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공연 끝나고 커튼콜 때.
편성준
핀조명이 켜지면 윌프리드라는 남자가 마이크 앞에 나와 얘기를 시작한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클럽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인생 최고의 정사'를 벌이고 있던 밤이었는데, 그렇게 빵빵한 엉덩이는 처음이라 너무 흥분했는데, 그런데 절정의 순간을 맞은 새벽 세 시에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여보세요. 와보세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이 첫 장면은 묘하게도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소설도 첫 문장에서 어머니의 죽음부터 알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장면에 연출가 김정은(김정은이 아니라 김정이다) 연극만이 줄 수 있는 분위기의 전환과 역동성을 부여한다. 대사가 끝나자마자 다른 배우들이 윌프리드를 둘러싸고 현대무용하듯 심각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취하며 '여보세요, 와보세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라는 구절을 무한 반복하는 이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이 신을 보는 순간 나는 연극을 보러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 <그을린 사랑>으로 처음 만난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이 작품을 보기 전 희곡만 출판하는 출판사 '지만지드라마'에서 발행된 희곡집을 읽고 갔는데 그 선집은 지문이나 설명이 일체 없는, 그야말로 대사로만 이루어진 불친절한 책이었다. 그래서 이런 앙상한 희곡을 가지고 김정이 과연 어떤 연출을 선보일까 너무나 궁금했다. 두 시간 동안 연극을 지켜 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연극을 본 감상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김정 연출은 천재다'이다.
아버지의 시신을 어머니 곁에 묻는 것을 결사 반대하는 친척들은 그가 나쁜 놈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몸이 약한 어머니에게 아이를 낳게 하다 죽였기 때문이라는데 그게 그렇게 극악무도한 일인가. 어머니도 그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려 윌프리도를 낳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그를 묻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 멋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묻기 위해 연안지대를 떠돌다가 윌프리도가 만나는 인물들의 다양한 사연과 아픔은 전쟁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라는 이 연극의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일단 배경은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이제는 시체를 묻을 땅도 없다는 레바논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가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시몬, 아메, 사베 , 마시, 조제핀처럼 처음 보는 레바논 시민인 경우도 있고 꿈에서 등장하는 아더왕의 기사(기로믈랑)도 있고, 죽었는데도 산 사람처럼 말을 하는 아버지, 또는 젊은 날의 아버지·어머니도 있다. 연극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복잡한 구성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한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다 펼쳐진다. 무대 왼쪽 위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감독 채석진의 드럼은 영화 <버드맨>을 생각나게 한다.
윌프리드 역의 이승우나 젊은 아버지 역의 송철호, 어머니 잔과 기사 기로믈랑 역을 모두 하는 최나라 배우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특히 '아랫마을의 미친놈' 사베 역을 맡은 공지수 배우의 연기는 당분간 잊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공지수는 희곡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등장인물의 개성을 스스로 만들어 냈는데 가히 '히히 하하 연기'의 창조자라고 부르고 싶다, 다른 배우와 차별되는 그의 연기는 특이한 발성뿐 아니라 유명한 무용대회 수상자라는 또 다른 캐릭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김정 연출과 함께 한 전작 <이 불안한 집>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의 움직임엔 물이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파격이 섞여 있다.
고선웅 단장과 김정 연출은 왜 와즈디 무아와드의 이 불친절한 희곡을 무대에 올릴 생각을 했을까.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억울한 사연은 넘쳐 나고 인간의 역사는 부조리의 연속이다. 인간은 그걸 타인에게 말하며 그나마 견딘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말하는 행위다.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하면 '우리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나 할까.
이 연극의 드라마트르그인 샤를로트 파르세는 '타인에게 증언하다는 것은 망각과 무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성을 보여주고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고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성장한 이민자 와즈디 무아와드가 레바논의 상흔을 돌아보고 그걸 보듬어 안음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얻고 혼자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려는 의 '빅픽처'가 아닐까. 이야기하고 기억함으로써 마음을 짓누르는 큰 짐을 나눠 가지는 것이다. 전화번호부 속의 이름들을 하나 하나 기록하며 위로하는 조제핀의 행위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이다. <연안지대><화염><숲><하늘>은 와즈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이다. <화염>은 드니 뷜뇌브의 영화 원작이고 나는 <숲>을 연극으로 보았는데 다른 작품들도 상연될 때마다 다시 보고 싶다. 원작의 밀도가 높으면서도 열려 있는 희곡들이라 늘 연출까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다.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