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접몽> 스틸컷

영화 <접몽>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1.
<접몽>
한국 / 2022 / 25분
감독 : 유진목
출연 : 김신록, 전석찬, 김은미 

모든 영화가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관객의 이해를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시간선을 옮겨다니기도 하고 그저 모호한 채로 두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 이해를 벗어나는 영화도 있다.) 시간의 길이도 마찬가지다. 러닝 타임 위에서는 1시간이나 되는 시간이 극 중에서는 1분 남짓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그 반대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시간은 감독의 생각대로 놓아줄 수도 붙잡아 둘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영화 <접몽>에도 그렇게 붙들린 시간이 있다고 믿는다.

영화 속 경주(김신록 분)는 5년 차 부부이자 시나리오 작가다.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허밍을 하며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뿐이다. 남편 민재(전석찬 분)와 함께 먹을 반찬을 사며 단돈 2만 원을 쓰는 일에도 온갖 핀잔을 들어가며 조금이라도 더 싼 가게를 찾는다. 고정된 화면과 흔들리는 화면 사이에 그녀가 놓여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현실의 삶이라 생각한다. 공모전에 제출한 시나리오는 또 한 번 퇴짜를 맞는다.

학원 강사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수입이 있는 민재와 그런 경주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놓이리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민재가 강요하지 않았더라도 5년이라는 시간은 경주 스스로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충분하다. 경주가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실 바닥에 머리를 털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접시가 남편에 의해 깨진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갖는 일뿐이다. 그마저도 자신이 아니라며 되려 항변하는 그의 태도 앞에 뭉개져버린다. 두 사람 사이의 권력 구조는 말다툼이 일어나던 날 밤, 일어서 있는 민재가 경주를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영화적으로 그렇다.

영화는 모두 세 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 경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화자를 경주로 놓는다면, 이는 분명 그녀가 살아오면서 혹은 어느 한 대상의 기억으로부터 떠올리게 될 가장 선명한 기억에 가까울 것이다. 이야기의 세 번째 구간,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화장실 신은 그래서 중요하다. 갑자기 등장한 여자(김은미 분)와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 경주의 상상 혹은 무의식이 직전까지의 20여 분 모두를 품는다. 아니 붙든다.

이전 두 구간에 등장하는 민재의 존재와 세 번째 구간 마지막의 민재가 같은 인물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는 동안을 모두 붙들지 못한다. 어떤 것들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남게 되는 것들.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을 위한 이야기다. 경주의 마지막 모습에 마음이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시간 속에 놓인 자신의 모습과 그 시절의 태도, 닿지 않는 목표에 대한 서글픔. 현재는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글썽거리는 두 눈망울이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 자신이 놓여 있는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잘 알지 못한다.

"글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

유진목 감독은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집 <연애의 책>에는 동명의 시가 하나 수록되어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해당 시의 한 구절, '매일 밤 돌아오지 않는 꿈을 꾼다'의 시각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읽어봐도 그가 말하는 장면과 문장 속에서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의 모습과 뉘앙스가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덧없음을 알지만 쉬이 떠날 수 없는 존재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영화 <악몽> 스틸컷

영화 <악몽>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2.
<악몽>
한국 / 2023 / 19분
감독 : 한승원
출연 : 오지율, 장호준, 박상민 

붉은 밧줄에 양손이 꼭 묶인 채 매달려 괴로워하는 여자가 있다. 서커스단의 천막 안에 갇힌 그녀를 두고 수군거리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괴한 피에로 분장을 한 이들이 등장하고 그 모습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한 소녀가 차가운 이불을 들추고선 잠에서 깨어난다. 8살 유진(오지율 분)은 밤마다 종종 악몽을 꾼다. 다른 날에는 괜찮은데 유독 그 꿈만 꾸고 나면 이불에 실례를 하고, 오빠 유호(장호준 분)는 그런 동생이 이해되지 않는다.

"너가 쫄아 있으면 넌 계속 당하기만 해. 네가 전사라고 생각해!"

오빠의 조언대로 유진은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나름대로의 저항을 해보지만 그 용기가 단번에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다시 또 축축한 이불의 현실 위로 되돌아오고 마는 날들의 반복. 힘겨운 꿈의 밤과 차가운 현실의 아침을 오가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눈치를 봐야 하고 당장의 노력으로 막아지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엄마에게는 꼭 비밀로 해달라며 오빠에게 신신당부하는 유진. 그 마음이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맴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영화 <악몽>은 한 소녀가 무서운 꿈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담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연출한 한승원 감독 또한 연출의도를 통해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의 악몽 극복기를 서커스 판타지 액션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에 노출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재는 이야기의 외면보다 조금 더 깊숙한 곳에 놓여 있다. 악몽이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어린 유진이 어떤 이유로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지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에 진짜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셈이다.

꿈의 일부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시 꿈 자체가 과학의 대상은 아니지만 외부 자극의 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영화도 유진을 중심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잇는 작업을 시도한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운 가정환경에 놓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친구들의 따돌림과 아내는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가정 폭력을 가해오는 아버지의 존재는 악몽 속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으로 이양된다. 그런 문제들 속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지내온 스스로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처음에 이야기했던 오빠 유호의 조언과 응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무서운 꿈으로부터 벗어나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과 현실의 폭력과 가해로부터 함께 나아가자는 위로. 꿈이 현실을 반영하듯, 악몽을 이겨내는 힘을 갖게 되는 순간 현실의 어려움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직접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유호의 존재가 있어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진이 꿈속의 괴물을 모두 물리친 다음 날 아침, 초반부 내내 시리도록 차갑게 푸른빛을 유지하던 오누이의 방 안은 창밖으로 비치는 따뜻한 햇살로 처음 가득 채워진다. 엄마와 오빠가 있는 작지만 아늑한 현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현실 속 작은 성취가 유진의 미래를 따듯하게 품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함께이기에 우리는 나아갈 힘을 얻고, 그 길 위에서 또 한 뼘 성장한다. 이 영화가 작고 불안정했던 아이를 내일로 무사히 데려다 주었듯이.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큐레이션인 '인생은 편집이다'는 2월 15일부터 2월 29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악몽 접몽 인생은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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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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