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1572-1609)은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장남이자 15대 광해군의 친형이다. 일국의 왕자라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고귀한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명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끝내는 비참한 최후까지 맞이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임해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대체 왜 그토록 많은 악행을 저질렀을까. 어쩌다가 아버지에게 이용 당하고, 친동생과 백성들에게는 버림받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야만 했을까. 6월 19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113회에서는 '임해군은 왜 희대의 망나니가 되었나'편을 통하여 임해군이 조선 최악의 왕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조명했다.
 
임해군은 1572년 8월 14일 아버지 선조와 어머니인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정비인 의인왕후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고, 임해군은 후궁 소생이지만 선조의 서장자가 됐다. 선조의 두터운 사랑을 받던 공빈은 3년 뒤인 1575년에는 임해군의 동생인 광해군을 출산한다. 조선 최초의 방계(傍系) 출신 임금으로 선대에 비하여 정통성이 약했던 선조로서는,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들을 연이어 얻게 되어 공빈과 임해군 형제에 대한 총애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577년 어머니 공빈이 출산 후유증으로 요절하면서 임해군-광해군 형제의 운명에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 당시 임해군의 나이 5세, 광해군은 2세에 불과했다. 사실 선조는 이미 공빈이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또다른 후궁인 인빈 김씨와 그 아들 의안군에게 마음이 옮겨간 상태였다. 어린 나이에 친어머니를 잃은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는 아버지의 사랑마저 잃고 냉대를 당해야 했으며, 이는 훗날 두 형제의 성격과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낸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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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선조의 여러 왕자들 중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단연 광해군이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한 일화에 따르면 선조가 어느날 왕자들을 모아놓고 "반찬 중에 으뜸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대부분 평범한 답을 던진 다른 왕자들과 달리, 광해군만은 '소금'을 언급하며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사려깊은 답변을 내놓아 선조와 대신들을 감탄하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임해군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이 어떤 답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이는 다시 말하면 별달리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을 정도로 광해군을 뛰어넘는 답변이 없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중외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훗날 선조의 후계자가 되는 광해군이 정비 소생도 장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군왕의 자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광해군의 동복형이자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은 어땠을까. 실록에 따르면 '임해군은 사책(역사 공부)을 마쳐가는데 아직 그 강령(큰 줄거리)조차 알게하지 못하였다'라며 교육을 맡은 신하들이 탄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수정실록>에는 '임해군은 연장자로서 가장 횡포해 조야가 근심스럽게 여겼다'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임해군이 공부에 소질이 없는 데다 성격마저 포악하여 왕실과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었다는 의미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사춘기에 접어든 임해군이 '비행청소년'으로 전락한 것이다. 자연히 임해군은 장자임에도 일찌감치 후계자 경쟁에 밀려나 찬밥신세로 전락했고, 신하들의 지지와 기대는 동생 광해군에게 쏠리게 된다.
 
1592년 4월 13일 조선 건국 이후 최악의 국난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다. 그때까지 후계자 선정을 미루고 있던 선조는 다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사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싶지 않았지만 국가적 비상 상황을 맞이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동생 광해군이 자신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에 임해군의 열등감과 질투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왜군의 침입을 피하여 수도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몽진한다.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선조는 왕자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왜군에 맞서싸울 근왕병을 소집하게 했다. 21살 임해군이 동생인 13살 순화군과 함께 파견된 곳은 함경도였다. 하지만 정작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신성군과 정원군은 자신을 함께 따르게 하며 여기서도 노골적인 자식 편애를 드러냈다.
 
그런데 임해군 형제가 함경도로 간 지 불과 5개월 만에 조선 조정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임해군 형제가 왜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는 내용이었다. 더욱 놀라운 진실은 왕자들을 직접 사로잡아서 왜군에게 넘긴 것이 바로 조선 백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임해군은 함경도에 가서도 군대를 모으고 군비를 공출한다는 핑계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가뜩이나 전란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왕자가 자기 나라 백성들에게 버림받고 적군의 포로가 된 것은, 역대 왕조를 통틀어도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그 정도로 민심을 잃었을 만큼 임해군의 행적이 막장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본은 임해군 형제를 인질로 삼아 조선의 영토를 내주면 왕자도 풀어주고 철군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하지만 선조와 조선 조정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의 요구를 일축해버린다. 설사 임해군이 망나니가 아니었다고 해도 조선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조국에게 버림받은 임해군은 왜군 진영에서 일 년 가까이 혹독한 포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자신이 일본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자포자기했던 임해군은, 명나라 군대의 향도장(嚮導將)으로 왜군 진영에 찾아온 최우라는 신하에게 눈물을 흘리며 궁색하게 노잣돈을 구걸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런데 불과 몇 달 후에 돌연 일본이 포로로 잡힌 두 왕자를 조건없이 그대로 풀어준다. 당시 전황이 불리해진 일본은 인질로서의 이용가치도 사라졌고, 그렇다고 죽이기에도 후환이 부담스러웠던 임해군을 굳이 계속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들 광해군 질투한 선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하지만 임해군은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조선 조정의 심각한 골칫거리가 된다. 당시 광해군은 이미 세자가 되었음에도 명나라로부터 정식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시대상 명나라와 긴밀한 사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조선에게 있어서 책봉은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중요한 외교적 절차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에도 차남인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는 것을 문제삼아 책봉을 계속 거부했다.
 
한편으로 이는 당시 명나라의 미묘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萬曆帝) 역시 선조처럼 적자가 없었고 총애하던 후궁 소생의 셋째를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하여, 이를 반대하고 장남 주상락(훗날의 태창제)를 지지하던 신하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장자가 아닌 광해군의 책봉을 승인하는 전례를 만들어주면, 만력제와의 명분싸움에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하에, 조선의 요청을 무려 다섯 번이나 거절했던 것이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임해군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결격사유를 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정작 선조는 임해군의 악행과 단점을 기록하여 명나라에 보낼 예정이었던 외교 문서들을 잇달아 반려하며 오히려 임해군을 감쌌고 세자 책봉 문제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사실 선조의 진짜 의도는 장자인 임해군을 내세워 당시 세자로서 민심을 얻고 있던 광해군을 견제하려던 것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선조를 대신하여 분조(分朝)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반면 전란이 일어나자 조선을 떠나 명나라로 도망갈 궁리까지 하다가 무산되며 권위가 땅바닥까지 떨어진 선조로서는, 자신과 대비되는 아들 광해군에 대한 질투심이 극도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1602년에는 인목왕후 김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인다. 인목왕후는 1584년생으로 당시 18세였고, 남편 선조와는 32살 차이, 심지어 항렬상 아들이 되는 임해군(30살)이나 광해군(27살)보다도 훨씬 어렸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광해군을 대체할 수 있는 적장자(嫡長子)가 시급했던 선조가 무리해서 어린 왕비를 맞아들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1606년 인목왕후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게 된다. 하지만 이는 훗날 선조 사후, 오히려 인목왕후와 광해군이 철천치원수로 돌아서게 되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
 
한편 임해군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망나니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각종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또한 임해군은 도승지(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유희서라는 인물의 애첩인 애생과 간통했다. 급기야 임해군은 자신의 노비인 김덕윤과 그 수하들에게 사주하여 도적으로 위장하고 고위관료인 유희서를 청부살해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만다.

임해군의 혐의가 드러나며 조정이 발칵 뒤집혔지만, 그럼에도 선조는 여전히 아들인 임해군을 일방적으로 비호했고, 오히려 사건을 수사하던 포도대장과 유희서의 아들만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는다. 그야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장면이었다.
 
하루아침에 풍전등화 신세가 된 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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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하지만 유일하게 임해군을 감싸주던 아버지 선조가 1608년 3월, 후계자 교체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평생 왕의 아들이라는 배경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살아왔던 임해군의 운명도 하루아침에 풍전등화 신세가 된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광해군은 친형제간임에도 세자 책봉 문제 등으로 임해군과의 관계가 매우 나쁜 상황이었다.
 
임해군은 광해군 즉위 후 얼마되지 않아 역모를 모의하고 있다는 혐의로 탄핵된다. 광해군은 즉시 임해군을 압송해오라는 명을 내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임해군은 여장을 하고서 달아나려다가 붙잡히면서 오히려 자신의 혐의를 스스로 인정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광해군은 형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보낸다. 그런데 임해군이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유배형이 결정되기까지는 불과 반나절밖에 걸리지않았다. 학계에서는 역모사건이 마치 짜여진 듯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진행된 정황을 고려할 때 광해군이 임해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부러 역모 사건을 치밀하게 조작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추정한다.
 
임해군이 유배지로 간 지 4개월 만인 1608년 6월 16일, 갑자기 수도 한양으로 송환하라는 광해군의 어명이 떨어진다. 당시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 등극을 알리는 사신단을 명나라에 보냈는데, 장남을 제치고 차남인 광해군이 등극한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명나라 측에 곤란해진 사신단이 '임해군은 중풍에 걸렸다'고 거짓말로 둘러댄 상황이었다. 이에 명나라는 진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사신단을 파견하여 임해군과의 대면을 요구했다.
 
임해군이 명나라 사신을 만나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생사는 물론이고, 양국간의 외교관계에 큰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 임해군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명나라 사신을 만난 임해군은 "일본군의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중풍에 걸린 후유증이 몸이 완전치 않다"고 답한다. 이는 조선 조정이 미리 임해군에게 알려준 각본대로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대신들이 임해군에게 미리 대답할 말을 가르쳐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실 임해군 입장에서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조선의 국왕은 광해군이었고,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했다. 또한 사신에게 자신이 멀쩡하다는 진실을 알린다고 해도 명나라가 끝까지 보호해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쩌면 임해군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임해군 사건이 무사히 종결된 이후, 광해군은 비로소 정식으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 조선의 국왕에 책봉된다. 그리고 임해군은 다시 유배지로 돌아간다.
 
하지만 임해군은 다음해인 1609년 5월, 유배지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당시 임해군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 광해군은 형의 죽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임해군의 진짜 사인이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수장 이정표가 핍박하여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정표는 유배지에서 임해군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관리로, 광해군에게 임해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직접 보고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임해군의 석연치 않은 최후를 듣고도 사건을 정확하게 수사하려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임해군의 죽음은 지금도 사건의 진실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의문사'로 남았다.

학계에서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임해군의 죽음 역시 광해군이 직접 개입하거나 최소한 살해를 방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망나니로 악명 높았던 임해군의 경우에는, 그의 사망을 애도하거나 굳이 의문을 제기하려고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임해군은 태어날 때부터 왕의 장남이라는 금수저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췄음에도 본인의 열등감과 잘못된 처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는 가장 비참한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노골적인 편애와 차별로 평생 자식들의 인생에 악영향을 미친 아버지 선조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또한 왕자 시절만 해도 임해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자질을 보여줬던 동생 광해군 역시 정작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암군으로 전락했고 끝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그 몰락은 임해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일 임해군이 진작에 왕자이자 장남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하여 좀더 노력했더라면? 본인과 동생 광해군의 인생은 물론이고, 훗날 조선 왕실의 역사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벌거벗은한국사 임해군 선조 광해군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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