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혹, 어쩌면 시시때때로 역사에 개입하는 상상을 즐기고는 한다. 현재 사회 운영 전반에 대한 불만과 여기에 소속된 자기 존재의 미미함을 재편하려는 욕구의 표출이기도 하다. 역사의 흐름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개인이나 사회 집단이 추구하는 정체성 확립에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역사의 재편을 바라는 인간의 본성이 문학을 비롯한 예술계 전반에서 모티브로 활용되어 창작의 홀씨처럼 확장된다. 이런 시도는 공연계에서도 활발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리만족에서부터 역사에 내재한 진실과 왜곡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나는 고발한다. ‘나는 고발한다.’ 격문이 실린 로로르 신문(1898년 1월 13일 목요일)

▲ 나는 고발한다. ‘나는 고발한다.’ 격문이 실린 로로르 신문(1898년 1월 13일 목요일) ⓒ https://ko.wikipedia.org/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는 풍부한 작품 창작과 비평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한 가정을 사회학적 계보로 삼았고, 소설 <목로주점>과 혁명적 문학작품 <제르미날>로 연결되었다. 빅토르 위고와 더불어 프랑스의 지식인으로 추앙받았다.

에밀은 '드레퓌스 사건'을 외면하지 않았다. 1898년 '나는 고발한다(원제목,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한다. 시대가 조작한 스파이 사건의 전말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 용기였다. 찬반으로 나뉜 논쟁은 격렬했고 프랑스는 내전 상황처럼 혼돈에 휘말렸다.

그러나 에밀은 사건의 재심 결정을 확인하지 못한 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1906년 진실이 완벽하게 드러나고, 비로소 에밀 졸라는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을 전개한, 프랑스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흉내 내지 않는 독창적인 화법" - 뮤지컬 <에밀> 대사 중에서
 
뮤지컬이 담아낸 시기는 1902년 9월 29일이다. 그가 숨졌던 단 하루의 시간을 응축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에밀은 은신처에서 죽음의 공포와 맞서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날 밤, 생면부지의 젊은 남자가 방문한다. 줄곧 경계하던 에밀, 한때는 절친이었던 폴 세잔의 그림을 전달하러 왔다는 말에 문을 열어준다.
 
청년의 이름은 클로드(각색 과정에서 채택되었을 이름은 다층적인 함의를 지녔다). 에밀과 그의 대화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로 이어지며 생애를 공유한다. 그러면서도 경계와 갈등이 함께 전개된다. 2인극으로 펼쳐지며 정제되고 격앙된 대사에 술을 마시는 장면을 곁들였다. 이런 와중에 예상하지 못했던 무대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적인 연기는 관객을 들썩이게 했다.
 
에밀은 자기 소설 <작품>이 폴과 절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임을 인정하며, 폴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며 자인한다. 그러나 폴의 그림을 평가하는 에밀의 식견은 그에게 보내는 무한 신뢰가 아닐 수 없다. '그 누구의 것도 흉내 내지 않는다'라며 그를 추켜세운다. 주어진 질서만을 수용하거나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에밀의 시대적 소명과도 일치한다.
 
그리하여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립한 에밀과 폴의 관계는 어느 지점에서 화해의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러나 둘의 우정이 화해할 수 있는 기회는 필름 속에서만 가능했다. 2016년도에 개봉한 다니엘르 톰슨 감독의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할 내용이 신(scene)에 담겼다.
 
"진실은 행진한다." - 뮤지컬 <에밀> 대사 중에서
 
에밀과 클로드의 대화는 평온하다가도 불안하게 굴곡지며 위험한 순간을 맞닥뜨린다. 드레퓌스는 진정 스파이인가? 조작된 사건인가?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클로드는 '나는 고발한다'로 피폐해지고 위험에 노출된 에밀을 질타한다. 왜 이렇게 사는지, 드레퓌스는 조국을 배신한 범죄자라는 사실을 강박적으로 설득하려 한다. 결국 드러난 클로드의 정체, 그가 손에 쥔 권총 격발한다.
 
1906년, 드레퓌스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다. 이 해에 폴 세잔이 사망했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까? 재심 결과는 프랑스를 미래의 사회로 전진하도록 재편했다. 왕정복고는 무산되었고 공화제는 공고해졌다. 이 현상은 진보다, 라고 평가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면 시대의 혼란과 정의의 실종에 굴복하지 않았던 에밀의 행동이 위대하게 와 닿는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를 수반하지 않던가.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에 근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무죄는 그동안 핍박받았던 유대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시오니즘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 현재도 진행 중인 팔레스타인을 향한 끔찍한 전쟁. 에밀이 보았다면 절대 침묵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밀> 6월11일 출연배우 공연장 로비에 설치된 뮤지컬 <에밀> 오늘(6월 11일) 출연배우

▲ <에밀> 6월11일 출연배우 공연장 로비에 설치된 뮤지컬 <에밀> 오늘(6월 11일) 출연배우 ⓒ 황융하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법 앞에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 뮤지컬 <에밀> 대사 중에서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역사의 한 줄기에 개입하려는 욕구는 중동의 사태 앞에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 법 앞에서 차별받거나 무고당해서는 안 된다며 일갈하지 않았던가. 그가 현재의 참혹함과 아이러니를 마주한다면, 펜의 위대함을 움켜쥐고 촌철살인의 글로써 위대한 비판의 영역을 수립했으리라. 뮤지컬을 관람한다면 그 내용에 조금은 다가가게 된다.
 
뮤지컬 관람 후, 클로드가 에밀에게 접근하기 위해 가져온 폴의 그림을 1902년에 사망한 에밀은 생전에 보았을지? 궁금증에 찾아보았다, 답은. 우선 어떤 그림일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뮤지컬 안에서 확인하기를 권한다.
 
에밀의 행동으로 결과가 뒤집힌 드레퓌스 사건은 오늘날의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부패를 들여다보게 한다. 저널리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시녀로도 모자라 혐오와 왜곡된 정보로 진실을 은폐한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에밀처럼 행동할 저널리스트의 분출을 기대한다.
 
창작 뮤지컬 <에밀>은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역사극이자 창작을 덧대어 서스펜스적 긴장감을 보탠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에 공감하되 상상적 개입의 욕구를 넘어 우리 현실에 빗대어 본다면 의미는 짙어진다. 에밀 졸라의 창작에 대한 고뇌, 행동하는 지성인의 의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공연이다.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 사건'의 전면이 드러난, 1937년 영화 <에밀 졸라의 생애>를 곁들여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공연은 오는 9월 1일까지이다.
 
에밀 졸라를 찾아라! 3관 입구에 부착된 '에밀 졸라를 찾아라!' 이벤트 안내장.

▲ 에밀 졸라를 찾아라! 3관 입구에 부착된 '에밀 졸라를 찾아라!' 이벤트 안내장. ⓒ 황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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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의 질서를 의문하며, 딜레탕트Dilettante로 시대를 산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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