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벌어진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사고는 중국 항공사 소속의 여객기가 경상남도 김해시 인근의 산악 지역에 추락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도 한국 내에서 발생한 항공사고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사건으로 남아있다.
 
외국 항공사 소속의 비행기였지만 사상자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한국인이었다. 무려 136명의 한국인을 태운 중국 항공기가 갑자기 추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6월 6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131회에서는 '복행하라 129편'을 통해 비극적인 항공사고의 진실과 그 뒷이야기를 조명했다.
 
2002년 4월 15일, 한국 사회는 한일 월드컵을 한달여 앞두고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경남에 위치한 김해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중, 문자와 뉴스를 통해 학교와 가까운 지역 인근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학생회장을 포함한 10여 명 정도의 학생들은 호기심 그리고 책임감에, 즉석에서 택시를 나눠 타고 사고 현장을 찾아가보기로 결정한다.
 
사고 당일 오전 8시 37분경, 중국국제항공(에어 차이나, Air China) 소속으로 중국 베이징을 출발하여 김해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민항기 129편에는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총 16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한국인이 무려 136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다수는 중국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한국인 단체 여행객들이었다.
 
베이징에서 김해공항까지 비행시간은 약 2시간, 이륙과 비행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도착지인 김해공항의 기상상황이 안 좋아서 당일 오전부터 항공기 이·착륙이 금지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칙대로라면 항공기는 예비공항인 인천공항으로 가야했지만, 기상상황이 호전될 조짐을 보이자 원래대로 김해공항으로의 비행을 계속했다. 하지만 비바람이 계속되면서 김해공항의 기상상황은 여전히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11시 15분경, 착륙을 알리는 기내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항에 도착한 줄 알았던 승객들은 별다른 의심없이 저마다 좌석벨트를 매고 착륙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뚝 떨어지듯 요동치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기체가 크게 기울어졌다. 삽시간에 비행기 안에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정확한 사고 시각은 오전 11시 21분 17초. 베이징 공항에서 출발한 에어차이나 129편 항공기가 김해공항에 착륙하던 중 인근의 돗대산에 추락한 것이었다.
 
비행기 탑승객이었던 여행사 직원 설익수씨는 의식을 찾고 난 후, 비로소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행기 기체는 찢어져 있었고 같은 열에 앉아있던 다른 탑승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익수씨는 파손된 비행기 틈새를 비집고 밖으로 간신히 기어 나왔다. 그가 목격한 것은, 떨어지는 빗방울과 안개 속에 수많은 사상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있는 모습이었다.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나서 동체가 산 여기저기에 흩어졌고, 추락 후 화재까지 발생했다. 익수씨는 추가 폭발을 우려해 달아나려고 했으나, 자신이 인솔자로 데려왔던 한국인 관광객들을 떠올리고 책임감에 비행기로 되돌아왔다. 익수씨는 혼신의 힘을 다해 쓰러져있던 사람들을 구조하고 폭발 위험을 알리며 20여 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했다.
 
익수가 구해낸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다시 비행기 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한 사람이 손을 잡아 가지말라며 익수씨를 만류했다. 그리고 그 직후, 비행기 잔해에서 추가 폭발이 발생했다. 아직도 비행기에 남아서 구조를 요청하던 부상자들의 목소리도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생존자인 익수씨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고가 난지 불과 1분 만인 11시 22분, 119에 목격자의 최고 신고가 접수됐다. 구조 요청 전화를 한 이들 중에는 사고 비행기 탑승객도 있었다. 부상자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던 데다, 비까지 내려서 생존자들은 추위에 떨어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신고접수를 받자마자, 119 구조대원들이 급히 신어산 쪽으로 출동했다. 사고현장은 신어산 자락에 있는 돗대산이었다. 하지만 가파른 산길이라 차량의 접근이 불가능했고, 구조대원들은 무거운 장비와 들것을 짊어지고 비가 와서 질퍽거리는 산길을 뛰어올라가야했다. 비행기 추가 폭발의 불안 속에서, 시신이 불에 타고 있는 참상을 목격한 베테랑 소방수들은 막막함을 느꼈다고 한다.
 
소방관에 이어, 경찰, 군인들까지 현장에 도착했다. 구조대는 불길을 잡고 생존자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차나 중장비가 들어올 수 없어서 모두 사람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었다.
 
비극적인 사고 속에서 다행스러운 기적도 있었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임신 7개월의 우즈베키스탄 아내는 천운으로 부부와 태아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아내는 사고 직전 담배 연기로 인한 고통 때문에 승무원으로부터 혼자만 자리를 옮길 것을 권유받았지만, 남편 곁에 있고 싶다며 거절했다. 이들 부부와 같이 뒷좌석에 앉아있었던 탑승객 중 생존자가 많이 나왔다. 만일 그때 자리를 옮겼다면 그녀와 태아의 운명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예상치못한 해프닝도 있었다. 현장에 투입된 오세준 소방관은 비행기에서 나체로 튕겨나오며 중상을 입은 한 승객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었다. 승객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안타깝게 사망했는데, 몸에 소방관 옷을 두르고 있다는 이유로 소방관 중 사망자가 발생한 게 아니냐는 오해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고 현장에서 구조대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이상욱씨를 비롯한 김해고 학생들은, 현장에 도착하여 참상을 목격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기꺼이 구조 작업에 동참했다.
 
학생들은 미끄러운 산길에 톱밥을 까는 작업을 하거나 구조 장비를 나르고, 구조대에게 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상자들이 이송되는 병원으로 가서 일손을 도운 학생도 있었다. 또한 인근에서도 사고 소식을 듣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현장으로 찾아와 작은 손이라도 보태기 위하여 노력했다. 당시 학생들은 '한 분이라도 더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몸을 사리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어느덧 하루가 흘렀다. 사고대책본부에 모인 탑승객 가족들은 애끓는 심정으로 생존 여부를 확인해야했다. 그날 저녁, 시신 사진과 유류품 사진이 가족들에게 먼저 전달되었다. 실제 시신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시신들의 상태가 추락과 화재 등으로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신원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시신이 분리되어 각기 다른 병원으로 이송된 사례도 있었다.
 
구조가 확인된 생존자는 37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탑승객은 사실상 사망자로 간주됐다. 현장에서 사망한 탑승객들과 병원 이송후 추가 사망한 이들까지 사망자는 130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형체로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가족들의 남은 흔적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사고 현장을 찾은 유족들 역시 참혹한 광경을 둘러보고 곳곳에서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사망확인이 불가능했던 유족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사고 현장을 둘러보고 가족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구조대도 사고 현장을 붓으로 구석구석 쓸어가며 작은 뼛조각 하나까지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 현장을 수습했던 구조대원들도 사고 구조 당시보다도 오히려 이때가 가장 괴롭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치과의사였던 탑승객 양진경씨는 부부와 자녀, 시부모님까지 6명이 함께 가족여행을 갔다가 가족 전체가 모두 변을 당했다. DNA 검사를 통해 사망이 확인된 고 양진경씨의 유족들은, 불에 타서 형체도 없는 시신이 진경씨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되자 슬픔을 참지 못했다.

한편 비극적인 항공사고의 원인이 밝혀졌다. 사고 당시 129편 블랙박스의 조종실 음성 녹음 기록이 공개됐다. 김해공항은 주변에 산이 많아서 비행과 착륙이 어려운 지역이었고, 사고 당시 기상상태도 좋지 않았다. 당시 항공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산악지역을 180도 돌아서 착륙하는 '선회접근'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인 기장은 비행 조종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제1 부조종사에게 조종간을 넘겨받고 활주로를 확인해 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기장과 부조종사는 활주로를 시야에서 놓쳤다. 이런 경우에는 일단 착륙하고 다시 떠올라서 안전한 고도와 지역으로 이동하는 '복행(復行, Go Around)'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구름 속에서 진입한 비행기는 우선회를 해야 하는 시점에서 15초나 더 비행을 했다. 부조종사는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다며 복행을 권고했으나, 기장은 이를 무시하고 고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비행기는 돗대산에 충돌하고 말았다.

부조종사가 복행 권고를 했던 당시는 바로 충돌 7초 전이고, 시뮬레이션 결과 불과 6초 전에만 복행을 했어도 끔찍한 사고는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원칙과 안전을 무시한 중국인 기장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수많은 귀중한 인명들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작 기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본인은 생존했다. 그는 복행 명령을 무시한 것에 대해 '기억이 안 난다'는 변명으로만 일관했고, 끝내 명확히 해명하지 않았다. 중국인 기장은 비행시간 경력은 약 7000시간에 이르렀지만, 기장 경력은 겨우 7개월 차에 불과했고, 심지어 김해공항에 선회 접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129편 사고의 주요 원인은 '조종사 과실'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정작 사고의 원흉인 기장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유족들은 그 이후의 상황과 기장의 행적, 후속 처리에 대해서는 중국 측으로부터 어떤 답변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사고로부터 무려 3년이 지난 2005년에야 한국, 중국, 미국의 합동조사로 인한 '항공기 사고조사 보고서'가 발표됐다. 몇몇 유족은 중국 측과 합의를 했지만 많은 유족들은 배상을 위해 소송을 진행했다. 유족들은 가족이 사고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사망자의 수익이 얼마인지 증명해야 돈을 배상해주겠다'는 중국 측의 뻔뻔한 태도에 또 한번 상처를 받아야했다. 배상을 위하여 수년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유족들은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설익수씨는 129편 사고 당시 본인 역시 탑승객이었음에도 다른 사람들을 구조해내며 미국 <타임>지에서 '아시아의 영웅들'로 소개되기도 했다. 정작 익수씨는 "제가 젊어서, 두 다리 멀쩡해서 한 것"이라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으로 사고 이후 김해공항은 안전성 향상을 위해 활주로 주변에만 있던 활주로유도등이 추가 설치되었다. 주간 비행 때는 장애물의 존재를 알리는 주간장애표지판이 설치되는 등 늦었지만 필요한 변화들이 단행됐다. 다행히 김해공항에서 이후로 더 이상의 사고는 나오지 않았 다. 또한 이 사고로 신공항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20여 년간 무산과 재추진이 반복된 끝에 결국 2021년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확정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생존자와 유족들은 사고 이후 아직도 오랜 시간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무엇으로도 채우기 힘든 아픔이었다. '에어차이나 129편 추락사고 추모탑'에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로 유족들이 못다 전했던 사랑과 그리움의 메시지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대한민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있는 모든 공항들이 모두 안전한 세상이 되는 것.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궁극적인 바람일 것이다. 129편 사고의 비극은 '선회접근 시 활주로를 시야에서 놓치면, 반드시 복행'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원칙'을 지키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원칙이란 어렵거나 힘든 게 아니고,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이기에 원칙이고 매뉴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원칙만 잘 지킨다면 세상은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꼬꼬무 129편항공사고 중국항공 복행 김해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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