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영국 왕실(British royal family)은 약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최고의 왕실이자, 지금까지도 군주제를 유지하는 국가 중 가장 큰 존재감을 과시하는 명가로 꼽힌다. 현재 영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된 국가는 전 세계 56개국에 인구는 25억 명에 이르며 영국의 국왕은 전 세계 인구의 1/3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수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에 빛나던 영국 왕실은 이면에서는, 수많은 스캔들과 사건사고에 연루되며 바람 잘 날 없는 시간을 보냈다. 최근에는 왕실의 이미지 추락으로 인한 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는 데다, 국왕과 왕세자빈의 암 투병 소식까지 알려지며 영국 왕실은 전례없는 위기에 직면해있다는 평가다.

5월 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0회에서는 '바람 잘 날 없는 영국 왕실의 금쪽이들'편을 통하여 현대 영국 왕실의 빛과 그림자를 조명했다. 박정규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국민 곁으로 온 로열패밀리... 드러난 사생활의 후폭풍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지금의 영국왕실은 윈저 왕조(House of Windsor)로 불린다. 하노버 왕조(House of Hanover, 1635-1901)의 마지막 군주였던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독일 출신의 앨버트 공작과 결혼하면서 남편의 가문을 따라 '작센 코부르크 고타'로 영국 왕조의 성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2차대전 시기에 접어들며 영국은 독일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고, 본래 독일계 혈통이었던 영국 왕실은 독일과의 단절을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독일을 연상시키는 작센 코부르크 고타라는 이름 대신 가장 영국적인 이름을 찾던 영국 왕실은, 별궁이었던 윈저성을 이름을 따서 왕조의 이름을 개명한 것이 오늘날의 원저 왕조다.
 
윈저 왕조는 엘리자베스 2세(1926-2022) 여왕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였다. 여왕은 즉위와 동시에 공식 선언을 통하여 '자신과 자녀들은 물론 결혼한 후손들까지 성을 윈저로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윈저 왕조의 정통성을 지키겠다는 엘리자베스 2세의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왕실의 권위를 내려놓고 국민들과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여왕은 영국 군주로는 최초로 미디어 친화적인 정책을 펼쳐 1953년 6월 2일 자신의 대관식을 TV를 통하여 생중계하는가 하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왕실의 평범한 일상을 공개했다. 베일에 싸여있던 로열패밀리의 모습에서 벗어나 국민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는 한편으로 미디어를 활용하여 왕실을 영국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각인시키려는 계획이기도 했다. 영국 왕실과 로열패밀리를 향한 전 세계 대중의 관심은 크게 높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적극적인 미디어 노출은 윈저 왕조에게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불러왔다. 그동안 신비주의에 가려져왔던 영국 왕실의 어두운 이면과 스캔들도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기품있고 고귀한 로열패밀리로만 여겨지던 왕족들이 실제로는 오은영도 울고 갈 각종 문제아에 사고뭉치 투성인이 '금쪽이'였다는 사실들이 연이어 폭로되면서 왕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동생이자 조지 6세의 차녀였던 마거릿 공주는 젊은 시절 아름다운 외모와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성격으로 영국 사회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왕실 경호원이었던 피터 타운센드와의 스캔들이었다.
 
공주와 경호원의 사랑이야기라면 달콤한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것 같지만, 문제는 타운센드가 평민 출신으로 나이는 공주보다 무려 16살이나 연상인 삼촌뻘인데다, 이미 아이까지 있는 이혼남이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 타운센드가 공주와 교제하기 시작하면서 이혼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두 사람의 '불륜' 의혹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마거릿과 타운센드의 결혼을 반대했고,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격노하여 타운센드를 벨기에 대사관으로 전출시키는 것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결국 마거릿 공주는 타운센드와 결혼할 경우 평민으로 강등되어 왕실 구성원으로서의 모든 권리가 박탈될 것이라는 압박에 부담을 느껴 결국 세기의 로맨스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타운센드와의 결혼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며 "나는 나의 의무를 무엇보다 우선시했다"는 의미심장한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마거릿 공주는 1960년 왕실 사진사였던 앤서니 암스트롱 존스와 결혼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여왕 본인의 결혼식 이후 무려 13년 만에 치러진 로열패밀리의 웨딩 이벤트인 데다, 스캔들로 실추된 왕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TV 생중계까지 허용하며 하나뿐인 동생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러줬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앤서니는 본래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결혼 후에도 숱한 불륜을 저지르고 다녔다. 이에 마거릿 공주도 맞바람을 피우면서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 배우 피터 오툴 등 숱한 유명인 남성들과 염문설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결국 결혼 18년 만인 1978년에 이혼하게 된다. 또한 마거릿 공주 부부의 이야기는 미디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영국 왕실 최초의 사생활 스캔들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불륜과 죽음에 민심 잃은 영국 왕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그러나 마거릿 공주의 스캔들은 영국 왕실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했다. 현 영국 국왕 찰스 3세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장남으로 20세였던 1969년 정식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젊은 시절의 찰스는 영국 왕실 최초의 학위를 보유한 왕실 계승자이자 해군 장교로 군복무까지 마치며, 모범적이고 반듯한 이미지로 이때만 해도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정작 찰스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2세와 남편 필립 공은 기존의 왕실 관례에서 벗어나 아들 찰스를 또래 아이들과 같은 평범한 환경속에서 한편으로는 강인하게 키우길 원했다. 찰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왕실 교육기관이 아닌, 아버지 필립의 모교인 스코틀랜드 고든스타운 기숙학교로 진학한다. 영국 왕실 역사상 왕족이 일반 학교에 다닌 것은 찰스가 최초일 정도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의 찰스는 기숙학교의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왕세자임에도 동문들에게 학교폭력을 당하여 코뼈가 부러지고 알몸으로 찬물에 들어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정작 영국 왕실은 문제가 커질까 우려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찰스는 꾹 참고 학교를 마쳤지만 훗날 "학교생활은 징역판결을 받은 것과 같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지옥같은 학창시절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찰스는 1981년 7월 29일, 다이애나 스펜서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다. 찰스는 성인이 된 이후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남으로 부상하며 여러 여성들과 열애설에 휘말렸고, 결혼적령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미디어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다이애나는 영국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이었던 존 스펜서 백작의 딸이었고, 찰스와는 어린 시절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다이애아는 결혼 이후 아름다운 외모와 소탈한 성격으로 '서민의 왕세자비'로 불리우며 영국 국민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다이애나는 찰스와의 사이에서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까지 낳았다. 다이애나의 호감도가 높아지면서 찰스와 왕실의 인기 역시 크게 올라갔다.
 
그런데 1993년, 찰스의 불륜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어진다. 불륜의 대상은 찰스가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교제했던 카밀라 파커 볼스라는 여성이었다.
 
당시 찰스가 카밀라와 은밀한 통화를 나누는 녹취록이 미디어에 공개되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영국 왕실의 아이콘이자 모범적인 왕세자의 표본이었던 찰스의 이미지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찰스는 유년 시절 엄격한 왕실 분위기 속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며 애정결핍이 심했고, 그러한 찰스를 모성애로 감싸준 대상이 카밀라였다고 한다. 찰스는 카밀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이후에도 그녀와의 불륜을 이어갔다. 찰스는 다이애나와는 정작 몇 번 만난 사이에 불과했지만, 미디어를 통하여 열애설이 터지고 결혼을 압박하는 왕실과 언론의 분위기에 떠밀려서 마지못해 다이애나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카밀라의 수상한 행적들도 속속 드러났다. 카밀라는 불륜 사실을 숨기고 다이애나와도 절친하게 지냈고, 다이애나는 카밀라의 아이들과 종종 놀아주기도 했다. 또한 카밀라는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자신의 아이들과 하객으로 참석하기도 했으며, 신부의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하얀 옷을 입고 등장했던 의미심장한 모습이 재조명받았다.

불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다이애나는 카밀라에게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다이애나에게 "당신은 원하는 걸 모두 가졌고 세상의 모든 남자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나? 뭘 더 원하냐"며 뻔뻔한 반응을 보였다. 훗날 다이애나의 인터뷰를 통하여 이 녹취록이 폭로되면서 영국 국민들은 카밀라의 행태에 크게 분노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996년, 다이애나와 찰스는 끝내 이혼한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미디어의 지속적인 관심에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교제중이던 남자친구 도디 알파예드와 함께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여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하고 만다.
 
다이애나의 사망으로 영국 왕실에 대한 민심은 크게 나빠졌다. 그녀가 사망한 직후인 19997년 9월에 영국 여론조사에는 '군주제 유지'에 찬성하는 여론이 고작 15%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며 큰 충격을 줬다. 험악한 여론에 크게 당황한 영국 왕실은 입장을 바꿔 뒤늦게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왕실장으로 성대하게 치렀고, 엘리자베스 2세가 직접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성명문을 발표하면서 민심을 달래야 했다.  
 
불륜스캔들로 왕실을 존폐위기까지 몰아넣었던 찰스는 다이애나가 사망한 지 8년 만인 2005년 카밀라와 끝내 재혼한다. 그리고 현재 찰스 3세가 즉위하면서 카밀라는 불륜녀에서 일약 영국의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찰스와 카밀라는 국민적인 비호감 커플로 전락했고, 카밀라는 성대한 왕실 결혼식을 치르거나 웨딩드레스도 입지 못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이자 찰스와 다이애나의 장남인 윌리엄 왕세자는 현재 영국의 왕위계승서열 1위다. 윌리엄은 잘생긴 외모와 모범적인 사회 활동으로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고, 2011년에는 평민 출신의 여성인 케이트 미들턴과 9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차남 해리 왕자는 형과 달리 방황을 거듭했다. 해리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술과 담배에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불과 14살에 알코올 의존증 진단을 받는가하면, 마약인 대마초를 피워서 적발되기도 했다. 한 파티에서는 유럽에서 금기인 나치 복장을 하고 등장하는 사고까지 쳐서 '젊은 히틀러'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심지어 2012년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친구들과 내기 게임을 하다가 나체가 된 모습이 파파라치 사진에 찍히여 영국 왕실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해리는 2018년 미국 출신의 배우인 메건 마클과 결혼하면서 비로소 방황을 접고 안정을 찾는 듯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왕실의 관례에서 벗어난 손주의 결혼을 인정하고 지지해줬다고 한다. 결혼식에서 찰스 3세는 친정아버지를 대신하여 며느리 메건의 손을 잡고 해리에게 인도해주기도 했다.
 
이는 영국 왕실도 권위와 격식을 내려놓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윌리엄과 해리 형제 부부는 영국에서 'ROYAL Fab4'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며 밀레니얼 세대의 젊은 왕실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영국인들의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영국 왕실의 화목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왕실에 대한 영국 가십언론의 지나친 관심과 선정적인 보도로 인하여 케이트와 메건의 패션과 성향, 일거수일투족을 비교하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여기에 성격이 전혀 달랐던 케이트와 메건이 사소한 오해로 실제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점점 깊어졌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2020년 1월, 해리와 메건 부부는 SNS를 통하여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해리 부부는 영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녀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는 영국 왕실과는 사전 상의가 없었던 부부의 독단적인 행동이었고, 소문으로 돌던 왕실내 불화설에 더욱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엘리자베스 2세는 크게 실망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해리 부부의 선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실망한 영국인들은 메건을 탓하며 브렉시트를 빗댄 '메그시트(Megxit)'라는 용어를 붙이며 영국과 왕실을 저버린 부부의 행태를 비판했다.
 
심지어 해리 부부는 왕실 독립선언 이후에는 영국 왕실의 비밀을 미디어에서 잇달아 폭로하기 시작하며 또다른 논란을 일으켰다. 메건은 미국의 유명토크쇼인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하여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왕실의 지나친 통제로 우울증까지 겪었고 심지어 인종차별까지 당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은 메건의 인종차별 주장에 대한 질문을 듣고 사실이 아니라고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해리는 <스페어>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여 자신이 왕실에서 평생 형의 스페어(Spare, 여분) 취급을 당했다는 설움을 토로했다. 해리의 연이은 폭로로 왕실 형제간의 불화는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이 사건 이후 '영연방의 날' 기념식에서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윌리엄과 해리 형제 부부가 서로를 본체만체 냉담하게 대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현재 영국 사회에서는 해리 부부가 왕실 이야기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고 있다며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다.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 사후 찰스 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불륜 이미지가 남긴 후폭풍과, 미디어에서 드러난 짜증스럽고 예민한 모습 등이 연이어 도마에 오르며 영국인들에게 더 이상 어머니 때와 같은 존경과 사랑은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찰스 3세와 왕세자비 케이트가 연이어 건강 이상설에 휘말리면서 영국 왕실은 또다른 위기에 직면해있다.
 
"왕실과 시민들간의 소통은 필수적입니다. 제가 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요."

영국 왕실의 마지막 전성기를 상징하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다이애나가 왕세자비 시절에 남긴 어록이다.

한때 유럽 최고의 왕실로 불리우며 영국 사회의 구심점이었던 영국 왕실은 오늘날 시대에 뒤쳐졌다는 비판과 함께 거듭된 이미지 추락으로 존폐의 기로에 몰려있다. 지금의 영국 왕실이 놓치고 있는 것, 그들이 더 이상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다이애나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벌거벗은세계사 영국왕실 찰스3세 다이애나왕세자비 엘리자베스2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