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감독이 누구일까. 한국인이라면 봉준호를, 이란 영화를 아끼는 이는 자파르 파나히를, 태국 사람들은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삼 년을 두고 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감독은 역시 하마구치 류스케라 할 밖에 없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영화 깨나 보았다는 이들조차 그 이름을 알지 못했던 하마구치 류스케다. 그러나 2021년 발표한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가히 전 세계 평단을 휩쓸며 또 한 명의 거장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전작 <아사코>와 <해피 아워>는 그에 대한 평가가 틀리지 않음을 확인시켜주었고, 이후 나온 <우연과 상상>은 평단과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며 그의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로 이어지는 일본 영화의 전설 가운데 또 하나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새 시대 작가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려온 팬들을 흥분케 했다. 특히 기술이나 상업성에선 한국영화에 미치지 못하지만 시대와 상호작용하는 의미 깊은 작품에 있어서는 일본영화가 무시 못 할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끔 했다. 역시 창작이란 그 시대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주목받는 거장의 신작, 이번엔 무얼 말할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최대 화제작이기도 했을 만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새로이 천착하는 주제가 무엇일지 가늠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또 한 편의 걸작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서 많은 이들이 영화와 만났다. 대체로 평은 기대엔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임영웅 콘서트나 FC서울 시즌티켓처럼 순식간에 매진된 티켓 탓으로 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올 3월말 정식개봉을 학수고대한 이들이 수두룩 했던 것이다.
 
두 남자가 산 깊은 곳에서 물을 긷고 있다. 수십 년 전 우리네 아버지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10리터 들이 말통 여러 개를 가지고 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약수터에서 받는 것도 아니다. 개울에서 흐르는 물을 바가지로 퍼 말통에 옮겨 담는다. 그렇게 담은 물을 양손에 지고서 한참 걸어 세워둔 차까지 옮겨온다. 그렇게 옮기는 과정에 무슨 와사비 풀이었던가. 독특한 향취를 지닌 풀을 보고는 맛을 보라 하는 것이다. 한 사내가 그걸 따 가만히 씹고는, "음- 맛있네요" 하고 말한다.
 
답한 이는 요리사, 마을에 작은 가게를 내고 우동가게를 한다. 역시 음식은, 또 우동은 물맛이라나. 맑은 물에 반하여 이 마을로 들어온 지 어언 몇 년이 지났다. 부부가 함께 우동가게를 운영하며 요리를 하고 팔고 먹고 산다.
 
그렇다면 와사비 풀을 보고 맛을 보라고 했던 이는?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픈, 그에 앞서 증명하고 싶은 걸출한 감독은 특색 없는 시골 사내처럼 보이는 타쿠미를 내세워서 제 이야기를 관객 앞에 풀어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마을 한정 심부름꾼과 글램핑장 공사
 
타쿠미는 몇 년 전 아내를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홀애비다. 여성인 경우 싱글맘이라고들 하니 싱글파파가 더 적합한 표현이려나. 무튼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키우며 산다. 직업이랄까, 그런 건 딱히 없는 모양. 그러나 종일 무언가 할 일이 있는 듯 분주하다. 이를테면 우동가게 주인과 함께 맑은 물을 길어다 주는 것 같은 일 말이다. 스스로 마을의 심부름꾼이라고 자처하는 타쿠미다. 과묵하고 성실하며 다정한 그를 마을사람 모두가 좋아한다.
 
타쿠미가 사는 마을 하라사와엔 최근 들어 번잡한 일이 하나 생긴 모양이다. 도쿄에 있는 업체 플레이모드가 하라사와에 있는 부지를 글램핑 적합지로 선정해 사들이며 개발에 나서려 한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을 모아 설명회를 하고 곧 첫 삽을 뜰 일정까지 잡았는데,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딱히 좋지만은 않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특색이랄까. 그의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난 영화를 꼽자면 역시 <해피 아워>일 테다. 무려 328분, 5시간 28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 동안 독특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흥미롭다며 과연 거장의 작품답다고 하고, 누구는 지루해 코를 골며 자며, 또 누구는 쓸데없이 시간만 늘린 영화가 아니냐고 혹평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이 영화엔 꼭 그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나 영화 속에선 마을회관 수업이라거나 시 낭송회가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독특한 설정이 쓰이는데, 마침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얼마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풀타임 설명회의 긴장감
 
플레이모드는 하라사와에 두 직원을 내려 보내 설명회를 진행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준비한 영상을 보이고, 주민들의 질문을 받아 답을 내놓는다. 단연 이슈가 된 건 정화조의 위치와 규격, 정원보다 몇 적은 50인 규격 정화조를 설치해 일부 오물이 내로 흘러나갈 수 있다는 건 주민들에겐 심각한 문제다. 근무자 수도 적고 야간근무자도 없어 대도시에서 온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불을 피울 우려도 제기된다. 정부의 코로나 지원금을 타내고자 불필요한 신사업을 벌이는 게 아니냐는 비판은 제법 설득력이 있는 모양, 면전에서 그 소리를 들은 직원들의 난감한 표정이 볼 만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얼핏 극적 요소가 적어보이는 설명회를 또 다시 길쭉하게 잡아내며 관객 앞에 내보인다. 물론 <해피 아워> 만큼은 아니고 제법 날이 선 대화가 오가는 것이어서 관객들이 제법 긴장감을 갖고 지켜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가 아닌 다른 이의 영화라면 설명회를 달리 담아낼 것이다. 즉, 하마구치 류스케보다는 더 개입하여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잘라내었을 테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뜬 여백과 그 모두가 이루는 분위기가 이 영화에 필요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로부터 영화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를 향하여 전진한다. 지역의 평화로운 삶, 자연과 공존하는 일상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던 도시의 기업을 비춘다. 그곳에선 역시 코로나19 관련 지원금을 노리고 사업을 진행하는 사장과 컨설턴트가 있다. 책임 있는 이가 오지 않아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두 직원의 목소리는 사장과 컨설턴트 앞에 묵살될 뿐이다. 어찌됐던 글램핑장은 만들어질 것이고, 설명회는 지자체에 보이기 위한 요식행위다. 주민들의 진심과 그들이 조금이나마 움직여낸 마음은 어떠한 차이도 빚어내지 못하는 듯 보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행이 존재할 뿐
 
그러나 변화는 아무렇지 않게 찾아온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변화에 주목한다. 그 안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가는 마음들이 있다. 오로지 진실한 마음만이 개인과 개인 사이를 건너 변화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순박한 생각이 고개를 치켜든다. 악이 아닌 무관심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자세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진심을 다해야 할 때 진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 그런 것이 정말 나쁜 것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마저 진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저 악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닐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성실하지 않은 자세로 남 탓하길 좋아하는 평범한 개인을 불편하게 한다. 뉴스 속 세상 흔한 부조리를 그저 악의 탓이라고 손가락질 하려는 우리를 반성하게 한다. 어쩌면 악을 사냥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선을 세우는 일, 즉 진심이며 성의며 온갖 아름다운 덕을 기르는 일일지 모르겠다. 미덕을 기르지 못하여 쉬이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을 반성한다. 그 가운데 내가 없었다 할 수 없어 나는 그것 또한 민망하게 느낀다.
 
정말이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악행 하는 못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더 진심을 다하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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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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