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42회 벤쿠버국제영화제 관객상을 받으며 이목을 끈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가 지난 5월 29일 뒤늦게 국내 개봉했다. 흡혈 의지가 없는 뱀파이어 소녀와 자살을 꿈꾸는 소년이라는 특이한 조합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이러한 소재를 우울증, 자살 예방, 그리고 안락사와 소수자성 등 갖은 사회적 의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영화 속에 녹여내는 장치로 만든다.
 
영화가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그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원리, 그리고 '장르 영화'에도 사회 의제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동시에 알아보자.
 
모든 훌륭한 이야기는 연민으로 시작된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주인공 사샤의 캐릭터성을 시작부터 강렬하게 드러낸다. 뱀파이어 일가족에서 자란 사샤는 생일 선물로 인간 광대를 받게 되는데, 사샤를 제외한 일가족은 광대를 먹이로만 보는 한편 사샤는 그의 마술 공연을 보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광대가 죽은 이후에도 피를 먹기를 거부한 사샤의 부모는 자식을 각종 방식으로 검사한다. 작중 한 뱀파이어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데, 사샤는 궁지에 몰린 인간을 볼 때 식욕 대신 동정심을 먼저 느끼기 때문에 사냥을 어려워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러한 진단을 애써 외면하고,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된 뱀파이어가 될 거라며 청소년기가 찾아올 때까지 사샤를 별도의 '치료' 없이 키운다.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스틸컷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스틸컷 ⓒ 트리플픽처스

 
이후 남이 사냥해 온 혈액 팩으로만 목숨을 부지하던 사샤는 결국 뱀파이어다움을 갖춰야 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사촌 언니와 함께 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심한 괴롭힘 끝에 자살을 결심한 소년 '폴'과 가까워지게 된다.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폴을 죽이기 싫어하는 사샤가 시간을 끌면서 벌어지는데, 몇몇 관객들은 여기서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갈등이 사샤가 '눈 딱 한 번만 감고' 흡혈을 저질러 버리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샤의 인간을 향한 연민은 작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리안 루이스-시즈 감독은 사샤를 '미디어 속 인물들에게 공감하는 관객'에 대한 은유로 그려낸다. 사샤의 가족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애써 마술을 진행하는 광대를 '얼른 먹어치워야만' 하는 존재, 즉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사샤는 광대가 늘어놓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짧은 순간이지만 그와 정서적인 교감을 이룬다. 영화·이야기 속 인물에게 공감하는, 소위 '과몰입'이라 불리는 현상을 겪는 화면 밖 사람들을 빗댄 존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샤를 답답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로 그려내면서 감독은 관객들이 사샤에게 이입할 수 있게 만들었고, 모든 훌륭한 이야기가 그러하듯 주인공이 느끼는 연민으로부터 출발해 더욱 깊은 주제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주제에 비해 표상적인 소재? '심리적 장벽' 낮추기 위해 필요했다

사샤와 폴은 서로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사샤가 '인간성을 유지하면서도 뱀파이어답게 살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에는 자살 희망자인 폴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고 하지만, 사샤와 함께하는 동안 점차 삶의 즐거움을 회복해 가자 포기한다. 폴은 이후 다른 자살 희망자들을 죽이자는 계획을 세우지만, 그것조차 탐탁지 않았던 사샤는 결국 연명치료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안락사 도우미'가 되기를 자처한다.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스틸컷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스틸컷 ⓒ 트리플픽처스

 
이처럼, <나는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가 1시간 30분이라는 소재 안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한 동시에 묵직하다. 뱀파이어의 전통적인 문화를 거부하는 사샤를 설득하려는 친척들의 모습은 사회적 소수자성을 드러낸 아이를 '전환시키려 하는' 가족의 뒤틀린 사랑으로 보이는가 하면, 사샤와 함께하며 자신감을 회복하는 폴의 여정을 통해 '자살 희망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한 영화 안에 청소년의 성장, 오랜 질서를 거부하는 이들의 소수자성, 그리고 죽음에 관한 고찰까지 '큼직한' 의제들이 밀집해 있는 셈이다.
 
혹자는 영화가 우울증과 안락사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지나치게 표상적인 이야기만 펼쳐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작중 던져지는 다양한 질문들은 대부분 각각이 하나의 영화로 펼쳐져도 모자랄 정도로 '진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의제를 부담 없이 다루기 위해 '허무맹랑한' 소재를 이용한 것은 의외로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나는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역시 그 계보를 따른다.
 
샬롯 브론테의 대표적 소설인 <제인 에어>는 결혼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의 독립심이라는, 당대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큰 성에 갇힌 여자'라는 고딕 호러(gothic horror)의 문법을 가져온 대표적인 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역시,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시체가 통제를 벗어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표면에 내세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공포라는 큼직한 주제가 뿌리내리고 있다. 이처럼 과감한 상상력을 위시한 펄프 픽션(pulp fiction)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는 방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러한 펄프적 상상력은 미디어 속에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는 관객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동시에, 그들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생각할 여지를 남기기 위해 사용된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이를 아주 적극적으로 다룬 예시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상상력이 가미된 질문의 힘,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장르적으로 던져진 질문이 현실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이러한 질문에 당당히 '미디어의 질문은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답한다. 작중 끝까지 흡혈을 거부하던 사샤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이유는 폴의 직장 동료 '앙리'가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보인 사샤의 동정심이 '인간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에서 그치지 않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작품 외적으로도, 대중문화가 빚어낼 수 있는 사회적 효과는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다. 서안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종 학살을 다루는 서구권 주류 언론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하지만 'MZ세대'라 불리는 밀레니얼·Z세대는 틱톡(Tic Toc)등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이 움직임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4부작으로 영화화된 수전 콜린스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헝거 게임>과 현실을 대조하는 영상들의 출연이다. <헝거 게임> 속에서 모든 자원을 독점한 '캐피톨'은 시민들의 관심을 반란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온갖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Z세대 틱톡 크리에이터들은 이러한 캐피톨을 서구 주류 사회에 빗대어, 가자지구에서 죽어 나가는 아이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지원을 거부하는 바이든 행정부와 아무런 일도 없는 척 멧 갈라(met gala) 등의 호화 행사로 시민들의 눈을 돌리는 미국의 위선을 지적했다. 대중문화가 제기한 문제의식이 실질적인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을 위한 크리에이터 연대(Creators for Palestine)'는 정부의 지원 없이 소비자들의 후원만으로 150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영화 <헝거 게임: 모킹제이> 스틸컷

영화 <헝거 게임: 모킹제이> 스틸컷 ⓒ 라이언스게이트

 
이와 같은 현실을 감안했을 때,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의 장르적 상상력이 사회적 메시지를 약화한다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가 <헝거 게임> 시리즈처럼 거대 자본을 위시한 주류 미디어가 될 가능성은 작지만, 그럼에도 '안락사 도우미가 된 소수자 뱀파이어'라는 이야기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명확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작품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한 문구가 실려 있기까지 하다.

제작진의 이러한 진심이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닿는다면,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어엿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삶의 의지를 되찾은 폴은 사샤의 '인간적인 흡혈'을 옆에서 지원하기 위해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사샤가 던진 질문과 폴의 대답은 영화의 한계를 직시하는 동시에 변호하는 외침처럼 들린다.
"안 되면 어떡해?"
"그래도 해 볼게."
이처럼,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사랑스러운 소년소녀의 성장담에 사회적 의제까지 담아내는 데 성공했고, 영화를 감상했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까지 한다. 가벼우면서도 잔잔한 울림을 주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근처의 영화관에서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를 관람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난엄청창의적인휴머니스트뱀파이어가될거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