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해피엔드>,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은 박범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작 <은교>를 선보이면서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 김고은을 주인공 은교 역에 캐스팅했다. 모두가 무리한 캐스팅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어벤져스>와 같은 날 개봉한 <은교>는 134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겼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김고은은 무려 9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며 '영화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2016년에는 <올드보이>와 <박쥐>로 칸 영화제에서 두 번이나 트로피를 받은 박찬욱 감독이 신작 <아가씨>에서 상업영화 경력이 전무했던 신인 김태리를 투톱 주인공 중 한 명인 남숙희 역에 캐스팅했다. 두 명의 여성배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영화에서 상업영화 경력이 전무한 신인을 캐스팅하는 건 무모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김태리 역시 기대 이상의 연기로 현존하는 모든 신인상을 쓸어 담으며 '충무로의 샛별'로 등극했다.

김고은과 김태리 외에도 <마녀> 시리즈의 김다미와 신시아, <버닝>의 전종서 등 상업영화 데뷔작에서 파격적으로 주인공에 캐스팅돼 기대 이상의 연기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배우들이 등장하곤 한다. 지난 2014년에도 김대우 감독의 격정멜로 영화에서 상업영화 경력이 전혀 없었던 신인배우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더 글로리>의 박연진으로 유명한 임지연을 배출한 영화 <인간중독>이었다.
 
 <인간중독>은 상업영화 출연이 전무한 신인배우 임지연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인간중독>은 상업영화 출연이 전무한 신인배우 임지연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파격적으로 데뷔해 꾸준히 성장한 배우

1990년 서울에서 태어난 임지연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다양한 문화예술무대를 경험하며 성장했고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입학하면서 전문적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한예종 재학시절부터 여러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연기경험을 쌓은 임지연은 2013년 오디션을 통해 김대우 감독의 신작 <인간중독>에서 주인공 종가흔 역에 캐스팅되며 상업영화에 데뷔했다.

장편 데뷔작이자 첫 상업영화에서 '불륜'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에 출연한 임지연은 순수해 보이면서도 속내를 감춘 듯한 오묘한 표정과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하며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물론 <인간중독>은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면서 전국 144만 관객으로 아주 좋은 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임지연은 <인간중독>을 통해 대종상을 비롯해 3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예사롭지 않은 신인이 등장했음을 알렸다.

2015년 민규동 감독의 <간신>에 출연한 임지연은 같은 해 드라마 <상류사회>에서 긍정적이고 밝은 캐릭터를 잘 소화하며 매체연기에 입성했다. 2016년 드라마 <대박>에서 임금을 죽이기 위해 길러진 여인 김담서를 연기한 임지연은 같은 해 첫 드라마 주연작 <불어라 미풍아>를 26%의 높은 시청률로 이끌었다(닐슨 코리아 시청률 기준). 영화 <럭키>에서는 반전의 키를 쥐고 있는 송은주 역을 맡아 697만 관객 동원에 기여했다.

<럭키> 이후 약 2년의 공백이 있었던 임지연은 2019년 드라마 <웰컴2라이프>와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에 출연했고 2021년에는 영화 <유체이탈자>에서 국가정보요원을 연기했다. 그리고 2022년 OTT로 활동범위를 넓힌 임지연은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장미맨션>과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 이어 <더 글로리>에서 '희대의 악녀' 박연진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 글로리>로 극찬을 받으며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조연상을 수상한 임지연은 작년 6월 <마당이 있는 집>을 통해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는 임산부 추상은 역을 맡아 또 한 번 시청자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 특히 남편의 죽음으로 참고인 조사를 받은 후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는 장면은 드라마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작년 드라마 <국민사형투표>를 마친 임지연은 올해 영화 <리볼버>와 jtbc드라마 <옥씨부인전>에 출연할 예정이다.

김은숙이 눈여겨 본 배우
 
 <인간중독>에 함께 출연한 조여정(왼쪽)과 임지연은 훗날 <기생충>과 <더글로리>라는 '인생작'을 만났다.
<인간중독>에 함께 출연한 조여정(왼쪽)과 임지연은 훗날 <기생충>과 <더글로리>라는 '인생작'을 만났다.(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정사>,<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등의 각본을 쓰며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날린 김대우 감독은 2006년 <음란서생>과 2010년 <방자전>을 연출했다. 김대우 감독은 연출 데뷔작이었던 <음란서생>이 257만, <방자전>이 303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감각을 인정 받았다. 따라서 김대우 감독이 송승헌과 조여정, 그리고 신인 임지연을 캐스팅해 만든 <인간중독> 역시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다.

2014년 5월에 개봉한 <인간중독>은 개봉 첫 주 <고질라>를 제치고 흥행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 2주 동안 할리우드 기대작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와 <엣지 오브 투모로우>, 한국영화 <끝까지 간다>가 개봉하면서 스크린수가 급격히 줄었다. 손익분기점은 넘겼지만 김대우 감독이 <음란서생>과 <방자전>을 통해 '이야기꾼'으로서 검증된 감독이었음을 고려하면 <인간중독>의 흥행성적은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중독>은 월남전 영웅인 김진평 대령(송승헌 분)과 출세지향적인 경우진 대위(온주완 분)의 화교출신 아내 종가흔(임지연 분)이 서로에게 중독되듯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정작 김대우 감독의 장기인 스토리가 너무 평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절제된 감정묘사를 보여준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 내용이 지나치게 과감(?)해 진다는 점도 관객들에게 지적 받은 부분.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지만 임지연에게 <인간중독>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실제로 <더 글로리> 김은숙 작가는 임지연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조여정이 '연기'로 인정 받은 작품
 
 온주완은 <인간중독>에서 악역인 듯 악역 아닌 악역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온주완은 <인간중독>에서 악역인 듯 악역 아닌 악역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주)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인간중독>에서 조여정이 연기한 이숙진은 김진평 대령의 아내이자 군장성의 딸로 장교의 가족들이 사는 관사 안에서 실세 노릇을 하면서 남편을 장군으로 진급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남편의 진급이 결정되고 자신의 임신을 발표하던 기쁜 날, 남편이 사람들 앞에서 부하의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모든 게 풍비박산 난다. 조여정은 <인간중독>을 통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을 비롯해 3개 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온주완이 연기한 경우진 대위는 동료들이 생사를 넘나들던 베트남 전쟁에서도 소위 '꽃보직'을 돌아 다녔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출세를 위해 부대의 실세 김진평 대령에게 잘 보이려 한다. 경우진 대위는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경우진 대위는 어린 시절 가흔을 겁탈해 자신의 아내로 만들었고 출세를 위해 누구에게나 굽실거리는 기회주의자이자 영화 속 '보이지 않는 빌런'이다. 

최근 <파묘>를 통해 커리어 4번째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된 유해진은 <인간중독>에서 김진평 대령과 친분이 있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던 관사 내 음악감상실의 임사장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임사장은 음악감상실에서 관사 내 장교 부인들을 불러 사교댄스를 가르치다가 헌병대에게 잡히지만 김진평 대령 덕분에 무사히 풀려났다.  이후 임사장은 김진평 대령에게 왈츠를 가르치고 고민상담을 해주며 김대령과 종가흔의 '불륜'을 조용히 도왔다.

개성 있는 목소리의 소유자이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의 동생 엄태구는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 <인간중독>에서 헌병대의 김준위를 연기했다. 군대에서 준위는 군대 내 인텔리 기술직 공무원으로 장교급 대우를 받는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부사관이기 때문에 장교들과는 서로 예의를 갖추는데 <인간중독>에서는 김준위가 김진평 대령에게 비꼬는 말을 했다가 김대령이 정색하자 긴장하며 각을 잡는 장면이 나온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인간중독 김대우감독 임지연 조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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