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후 자파르 파나히라는 감독은 적어도 예술영화 작가주의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투옥과 가택연금을 통해 이란이라는 나라가 신정체제 아래에서 사회 전체가 통제되고 있으며 문화예술 전반을 검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우는 산증인으로 기능한다. 20년 간 영화 창작과 해외 출국이 금지된 상태에서 그는 사회적 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이란에서 머무는 중이다. 아니 절해고도에 유배된 상태라 봐도 무방할 테다. 대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란 영화하면 떠오르는 상징,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길이 아니면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길이다.
 
전자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이란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본인의 활동 및 주변 작가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그 지점에만 절대 국한되지 않는데도) 유독 사람들이 기억하는 어떤 이미지, 서구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순박함과 천진함, 그리고 어떤 믿음과 의지에 이르는 잃어버린 목가적 풍경을 그려냈지만 키아로스타미 역시 점점 고뇌에 처했고 말년에는 이란 바깥에서 작업하는 것을 택해야 했다. 
 
반면에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전 가족이 함께 국외망명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망명자의 자세를 취하며 이란 외부에서 끈질기게 창작을 이어가는 중이다. 마흐말바프 패밀리는 세계 최고의 영화인 가족 중 하나로 온 식구가 함께 공동창작을 함은 물론,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기록하는 유의미한 작업을 축적하는 중이다. 그 외에도 이란 영화의 거장 급 얼굴이라 할 몇몇 감독들이 택한 방향과 그들이 점유한 고유의 위상은 그들의 영화와 결합되어 흥미로운 지형도를 형성하는 중이다. 해당 감독들이 겪는 고충이 그 반대급부로 이런 극적인 상황을 창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공식적으로 이란 정부는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 제작을 금지시켰다. 그는 여전히 감시받고 있고, 가택연금에서 아주 조금 자유로워졌다 해도, 국내 이동은 가능하지만 해외 출국은 여전히 허락받지 못한 상태다(그 덕분에 세계 3대 영화제 시상식에서 늘 대리수상 신세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독의 이름이 새겨진 여러 편의 영화를 2010년 이후 꾸준히 확인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그의 이름이 타이틀에 들어갈 수 없는 조건인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괴이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원래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의 신작이 또다시 우리 앞에 도착했다.
 
깊어가는 국경의 밤, 감독의 실존적 고뇌가 보여주는 깊이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튀르키예 국경과 인접한 시골 마을에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머물고 있다. 그는 국경 너머 튀르키예에서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인 자신의 비밀스러운 신작 때문에 테헤란에서 이 먼 외지까지 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촬영현장에서 진두지휘할 순 없다. 얼마 안 되는 거리이긴 해도 국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스카이프 생중계로 촬영현장의 조감독과 소통해가며 영화를 진행시키는 중이다. 하지만 궁벽한 시골마을이라 와이파이는 수시로 끊긴다. 휴대전화 와이파이를 잡아서 생중계하기엔 제약이 너무나 심하다.
 
감독은 궁여지책으로 집주인인 간바르에게 부탁해 사다리를 놓고 올라타 지붕 위에 휴대폰을 놓아보기도 하지만 도무지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체념하는 감독에게 간바르는 마을의 경사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말한다. 감독은 기왕 작업 체크도 안 되는 김에 마을 행사 촬영을 주문한다. 자신도 카메라를 들고 기분전환 겸해서 동네 주민들의 사진을 찍는다. 답답하긴 했지만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머무는 집 할머니와 정담도 나누고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간다.
 
조감독인 레자가 얼마 후 촬영분량이 든 하드디스크를 갖고 국경을 몰래 넘어와 문을 두드린다. 주변 이목을 조심하느라 감독은 차를 몰고 마을 외곽으로 나가서 레자와 합류한다. 촬영현장 상황을 공유하던 중 레자는 감독에게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두지휘할 거면 그냥 국경을 넘어오라고 제안한다. 밀수업자들의 조력도 확보해놨으니 결단만 내리면 된다는 것이다. 세계적 명성이 있기에 망명생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레자의 권유에 감독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국경을 넘는 건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눈 질끈 감고 조금만 걸으면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그런 달콤한 유혹이 눈앞에 펼쳐진 불빛 환한 튀르키예 국경도시 풍경과 겹쳐진다. 하지만 감독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어두컴컴한 국경 마을로 돌아간다.
 
영화 안과 밖이 뒤죽박죽 겹치며 딜레마에 처하는 감독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낯선 이방인인 감독의 행동은 하나하나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SUV 자동차 바퀴에 묻은 흙만 봐도 눈썰미 있는 주민들은 그것이 국경지대 밀수꾼 통로의 흙이란 걸 알아챈다. 간바르는 마을 전체가 위험할 수 있으니 국경 근처로 가지 말라며 충고 겸 경고를 던진다. 게다가 마을 전통의 풍습 관련한 문제가 터지고, 그 불똥은 외지인인 감독에게로 옮겨 붙기 시작한다. 어릴 적에 정혼할 신랑이 양가 부모에 의해 정해진 처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런 둘의 불륜을 감독이 우연히 사진으로 찍었다고 한다. 증인도 있다. 주민들은 그 사진을 내놓으라며 겉으론 정중하지만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정혼한 예비신랑 가족과 마을 장로들은 그 사진을 불륜의 증거로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처녀의 연인은 곧 함께 도피할 계획이니 제발 사진을 넘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양쪽에 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데다 점점 심해지는 마을 주민들의 압박으로 감독은 곤경에 처한다.
 
그런데 주민들 또한 진퇴양난이다. 감독은 외견상 대도시에서 드물게 시골마을에 찾아든 상류층 지식인이다. 촌장을 포함한 유지들은 일을 키우지 말아달라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거듭 던진다. 그들은 사진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맹세'를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거짓말을 해도 비밀만 지키면 나머지는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감독을 설득한다. 어쨌든 영화 촬영을 위해 감독은 마을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다. 한편 예비신랑 역시 다른 각도에서 촌장과 장로들에게 불만이 가득하다. 서로 상이한 경로지만 전통을 뒤흔드는 파열음이 소리 없이 퍼져나간다.
 
한편 촬영현장에서도 사건이 벌어진다. 감독은 이란에서 서방으로 망명을 꾀하는 연인, 박티아르와 자라의 사연을 실제 인물들을 기용해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제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둘이 여권을 구해 출국하는 과정은 계속 꼬이기 시작한다. 두 연인 사이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순탄할 것 같던 망명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촬영과정도 어그러진다. 이중삼중의 곤경이 감독과 감독의 영화에서 동시에 발생하고 구분되어 있던 상황은 점점 혼재되어 간다.
 
정치적 상황에 가려진 작가적 비전과 예술적 실험의 윤곽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노 베어스>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처해 있는 상황과 떼어놓고는 볼 수 없는 영화다. 하지만 그런 영화 외부적 조건에만 기대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작업이다. 누구나 감독이 도저히 불가능한 조건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창작을 수행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 인정 덕분에 감독은 하나의 상징이 됨은 물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거듭 선보인 그의 신작들이 노고에 걸맞은 상찬을 받으며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에서 거듭 수상과 명예를 누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 때문에 예술적 실천에 외부적 잣대가 덧입혀지지 않나 우려도 있다. 시쳇말로 과대포장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이란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감독이 이용당하는 건 아닐까 의구심도 생길법하다. 감독 자신도 그런 입소문을 모를 리 없다. <노 베어스>는 그런 의문부호에 대응하는 감독의 작가로서의 입장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물론 감독은 이미 전작들에서도 물리적 검열과 탄압 때문에 발생하는 제약을 돌파하는 혁신적인 시도를 수차례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제대로 촬영하기 극도로 어려운 차량 내부 장면만으로 구성된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고,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질문하거나 무너뜨리는 도전을 거듭 해나가는 중이다. 적극적으로 기술혁신을 실험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조건 탓에 시도하긴 했지만, 스마트 폰을 전적으로 활용한 결과물로 동 세대 창작자들을 놀라게 하는 등 촬영기법과 테크닉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도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 수고와 시도의 한 첨단으로서 <노 베어스>는 여러 각도로 주목할 지점이 다분하다. 우선 이 영화는 여러 개의 영토로 분할된 채 출발한다.
 
(1) 영화 안 vs 영화 밖
이는 감독의 실제 상황과 영화 속 상황의 대비다.
 
(2) (영화 안 배경) 튀르키예(촬영현장) vs 이란(감독이 체류하는 마을)의 국경선 구분
감독은 결코 이 두 배경을 합치거나 횡단하지 않는다. 감독과 조감독이 장시간 차내에서 국경을 넘는 데 대한 논쟁을 벌이지만 카메라는 결코 둘을 한 번에 담지 않는다. 몸은 함께 앉아 있으나 둘의 상태는 분리되어 있다는 상징적 처리다.
-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군사분계선 한 발자국 넘어서는 게 물리적인 어려움보다는 정치적-역사적 중압감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 감독 역시 그런 무게감을 온전히 직시하고 있다.
 
(3) 튀르키예 촬영현장 in & out
실제 오랜 세월 망명에 실패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배우로 분한다. 자신들의 진행형 상황을 그대로 재연하는 건 언뜻 쉬워 보이지만 영화 외적으로 그들의 현실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그 과정에서 카메라 안과 밖은 서로에게 간섭하기 시작한다.
(4) 이란 국경마을에서도 원래는 감독이 영화제작과정을 지휘하기 위한 물리적 비밀기지에 불과하던 것이 그가 처한 우발적 상황 때문에 혼란스럽게 뒤섞이기 시작한다.
 
기본적인 상황만 해도 이렇게 복합적이다. 심지어 일정 순간부터는 그 복잡한 구도가 교차 및 혼합을 거듭하기 시작한다. 이런 딜레마는 처음에는 그저 와이파이 신호가 안 잡히는 걸로 출발하지만 점점 국경 안과 밖의 물리적 이질감을 통해 분출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들이 차례차례 시간차로 발화되기 시작하니 관객은 상황을 따라가기 위해 꽤나 집중력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다.
 
거듭된 패배에 굴하지 않는 예술가의 각오가 전해지는 영화
 
극중에서 감독이 예상치 못했던 미증유의 혼란은 결국 필연적인 좌절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 또한 간단하지 않다. 이중삼중의 '실패' 혹은 '패배'가 영화 내에서 수립되기 때문이다.
 
(1) 영화 안과 밖에서 동일한 난국을 겪는 주인공 커플
(2) 마을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는 커플
(3) 영화의 완성과 (내심으로) 전통으로 포장된 마을의 낡은 관습에 얽매인 젊은 연인의 도피를 성원하는 감독의 소망
(4) 여기에 추가로 상상하자면 폭력과 유혈 대신에 어떻게든 적당히 평화롭게 사태를 수습 혹은 봉합하길 원하는 마을 주민들의 기대
 
결국 누구 하나 만족할만한 결말이 기다리지 않는다.
 
감독은 숨 쉴 틈을 찾으러 일상적 감시가 도사린 대도시를 떠나 궁벽한 국경마을에 은밀히 잠행했다. 사실 굳이 원격으로 제작현장을 파악하고자 했다면 무선인터넷 환경이 차라리 양호한 테헤란의 자택에서 머무는 게 나은 선택일 테다. 하지만 일종의 반항심 혹은 스스로를 향한 위로를 위해 그는 굳이 모든 게 불편한 시골로 향했다. 하지만 당국의 입장에선 한 발자국 넘어가면 외국이 지척인 시골에 머무는 그의 행보는 의혹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의 행방은 이란 정부에게 포착되고 만다. 혁명수비대의 통제 안에서 감독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과 연장선상에서 어떤 인장을 공유하는 바, 현재 자파르 파나히 영화세계에서 영화 외부적인 검열과 감독이 처한 물리적 제약이 그를 굴종시키지 못했다는 것, 그로 인한 파급효과로 세상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독자적인 작업을 수행하는데 기이한 동력이 되어준다는 점이다.
 
감독은 어떻게든 그에게 가해진 형벌을 돌파해가며 영화를 만들고야 만다. 영화 초반에 그가 접한 마을의 온갖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행위는 그런 불굴의 창작 혼을 상징하는 찰나들이다. 그리고 조감독의 권유에도 국경을 넘지 않고 이란에 남겠다는 의지는 굴하지 않는 예술가의 영혼을 (일정부분은 과시적으로) 증명하는 태도로 손색이 없을 테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사진과 영화의 태도를 자문하는 감독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노 베어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하지만 여기에서 감독은 별도로 흥미로운 입장을 추가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세든 집의 노파부터 마을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촬영한다. 집주인에겐 마을 행사를 찍어오라며 친절하긴 해도 반강제로 밀어붙인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공통된 특징이 포착된다. 상대가 명시적 거부의사를 표명하면 카메라를 거둬들이긴 하지만 촬영 시도 자체에 허락을 구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당연한 권리처럼 찍던 과정이 감독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와 총으로 희생물을 조준하는 행위는 기본 동작과 자세에서 동일할 수밖에 없다.
 
감독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마을에서의 촬영 뿐 아니라 국경 너머 영화 제작현장에서 벌어지는 안팎의 사건들도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절박한 실존적 위기에 처한 주인공 커플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에서도 카메라는 집요하게 그들의 뒤를 따른다. 그들에게 닥치는 결정적 비극의 찰나에 이르러서도 다급하게 카메라는 '컷'을 외칠 뿐, 감독이 마을 주민들을 피사체로 삼던 태도와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의도된 연출이다. 이를 통해 그런 본질적 문제에 대해 본인은 물론 관객들에게도 성찰을 주문하려는 것처럼 다가온다.
 
여기에서 고급 SUV를 타고 도시에서 와 고가의 카메라와 노트북을 사용하는 외부자의 정체성은 감독을 마을 주민들과 분리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막 효과도 발생시킨다. 누구도 그에 대해 뒤로 수군거리거나 험담할지언정 '혁명수비대'의 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내쫓거나 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는 마을 촌장이나 장로들이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내는 몇 순간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그리고 노총각인 예비신랑 vs 민주화 시위에 참가하다 제적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애인과 도피하려는 대학생의 마을 내 대립까지 감안해 보면, 이란 사회 내에서 현재 극심한 도시와 농촌의 격차 문제까지 감독이 착목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테다. 도시 청년과 지식인들은 더 많은 자유를, 시골에선 빈부격차가 더 큰 불만사항인 것을 본국에서 검열을 감내하며 포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일 테다. 그런 복합적인 상황 묘사를 통해 마치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벌이는 저항을 대하는 가난한 민중들의 딜레마 같은 상황이 그려진다.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은 참으로 오묘하게 다가온다.
 
이란 사회를 억압하는 '곰'의 실체를 탐구하는 모험
 
'노 베어스', '곰은 없다',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라도 제목에 대해 곱씹게 될 테다. '곰'이란 과연 무엇일까? 작게는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딱히 합리적 이유랄 것도 없이 그저 이어져 내려오는 인습에 가까운 전통일 테다. 하지만 그런 전통은 이미 무력화되었다는 것을 사실 마을 주민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외부자로서 감독이나 도시물 먹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평생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 없을 장로나 주민들도 그저 전통을 지키는 게 기존 질서에 유리하다고 여길 뿐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다.
 
하지만 정말 곰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곰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질문한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 속에서 모두가 처한 연쇄적인 비극은 영화 바깥에서 두개의 성공으로 치환된다. 불굴의 예술 혼으로 금지된 창작을 이어가며 괄목할만한 결실을 연거푸 선보이는 감독 VS 어떻게든 모순덩어리인 이란이라는 거대국가를 통제하는 신정체제의 대결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란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 한 지극히 미약하게나마 계속 이어질 성격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스스로 선언하듯 망명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동굴에 갇힌 죄수' 신세를 감내하겠다는 감독의 사자후, 그리고 그에 도취되지 않기 위한 뼈를 깎는 성찰이 이 영화 속 매 장면마다 감춰져 있다. 그런 감독의 결기와 긴장을 인식할 때 그저 비극의 전시가 아니라 이를 악물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가 목격한 세계를 담아내려는 감독의 투혼을 체감할 수 있다. <노 베어스>를 예습과 복습 살짝 가미해 관람하고 기억하는 행위는 그저 투쟁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예술가는 어떻게 부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가?'를 전심전력으로 시연하는 어느 작가의 초상을 목격하는 체험이 될 테다.
 
<작품정보>
 
노 베어스 No Bears
2022|이란|드라마
2024.01.10. 개봉|106분|12세 관람가
감독 자파르 파나히
출연 자파르 파나히(감독 역), 나세르 하셰미(촌장 역), 바히드 모바세리(간바르 역),
박티아르 판제이(박티아르 역), 미나 카바니(자라 역)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22 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2022 58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시네마틱 브레이버리상(특별상)-국제경쟁
2022 오슬로남부영화제 최우수 장편상
2022 발라돌리드국제영화제 작품상 후보
2023 전미영화비평가협회 작품상,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후보
2023 트리데스테영화제 최우수 장편상
2023 팜스프링스국제영화제 Bridging the Borders상 후보
자파르파나히 미나카비니 노베어스 이란영화 베니스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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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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