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하는 이들은 대단하다. 기존에 없던 세상을 창조하여 다른 이에게 그를 전달하니 말이다. 그 수많은 창작자 가운데 특별히 더 대단한 이들이 있다. 그저 없던 무엇을 창조해 그로부터 재미를 주는 것에 그치려 들지 않는 이들, 말하자면 그로부터 변화와 나아짐을 의도하는 이들이다. 작품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창작자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런 창작자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창작을 하는가. 창작에 따르는 대가, 즉 돈과 명성이 전부인 것일까. 세상의 탁월한 창작자들을 지켜보다보면 결코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는 것 같다. 돈과 명성에 개의치 않고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창작자들에겐 대체 어떤 남다름이 있는 것일까.
 
멋진 작품에 매료되고, 그로부터 단 1mm라도 움직여 본 사람이라면 창작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힘, 또 위대한 창작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궁금증을 느낄 밖에 없을 것이다. 아주 드물게 그에 대한 작품이 만들어지고, 또 그러한 영화가 한국 관객을 찾아오는 날이 있으니 바로 지금이 그런 때라 하겠다.
 
대결! 애니메이션 포스터

▲ 대결! 애니메이션 포스터 ⓒ ㈜블레이드이엔티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영화 한 편에 담다 
 
<대결!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산업을 다룬 작품이 그리 많지만은 않은 가운데, 유독 일본에선 이와 같은 작품이 만들어질 때가 잦으니 그건 흔히 일본에 장인정신이라 하는 것이 흐르고 있는 때문일까. 공항을 중심으로 항공업계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해피 플라이트>와 임업의 가치를 알게 했던 <우드잡>과 같은 작품이 그러했듯, <대결! 애니메이션>은 시장규모로만 2조원이 넘는다고 알려진 애니메이션 산업을 살핀다.
 
흔히 영화를 감독의 예술로 이해하듯, 애니메이션 또한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걸출한 만화가 출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애니메이션 총감독 또한 작품에 미치는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주변에 작품에 쓰이는 수많은 컷을 실제로 그리는 작화가들부터 캐릭터에 목소리를 입히는 성우들, 색과 특수효과, 동작을 담당하는 직원들, 편집과 마케팅 담당자, 작품의 전 부문을 총괄하며 제작을 책임지는 프로듀서까지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첫 TV애니메이션 연출을 맡은 총감독 히토미(요시오카 리호 분)을 주인공으로 삼아 애니메이션 산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들어가는지, 그로부터 그들을 진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그려낸다. 히토미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손꼽히는 회사에 입사하여 7년 만에 첫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잡은 감독이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작품 <사운드백-카나데의 돌>은 자신의 처녀작으로, 아이들이 로봇으로 변신하여 소리를 앗아간 악당으로부터 그 소리를 되찾아오는 과정을 다룬다.
 
대결! 애니메이션 스틸컷

▲ 대결! 애니메이션 스틸컷 ⓒ ㈜블레이드이엔티

 
황금시간대 편성, TV애니메이션 제작기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편성이 황금시간대로 불리는 토요일 오후 5시로 잡혔고, 히트제조기로 불리는 유키시로(에모토 타스쿠 분)가 담당 프로듀서로 붙은 것이다. 모두가 앞길이 탁 트였다며 덕담을 아끼지 않을 법한 바로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알고 보니 유키시로는 함께 일하기 여간 힘든 타입이 아니다. 성격부터가 시니컬하여 좀처럼 친해지기 어렵고, 시종 그와 부딪치다 보니 히토미의 열정도 차츰 시들어가는 모양새다. 방영일자가 다가올수록 문제도 하나둘씩 틀어진다. 포스터 디자인이 늦게 나온다거나 작화 일정이 예상보다 오래 걸린다거나 곳곳에서 수정해야 할 컷이 생긴다거나 하는 식이다.
 
초보 감독이다 보니 모르는 문제도 여럿이다. 색감을 보정하고 특수효과나 연출을 다루는 것이 모두 익숙지 않다. 어느 한 파트의 담당자로 일했을 땐 알지 못했던 다른 영역들을 감독으로 총괄하게 되다보니 신경 쓸 구석이 많은 것이다. 더구나 각 담당자들의 성향도 서로 달라서 어디서는 정확한 용어를 써야 하지만, 또 어디서는 느낌으로 전달해야 할 때도 있다. 그 모두를 재빨리 파악하고 맞춰가는 과정이 히토미에겐 모두 쉽지 않은 과제다.
 
대결! 애니메이션 스틸컷

▲ 대결! 애니메이션 스틸컷 ⓒ ㈜블레이드이엔티

 
천재와 신예가 벌이는 치열한 정면승부
 
더욱 큰 일도 있다. 동시간대 경쟁작이 오우지(나카무라 토모야 분)의 신작 <운명전선 리델라이트>로 결정된 것이다. 오우지는 첫 작품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천재감독이란 평가까지 받아온 연출자다. <운명전선 리델라이트>는 그가 8년 만에 낸 신작으로, 모두가 <사운드백>이 아닌 <리델라이트>가 주인공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오우지는 히토미에게도 남다른 인연이다. 대학교 졸업 뒤 공무원으로 일하던 히토미가 애니메이션 업계로 전직한 데 오우지의 작품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입사 면접에서도 오우지와 같이 사람들에게 닿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답했던 히토미다. 그런 그녀가 롤모델인 오우지와 겨루게 되었다니, 그 사실만으로 히토미는 두근거림을 감출 수 없다.
 
<대결! 애니메이션>은 오우지와 히토미가 동시 방영하는 TV애니메이션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일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선 이처럼 두 작품이 동시에 출발하며 맞서는 것을 두고 흔히 '대결'이라 표현한다고 하는데, 이를 그대로 따와 제목으로 삼았다. 처음엔 상대도 되지 않는 듯 보였던 두 작품이 마침내 대결다운 대결상대로 떠오르는 과정이 몹시 흥미롭다.
 
대결! 애니메이션 스틸컷

▲ 대결! 애니메이션 스틸컷 ⓒ ㈜블레이드이엔티

 
타인의 가슴에 박히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
 
오우지의 재능과 경험 뒤에는 천재라는 세간의 기대에 부담감을 느껴온 평범한 인간이 있다. 모든 걸 쏟아낸 첫 작품 뒤 껍데기만 남았다는 세간의 평이 그는 못내 신경이 쓰인다. 그렇지만 이를 티낼 수도 없는 것, 작가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며 다음 작품을 빚어내는 것이다.
 
그를 동경해온 히토미의 작품과 오우지의 작품이 마침내 첫 방영 뒤 결말까지 내달리는 과정을 영화는 긴박하게 잡아낸다. 작품 방영 도중 생길 수 있는 수많은 사건, 이를테면 촉박한 일정으로 작품을 수정하기 위해 작화가에게 애걸한다거나, 우스꽝스런 판촉과 홍보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프로듀서와 갈등을 빚는다거나, 해피엔딩으로 끝내야 한다는 방송국의 요구와 맞닥뜨린다거나 하는 일이 하나씩 빚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관객을 애니메이션 업계의 민낯으로 한층 가까이 다가서도록 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다른 이의 가슴에 남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이는 것, 그로써 창작하는 이와 창작을 돕는 이, 즉 애니메이션 업계 모든 관계자의 수고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가슴에 박히는 작품의 가치와 그 작품이 일으킬 수 있는 가히 기적적인 변화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 영화를 가만히 보자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몹시 부러워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제 역할을 다 해낸 것이 아닌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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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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