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에 친구가 준 카세트테이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직접 녹음해서 우정의 선물로 준 테이프에서 기타 반주와 함께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 읊조린 가사가 생경했고 내가 알던 대중가요와 달랐다. 이연실의 '목로주점'이나 남궁옥분의 '꿈을 먹는 젊은이', 옥슨80의 '그대 떠난 이밤에' 같은 당시 인기를 끈 노래와 너무 달랐다. 당시 가요계의 절대 강자 조용필과도 결을 달리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그가 김민기이고 그 노래가 '작은 연못'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1991년 2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백수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아버지 퇴직 후 부모님이 이사한 경기도 촌구석으로 내려갔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부모님의 작은 농사를 거들고 아침저녁으로 개와 시골길을 걸었다. 백수인 꼴을 보이기 싫어서 학교 도서관을 마다했기에 이런저런 정보를 듣고 술이라도 먹으려고 가끔 상경했다. 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사건의 여파가 컸다. 4월말부터 5월까지 강경대의 죽음을 항의하는 분신이 이어져 모두 8명이 불에 타서 죽었다. 대단한 운동권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학생이 백수가 되니 그 상황이 무력했고, 두려웠다.
분신정국의 와중에 김지하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칼럼을 썼다. 그것도 조선일보에. 그 김지하가 맞나 싶었고,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표변할 수 있는지를 실감한 첫 사례였다.
운동권에서 김지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인물로 알려진 김민기는 1991년 3월 15일에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열었다. 배울 학(學)과 밭 전(田)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정권을 허망하게 군사정권에 내어주고 보통 사람 노태우의 서슬이 퍼렇던 1991년에 그는 극장을 열고 예술인을 불러 모았다.
학전의 꽃 '김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