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과 벤탕쿠르
로이터/연합뉴스
손흥민이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성 망언을 내뱉은 팀 동료 로드리고 벤탄쿠르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손흥민의 관용 뒤에 숨어서 제대로 사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벤탄쿠르와 토트넘 구단은 끝까지 비겁했다.
손흥민은 지난 20일 SNS에 최근 벌어진 인종차별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손흥민은 "벤탄쿠르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알고 있으며 사과했다. 벤탄쿠르가 의도적으로 공격적인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형제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라며, "이건 지나간 일이다. 우리는 하나이며 프리 시즌에 다시 만나 팀에서 하나로 뭉쳐 싸울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벤탄쿠르의 인종차별 발언이 나온지 6일 만이다.
앞서 벤탄쿠르는 지난 14일 자국인 우루과이의 한 방송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던 중 진행자가 토트넘 팀 동료인 손흥민의 유니폼을 부탁하자, "소니(손흥민의 애칭)의 사촌 유니폼은 어떨까. 그들(동양인)은 거의 비슷하니까"라고 말했다. '(동양인의) 외모가 비슷해서 구분이 안 간다'는 식의 표현은 대표적인 인종차별 발언 중 하나로 꼽힌다.
벤탄쿠르의 망언은 온라인을 통해 해외에도 빠르게 퍼졌고 영국과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상황을 확인한 벤탄쿠르는 지난 15일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손흥민을 직접 태그하며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 벤탄쿠르는 "그건 그냥 아주 나쁜 농담이었다. 나는 너에게나 다른 누구에게도 무례하게 굴거나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벤탄쿠르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산 되었다. 현재 세계축구계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날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심지어 같은 소속팀 동료이자 주장을 대상으로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것은 심각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손흥민과 벤탄쿠르는 토트넘 내에서 사적으로도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기에 팬들이 받은 배신와 실망감은 더 컸다.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팬들조차 벤탄쿠르의 발언을 성토하며 강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로 벤탄쿠르가 농담이라는 변명만 강조하며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발언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 인식이 결여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벤탄쿠르를 옹호하며 '우루과이 문화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농담'이라고 주장하는 몰지각한 팬들까지 등장하며, 온라인 곳곳에서 뜨거운 설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 BBC > <디 애슬레틱> 등 해외 유력 매체들이 앞다퉈 이 사건을 보도하며 파장에 주목했다.
결국 사건 직후 한동안 침묵을 유지해오던 손흥민도 당사자로서 무언가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손흥민의 선택은 '용서'였다. 이는 물론 손흥민의 평소 인품을 감안할 때 예상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었다.
손흥민은 과거 인터뷰를 통해 유럽에서 생활하며 종종 인종차별을 겪을 때마다 직접적인 대응보다는 "무시가 최선"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물며 벤탄쿠르는 팀 동료이고 손흥민은 토트넘의 주장이기도 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손흥민은 불과 몇 달 전에서 국가대표팀에서 충돌했던 후배 이강인의 사과 역시 흔쾌히 받아줬던 전력이 있다. 벤탄쿠르 역시 부족하나마 일단 사과를 했고 토트넘 구단도 상황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상황에서, 손흥민 역시 이 사안을 계속 문제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손흥민의 입장표명이 나오기 전까지, 쏟아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입을 닫고 있던 벤탄쿠르와 소속팀 토트넘 구단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토트넘은 일주일 가까이 SNS나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팬들의 항의에도 반응이 없었다.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하던 토트넘은, 최근 손흥민의 SNS 글이 올라온 뒤에야 뒤늦게 구단 공식 계정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토트넘은 "벤탄쿠르의 인터뷰 영상과 이후 선수의 공개 사과 이후, 클럽은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를 보장하기 위해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성, 평등, 포용이라는 목표에 따라 모든 선수를 대상으로 한 추가 교육이 포함된다"라고 발표했다. 이어 "우리는 주장 손흥민이 이번 사건에 대해 선을 긋고 팀이 다가오는 새 시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지한다. 우리는 다양한 글로벌 팬층과 선수단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차별도 우리 클럽, 우리 경기, 더 넓은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핵심은 빠져있다는 비판이 많다. 결국 벤탄쿠르에 대한 징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팬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손흥민 뒤에 숨어서 이쯤에서 문제를 덮자는 식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구단이 앞장 서서 분명한 원칙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손흥민에게 사태 해결의 책임을 전가한 쪽에 가까워 보인다.
손흥민이 혼자 용서한다고 해서 이 사건이 이대로 끝날 수 있는 것일까. 벤탄쿠르의 발언은 맥락상 누가 봐도 손흥민 한 명만이 아니라 한국인, 더 나아가 아시아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이었다. 벤탄쿠르는 이를 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하며 제대로 된 사과를 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토트넘은 소속팀 선수의 망언을 방관하고 팬들의 여론은 철저히 무시했다. 벤탄쿠르와 토트넘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다.
손흥민과 토트넘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벤탄쿠르는 현재 잉글랜드 축구협회(FA)로부터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또한 토트넘은 7월부터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는 '아시아 투어'가 내정되어 있다. 벌써부터 투어 보이콧 요구에 항의 시위 예고까지 아시아 팬들의 여론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책임을 물을 때까지 벤탄쿠르와 토트넘에 대한 팬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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