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콤플렉스는 결핍이 아닌 과잉에서 시작한다. 키가 더 작았다면, 성격이 조용했다면, 목소리가 얇았다면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을까. 세상이 원하는 여성의 크기에서 벗어난 이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봤을 이야기. 그리고 누구보다 호쾌한 방식으로 크기를 뒤집던 한 아티스트가 손을 들었다. 내가 너무 강해서, 사랑받지 못할까 두렵다고.

지난 21일 이영지는 첫 EP 앨범 '16 FANTASY'을 발표했고 화제에 오른 건 타이틀 곡 <스몰걸(Small Girl)>의 뮤직비디오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곡으로 큰 키, 큰 목소리, 강한 성격을 가졌지만, 이런 자신도 사랑해 줄 수 있냐고 묻는 노래다. 바다 같은 사람이 컵 한잔의 사랑을 꿈꾼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을 덜어내야 할까, 아니면 바다만 한 컵을 찾아야 할까. 이영지가 찾은 해답은 둘 다 아니다.
 
'문짝' 여주와 '작아서 소중한' 남주

뮤직비디오는 시작부터 이영지가 얼마나 '스몰걸'과 다른지 보여준다. 홀로 고장 난 전등을 고치며 몇 번이고 천장을 두드리던 영지. 마침내 제대로 작동하는가 했지만, 곧바로 떨어지고 만다. 그 과정에서 영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한다거나 다소곳하게 있지 않다. 답답함을 표현하고 화를 내는 '빅 걸'에 가깝다. 상상 이상으로 '빅 걸'인 이영지는 집에서도 허리를 숙인 채 살아간다.

로맨스 장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그건 여성과 남성의 '키 차이'다. 흔히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보다 덩치가 작고, 이에 따른 신체적 차이가 일종의 설렘 포인트로 작동한다.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대신 꺼내주거나 가볍게 여성 배우를 들어 올리는 장면에서 "설렌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흔히 '문짝 남주'라 불리는 키 큰 남자 배우들이 로맨스 드라마에 출연하고 여성 배우와의 '덩케(덩치 차이의 케미)'가 흥행 요소로 꼽힌다.
 
 <스몰걸> 뮤직비디오 갈무리

<스몰걸> 뮤직비디오 갈무리 ⓒ youngji_2002

 
그리고 <스몰걸>은 규칙을 깼다. 상대 역할로 나온 도경수는 영지보다 키가 작다. 그렇다고 깔창을 깔거나 키를 숨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둘의 투 샷은 반복적으로 나온다. 여성과 남성 캐릭터의 키 차이가 역전되었기에 기존과 같은 설렘 포인트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장난스러운 영지에 맞춰 둘만의 수신호를 주고받거나, 함께 동등하게 세차를 즐기는 등 더 신선한 설렘이 등장했다.

하지만 도경수가 사랑할수록 영지는 숨어들게 된다. 자신의 큰 키와 강한 성격을 부끄러워하며 도경수와 함께 일하는 자그마한 동료를 선망하기도 한다. 영지의 '빅 걸' 콤플렉스가 커질수록 애석하게 그의 몸은 점점 커진다. 결국 저주에 걸린 듯 영지는 하늘을 뚫고 자라난다. 그의 저주를 풀어낸 건 도경수의 사랑. 여기서도 뮤직비디오는 일반적인 로맨스와 차이를 둔다.

흔히 로맨스에서 공주의 저주를 풀어내는 건 왕자의 키스다. 그러나 흔해 빠진 키스는 영지에게 걸린 어떠한 저주도 풀 수 없다. 그의 저주는 '빅 걸' 콤플렉스다. '스몰걸'이 아닌 영지에게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여전히 '빅 걸' 그 자체는 "그럼에도"를 통해 넘어야 하는 관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거대해진 영지를 향해 날아간 도경수의 시야에 걸린 건 커다란 몸이 아니었다.

도경수가 손가락에 베인 상처 위로 대일밴드를 덮자, 영지는 저주에서 풀려난다. 처음부터 영지의 큰 키, 큰 목소리, 강한 성격은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그가 집채만큼 커져도 중요한 건 달라진 외형이 아닌 그의 손가락 상처일 뿐이란 도경수의 사랑에 영지는 다시 작아졌지만, 여전한 '빅 걸'이 되어 그 옆을 지킨다. <스몰걸> 가사처럼 처음부터 그런 걸 신경 쓰는 남자였다면 "난 네 것이 아니었을 거야"라고 말한다.
 
모든 형태의 사랑에 존경을
 
 <스몰걸> 뮤직비디오 갈무리

<스몰걸> 뮤직비디오 갈무리 ⓒ youngji_2002

 
<스몰걸>은 23일 기준 멜론 일간 차트 3위에 올랐고 뮤직비디오는 공개된 지 이틀 만에 400만 뷰를 넘어섰다. 이토록 <스몰걸>에 대중이 열광하는 건 다름 아닌 화자가 '이영지'이기 때문이다. 자칭 'MZ 대통령'인 이영지를 한 가지 키워드로 요약한다면 아마 당당함이 아닐까. 거침없는 성격을 숨기지 않으며 저돌적인 모습으로 사랑받던 그가 첫 EP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다니. 놀랍지만, 어쩌면 당연한 시도이다.

<스몰걸> 뮤직비디오 속 이영지가 겪는 콤플렉스는 모든 여성의 콤플렉스와 닮았다.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과 멀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나'라서 당당하지만, 너무 '나'라서 겁이 나기도 한다. 때론 나를 굽혀서라도 세상과 맞춰보고 싶지만, 그럴수록 몸이 커지던 영지처럼 우리의 존재성은 뚜렷해진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사랑. 약점과 열등감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당신은 '콤플렉스'로 요약돼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되새기는 사랑일 테다.

그렇다면 '스몰걸'이 될 수 없는 우리는 어디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마릴린 먼로는 "최악일 때 나를 감당할 수 없다면 최상일 때 나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빅 걸'이었던 먼로의 말을 살짝 비틀고 싶다. 연약하지 않은, 최상의 '빅 걸'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에겐 어떠한 순간의 당신도 가질 자격이 없다. 솔직히 어디 가서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하나 싶다. 바다 같은 여성들이, 그런 당신이 담길 만한 그릇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그저 혼자 헤엄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을 뿐이다.
이영지 도경수 스몰걸 SMALLGIRL 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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