 포격하는 전술이다. 당연히 이는 아군의 피해를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만큼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전투개시 28시간 만인 10월 7일 오후 11시, 국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지 정상을 처음에게 중공군에게 점령당한다. 하지만 국군은 후퇴히지 않고 재차 반격을 가하여 3시간 만인 10월 3일 새벽 2시 40분,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국군은 고지정상을 잠시 빼앗기기는 했지만, 전체를 다 내주지는 않았기에 정상근처의 7-8부 능선에서 재정비 후 반격이 가능했다. 또한 김종오 장군은 지휘관임에도 포탄이 눈앞에 떨어지는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전투가 처음 시작된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양군은 총 12회의 교전을 치렀고, 전투시간은 총 6974분에 이르렀다. 그동안 양측은 고지 탈환과 재탈환을 주고받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전투 7일 차에 강승우 소위와 오규봉-안영권 병장은 기관총을 난사하는 중공군의 방어선을 뜷기 위해 폭탄을 짊어지고 돌진하여 장렬하게 산화하기도 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어느새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이슈가 됐다. 10월 13일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벤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직접 전장을 방문하여 병사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벤플리트는 "한국군 9사단이 이렇게 잘 싸울 줄 몰랐다"며 국군의 전투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단독 전투로는 이례적으로 <경향신문>과 미국 <뉴욕타임스> 등에도 보도되며 국내 및 해외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사례로 회자된다.
 
열흘 간의 백마고지전에 사용된 포탄의 숫자는 약 28만여발에 달하여, 이는 일렬로 세우면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860km 거리에 해당한다. 한국전쟁을 통틀어 단일면적에서 가장 많은 포탄이 사용된 전투로 꼽히는 것이 바로 백마고지전이었다. 병사들은 치열한 전투 중 탄약과 포탄이 떨어지는 음료수병을 화염병으로 만들어 투척하기도 했다.
 
10월 15일 10시 15분, 마침내 중공군이 철수하면서 백마고지전은 국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고도 백마고지를 끝내 점령하지 못했고 오히려 전초기지였던 화랑고지와 주봉까지 빼앗기자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국군 병사들이 백마고지 정상에서 총기에 태극기를 꽂아 걸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사진은 지금까지도 백마고지전을 요약하는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국군 9사단은 1953년 9월부터 '백마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백마고지 위령비로 가는 길에는 백마고지를 상징하는 하얀 자작나무들이 심겨 있다. 한국전쟁을 상징하여 왼쪽에는 625그루, 오른쪽에는 백마고지 전투 기간인 10일과 12번의 공방전을 의미하는 1012그루의 나무를 각각 심었다고 한다.

또한 백마고지 위령비에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전사자 844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부상자와 실종자를 포함하면 사상자의 숫자는 3400에서 500명 정도이며 아직도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유해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당시 매일매일 전쟁의 참혹함과 불안함을 견디며 싸워야했던 병사들의 나이는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 중반의 꽃다운 청춘들이었다.
 
백마고지 전투가 끝나고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 협정이 타결되면서 3년여 간의 잔혹했던 한국전쟁은 막을 내린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그날, "당일 오후 10시가 되자 시끄럽던 총소리가 싹 걷히면서 어마어마한 고요가 몰려왔다. 그 속에서 나는 오열했다"는 당시 최전방에서 전투 중이던 참전용사의 증언은 심금을 울린다.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난 지 어느덧 7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총성은 잊혔지만, 우리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무명용사들이 나라를 위하여 한뼘의 땅이라도 더 지켜내기 위하여 귀중한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 그리고 그들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도 가능했다는 사실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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