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에게 인사하는 라건아5일 경기도 서수원칠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5차전 수원 KT 소닉붐과 부산 KCC 이지스의 경기. 이날 경기에서 승리하며 챔피언 자리에 오른 KCC 라건아가 그물 세리머니 후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라건아의 거취와 신분 문제는 농구팬들의 뜨거운 감자였다. 라건아는 한국무대에서 활약한 기간만 12년, 특별귀화 이후 한국국가대표로서 6년을 활약했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보내며 5회의 챔프전 우승과 3회의 최우수 외국인 선수를 차지했으며 통산 611경기에 나서 평균 18.6득점 10.7리바운드 2어시스트 1.2 블록, 누적 1만 1343점(역대 2위)을 달성한 KBL의 레전드로 등극했다. 국가대표로도 에이스로 활약하며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동메달, 2019 FIBA 농구월드컵 본선 1승 등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사실팬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한국무대에서 오랫동안 뛰었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라건아를 이제는 국내 선수 신분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이 경우에 라건아를 보유한 팀이 사실상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더 뛰는 셈이 되어 리그 밸런스를 파괴할 수 있다는 현실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라건아 이전에 귀화선수는 문태종·문태영 형제와 이승준, 전태풍 등이 있었다. 문 형제는 라건아와 마찬가지로 법무부 특별귀화제도를 통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이승준과 전태풍은 스스로 귀화시험을 거쳤다. 이동준과 김민수는 국내 대학을 졸업하고 KBL 신인선수 드래프를 통하여 데뷔했다. 이들 모두 국가대표로도 활약했지만, KBL은 이들의 신분을 한국 선수로 인정했고 외국인으로 분류하지는 않았다.
라건아 이전에 귀화선수 중에 가장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다고 할 만한 사례는 문태영과 문태종 형제다. 소속팀은 이들 외에도 2명의 외국인 선수를 더 보유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전력의 수혜를 입으며 우승을 여러 번 차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그 밸런스 파괴라는 불만이 제기된 적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라건아의 딜레마는 그가 여전히 너무 '뛰어난 선수'라는 데서 발생했다. 1989년생으로 만 35세가 된 라건아는 기량은 조금씩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리그 최정상급의 빅맨으로 인정받고 있다.
라건아는 2023-2024시즌 플레이오프에서도 12경기에 출전하며 평균 22득점 12.3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해 KCC가 사상 최초로 정규리그 5위팀의 챔피언결정전 정상에 오르는 데 앞장선 실질적인 MVP였다. 현재 KBL 정상급 외국인 선수들도 여전히 라건아를 막기 어려워 한다. 라건아가 만일 국내 선수로 인정받았다면 지금 당장 FA 자격을 얻어서 KBL 최고 수준의 몸값을 보장받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신분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현실적으로 노쇠해가고 있는 라건아에게 더 이상 외국인 선수 1옵션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가다. 프로구단들이 라건아의 영입을 포기할 가능성도 있으며, 라건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2옵션으로 뛴다고 해도 몸값이 크게 하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동안 라건아를 국가대표팀에서 중용해왔던 농구협회도 라건아의 계약연장에 대하여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애시당초 KBL에서 국내 선수와 외국인 선수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KBL은 현실적으로 외국인 선수들이 각 팀의 에이스를 전담하고 있으며, 리그 MVP급으로 거론되는 국내 선수라고 할지라도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1옵션을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외국인 선수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자연히 프로구단들은 더 젊고 우수한 외국인 선수들을 선호한다. KBL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서장훈이나 김주성같은 국내 선수들은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주전으로 활약하는 게 가능했지만, 외국인 선수가 35세를 넘겨서도 리그에서 계속 활약하는 사례는 드물며 심지어 1옵션으로 중용되는 경우는 더욱 찾기 힘들다.
한편으로 라건아의 신분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농구에서 특별귀화제도의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엄연히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국가대표로 태극마크까지 달았던 선수가 정작 자국리그에서는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한국선수로서의 자격을 부정 당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한국 선수, 불필요할 때는 외국인 선수'라는 기묘한 이중잣대는, 결국 한국농구계에서 특별귀화라는 제도적 수단을 그저 국가대표팀에 합법적으로 '용병'을 들이기 위한 꼼수로만 생각하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라건아에게는 이제 외국인 선수로 다시 한국무대에서 경쟁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또다른 해외리그로 진출하는 선택지가 남아있다. 라건아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앞으로 한국농구계에서 귀화선수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례가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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