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인다고 다 믿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이는 쉽게 믿는 점을 이용하여 진실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기대와 믿음을 이용하여 속임수를 써서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을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 '기적의 심령술사'로 불리며 전세계를 놀라게 한 필리핀 남자가 있었다. 맨손으로 암덩어리를 꺼내 환자를 치료했다는 놀라운 소식에 전세계에서 한 가닥 희망을 품은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 기적에는 또다른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낸 것은 바로 한국의 한 시사프로그램 취재진이었다.
 
2월 8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미스터리 심령술사 준 라보' 편을 통하여 한 심령술사의 기상천외한 사기행각과 거짓에 현혹되기 쉬운 인간의 심리를 조명했다.
 
때는 1992년 필리핀, 한국인 응급 환자 한 명이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한다. 해외여행도 아직 드물었던 시절, 당시 필리핀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한국인 사망자가 연이어 속출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한국인들의 사망 원인이 모두 병사였고, 필리핀에 오기전에 이미 중병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은 왜 필리핀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국내에 보도된 한 유명 여성잡지 기사에서 비롯됐다. 기사에는 암 환자였던 유명 여가수가 한 필리핀 심령술사의 시술을 받아 병을 완치했다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있었다. 또한 기사와 함께 수록된 사진에는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한자와 핏덩어리를 들고 서 있는 심령술사의 얼굴이 공개됐다.

이 심령술사의 이름은 준 라보. 그는 영혼으로 암을 포함한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도구없이 오직 두 손만으로 단 30초 만에 맨손을 몸속에 넣어 암 덩어리를 빼낼수 있다고 소개했다. 준 라보의 시술을 받아 완치했다는 환자들의 증언들도 이어졌다. 현대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내용에, 생을 되찾고 싶은 많은 한국인 환자들이 한 가닥 희망을 꿈꾸며 필리핀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준 라보의 기적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SBS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었다. 당시 SBS는 1991년 12월 갓 개국한지 얼마안된 상태였고 <그알> 역시 초창기라,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하여 강렬하고 자극적인 아이템을 필요로 했다.
 
당시 국내에도 준 라보의 심령치료와 관련된 기사들이 이미 대거 쏟아져나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알> 제작진은 준 라보를 제대로 심층 취재한 내용이 드물고 결론이 모호한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

현지에서 준 라보를 직접 만나 취재한 이들도 의심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상한 점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사망한 한국인 환자들은 모두 준 라보의 시술을 밝고도 끝내 병을 치유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그알> 제작진은 PD와 조연출, 촬영 감독까지 취재팀 3인을 구성하여 필리핀으로 준 라보를 찾아가 직접 기적의 진실을 밝혀보기로 결정했다. 준 라보는 망설임 없이 취재 요청을 수락했다. 준 라보의 명성이 높아지며 그의 치료소에는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숙소까지 원스톱 의료관광 서비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준 라보의 아내 요꼬는 취재진을 맞이하며 "모든 편견을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봐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치료소에는 한국인 외에도 국적, 나이, 인종에 관계없이 수많은 환자들이 모여서 준 라보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작 환자들은 제작진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고 오히려 화를 내며 취재를 막아서기도 했다. 방송을 통하여 준 라보의 이름이 알려지면 더 많은 환자들이 몰려서 자칫 자신들이 치료를 받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만큼 환자들의 준 라보에 대한 믿음은 상상 이상으로 확고했다.
 
취재진들은 반드시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준 라보의 시술을 관찰했다. 치료가 시작되자 준 라보는 시술대에 누운 환자를 앞에 두고 하얀 천을 펼쳐들었다. 그는 흰 천을 통해 환자를 보면 종양이 검은 반점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어 맨손으로 소독이나 마취도 없이 환자의 복부를 만지자 곧바로 피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잠시후 준 라보의 손에는 의문의 덩어리가 들려있었다. 준 라보는 이것이 환자의 몸에서 꺼낸 암덩어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환자는 치료를 받을때까지 상처도 통증도 없는 무통의 시술이었다. 이런 식으로 필리핀에서 준 라보의 시술을 받은 환자는 수십명이 넘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취재진들은 준 라보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니냐고 대놓고 질문했다. 이에 준 라보는 "마음대로 생각하라. 나는 한국에 가지도 않고 필리핀에 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라고 여유만만하게 답변했다.
 
현대 의학으로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환자들은 마지막 희망으로 준 라보에게 몰려들었다. 또한 준 라보는 환자들은 물론 동행한 보호자들에게도 병이 있다며 치료를 권했다.
 
준 라보의 치료소에서 환자 치료비와 숙박비는 1일 20만 원에 이르렀다. 당시 대기업 초봉 월급이 60만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준 라보의 시술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고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달 까지 소요됐다. 매주 100명 이상의 외국인 환자를 치료한 준 라보의 월 2천만 원 이상의 수입을 벌여들었다.
 
명성이 점점 높아진 준 라보는 정치계까지 진출하여 1988년과 1992년, 바기오의 시장 선거에 연이어 당선되기도 했다. 현지 주민들도 준 라보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준 라보에게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환자들은 준 라보에게 시술을 받고도 병이 낫지 않았다고 폭로하며 의구심을 제기했다. 하지만 준 라보의 부인 요꼬는 "필요한 건 낫는다는 확신과 준 라보에 대한 완전한 신뢰다. 준 라보의 능력은 30%, 나머지는 환자의 신념에 달려있다"라고 환자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렸다. 절박한 환자들로서는 대놓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그렇다고 섣불리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알> 취재팀은 4일이 지나도록 시술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해 고민에 빠졌다. 필리핀 현지의 심령술사들에게 준 라보에 대해 문의했지만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애매한 답만 돌아왔다. 준 라보의 높은 명성 때문인지 누구도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제작진에게 결정적인 제보 하나가 전해진다. 필리핀 현지의 목회자들이 "필리핀 사람들은 아파도 준 라보에 가지 않는다. 외국인들만 그를 믿는다. 한국인들에게 믿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폭로한 것. 또한 제보자들은 준 라보의 조수에게 직접 들었다며 새벽마다 도축장에서 동물의 피와 내장을 구입하여 치료소로 반입하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도 전했다.
 
이에 제작진은 그동안 준 라보의 시술 장면을 촬영해온 영상들을 다시 꼼꼼히 확인했다. 테이프를 돌려보고 또 돌려보다가 문득 수상한 장면을 포착했다. 준 라보가 시술할 때 왼손 동작이 매번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준 라보가 늘 흰 천을 쥐고 시술을 시작하여 치료가 끝나면 다시 흰 천을 쥐는 패턴도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작진은 마지막 수단으로 직접 준 라보의 시술을 받아보기로 했다. 이미 한국에서 건강 검진까지 마친 건강한 조연출이 직접 시술대에 오르기도 했다. 자신만만한 준 라보는 제작진의 요청을 수락했고, 조연출의 기관지와 신장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시술을 시작했다.
 
시술 도중 조연출이 일부러 카메라 방향으로 슬쩍 몸을 돌렸다, 촬영감독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바짝 접근했다. 특히 카메라가 주목한 것은 준 라보의 왼손이었다. 촬영팀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준 라보는 당황하며 화를 냈다. 제작진은 실수라며 상황을 적당히 수습했다. 촬영감독은 담당피디에게 은밀하게 "무언가 찍은 것 같다"며 확신에 찬 소식을 전했다.
 
촬영된 영상을 통하여 마침내 준 라보를 둘러싼 '기적의 미스터리'가 밝혀졌다. 준 라보는 시술이 시작되면 흰 천을 드는 척하면서 왼손에 또다른 무언가를 함께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들이 제보했던 동물의 피가 담긴 내장 덩어리였다. 준 라보는 이를 손에 쥐고 있다가 시술이 시작되면 환자의 몸 위에서 터뜨렸고, 손끝으로 마치 몸안에서 암덩어리를 꺼내는 척 연기를 했던 것이다.
 
비로소 확실한 증거를 잡아낸 제작진은 조연출의 속옷에 묻힌 피와 다른 환자의 도움으로 그의 몸에서 꺼냈다는 담석까지 확보했다. 준 라보는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났다는 사실을 취재진이 철수할 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제작진은 혈액과 담석 분석을 의뢰한 취재진. 혈액은 인체 유전자 반응 없는 동물의 피였고 담석은 그냥 평범한 돌로 밝혀졌다.
 
준 라보의 진짜 정체도 밝혀졌다. 알고보니 그는 이름이 알려지기 오래 전에 이미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준 라보는 한국의 고급 사우나에서 가짜 시술을 선보이며 화제가 됐다. 자신의 속임수가 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준 라보는 이후 브로커까지 연결하여 심령치료를 여행상품으로 선전하며 자신만의 가짜 신화를 만들어낸 전형적인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리고 수년간 이어져온 준 라보의 사기행각을 처음으로 밝혀낸 것이 <그알>이었다. 준 라보는 속임수가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방송사와 제작진에 허위 사실 유포를 중단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
 
다만 풀리지않은 미스터리가 아직 하나 남아있었다. 준 라보의 치료를 받고 실제로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환자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준 라보에게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는 환자들을 확인했다. 그러나 암을 완치했다는 유명한 가수는 애초에 암에 걸렸었는지 불분명했고, 또 다른 연예계 관계자는 약물 치료로도 충분히 완치가 가능한 암이라었다는 게 밝혀졌다.
 
다른 외국인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핀 바기오의 자연적인 환경과 자연식 위주의 식사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상태가 호전되던 타이밍이 겹쳐, 환자들이 '준 라보 덕분에 치유되었다'는 착각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제작진이 추정한 결론이었다.
 
방송이 공개된 이후 준 라보의 거짓이 만천하에 폭로되었고, 당시 국내 시사 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해외까지 직접 취재를 통하여 진실을 밝혀낸 <그알>의 명성은 높아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방송 이후로도 준 라보를 찾아간 한국인 환자들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초능력이나 기적같은 '미지의 힘'을 막연히 동경하던 것이 1990년대의 정서였기 때문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기꾼으로 밝혀진 유리 겔라같은 초능력자들이 방송을 타며 큰 화제를 모았고, 정부 차원에서 초능력을 연구하고 특수부대 운용까지 고려하던 시대였다. 어쩌면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믿기지 않는 신비로운 현상에 매력을 느끼는 인간의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준 라보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방송이 나간 후 6년뒤인 1998년 9월 준 라보는 이번엔 러시아로 옮겨가 거짓 시술을 거듭하다가 사기 의료 행위로 적발되어 경찰에 체포했다. 러시아 경찰은 준 라보의 수술실을 급습했고 수술실 냉장고에서 소의 피와 내장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준 라보는 현재도 생존하여 90세를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으로 인하여 건강이 좋지않은 상태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준 라보의 근황이공개된 영상에서, 병석에 누운 준 라보에게 일본인 제자가 그에게 배웠다는 그대로 기 치료를 행하는 모습은 어딘가 웃픈 아이러니를 자아냈다.
 
'직접 보면 안 믿을 수 없다'준 라보의 아내 요꼬나 준 라보의 시술을 받았다는 환자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하지만 때로 진실이란 '보인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는 교훈을 전해준다. 우리 마음이 약할 때 나타나는 빛과 기적이란, 그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명한 판단과 상식적인 선택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꼬꼬무 준라보 그것이알고싶다 초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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