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포스터 이미지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포스터 이미지 ⓒ 찬란

 
영화 감독은 타인에게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지극히 드문 권능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어설프게 휘두른 결과로 비판의 저울 위에 오르내리는 건 감내해야 한다. 대다수 감독이 자기 머릿속에선 생생하게 구현되는 소우주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타이밍이 맞지 않거나 재수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냉정히 말하자면 꿈에 비해 실력이 모자라서이기도 하다. 관객의 시선, 평단의 비평은 창작자로서 예측 불가능한 운명에 속하기에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창작자는 그저 가능한 최선을 다해 소통하고 공명하려 노력할 뿐이다. 그런 도전 끝에 경지를 구축한 소수의 작가들은 '거장'이라 불리곤 한다.
 
해외여행이 이제 어느 정도 준비와 수고만 감수하면 어렵지 않게 된 한국사회 상황에도 여전히 타국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숙제다. 관광객 또는 여행자의 제한된 시선과 현지인이 체감하는 인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현대 시각예술의 표상이라 할 '영화'는 때때로 그런 실제 현실을 초월해 해당되는 대상의 이미지를 상징해버리곤 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뉴욕, 파리, 홍콩의 이미지는 실제 다녀온 이들의 경험보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유튜브 쇼츠에 기반을 둔 경우가 아직도 더 많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에 속한 핀란드란 나라 역시 현실에서 그 땅에 발을 딛기보다는 어떤 이미지들로 각인되는 경우에 속할 테다. 문화 콘텐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입증하는 예시다.
 
한국의 영화관객들에겐 핀란드를 배경으로 촬영된 몇 편의 영화가 그 예시가 될 테다. 아마 대다수가 핀란드 하면 떠올릴 영화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카모메 식당>, 그리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들일 것이다. <카모메 식당>이 핀란드 수도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지만 일본 여행자의 시선으로 한 번 걸러진 버전이라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made in' 핀란드의 질감을 구현하는 작업이다. (절대적 기준은 아닐지언정) 확실히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핀란드 묘사는 안락의자 여행가라면 상상할 핀란드 그 자체에 가까울 테다.
 
자석의 양극처럼 밀어냈다 달라붙으며 점점 연결되는 로맨스의 정석
 
핀란드 하면 떠올릴법한 전형적인 배경 속에서 중년의 여자와 남자가 우연히 마주친다. 이들은 (엔딩 크레디트 포함해서) 80분 분량의 영화 속에서 3번 만나고 1번 엇갈리고 2번 만나고 2번 엇갈리고 3번 만난다. 8번의 만남 중 3번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다. 그런 경과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것 하지만 돌아보면 두 주인공에게 중력처럼 작용한다. 그 만남과 엇갈림의 교차 끝에서 주인공들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맞이한다.
 
'안사'는 대형마트에서 비정규직 점원으로 일하는 중년에 접어든 여성이다. 그는 직장동료와 함께 술집에서 술을 한잔 하던 중 옆자리 남자들과 합석한다. 두 남자 중 과묵하게 술만 마시는 '홀라파'와 안사는 여러 차례 눈이 마주치지만 대화는 나누지 않는다. 며칠 후 안사는 귀갓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술에 곯아떨어진 홀라파를 발견한다. 불량청소년들에게 지갑이 털릴 뻔한 위기를 안사가 다가와준 덕분에 모면하지만 인사불성인 홀라파는 안사의 도움을 알지 못하고, 안사 역시 굳이 더 돌볼 생각은 없는 듯 버스를 타고 가버린다.
 
세 번째 만남에서 둘은 비로소 짧은 대화를 나눈다. 금방 가까워진 둘이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안사가 적어준 전화번호를 골초인 홀라파는 담배를 꺼내다 밤거리에 흘리고 만다. 안사는 연락이 오길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소식이 없다. 한편 홀라파는 안사와 데이트했던 극장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지만 둘은 끝내 엇갈리고 만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연한 재회를 통해 오해를 풀지만 곧이어 시련과 위기가 차례로 둘에게 닥친다. 과연 이 변두리 인생은 재회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날 것 같은 현실의 로맨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 이미지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 이미지 ⓒ 찬란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안나와 홀라파 두 사람의 로맨스 물이다. 아마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전작들을 접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예상치가 꽤 차이가 날 테다. 이 핀란드 작가의 영화세계를 미리 체험한 적 없는 이들이라면 크리스마스와 연말 대비 북유럽 풍의 이국적 멜로영화를 상상하며 관람을 결정할 테다. 분명히 본 작품은 로맨스 물이 맞다. 핀란드의 사회현실과 국제정세가 진하게 묻어난 것을 더한 것뿐이다. 지독히 현실적이라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가 대개 접하는 멜로 장르는 대강 이렇다. 선남선녀 배우가 자기들은 평범하다 못해 덜 떨어졌다며 의기소침하거나 자괴감에 빠진 행세를 하는 그런 부류, 이제는 그런 껍데기도 거추장스럽다며 노골적인 신데렐라 재연, 또는 아예 '상류사회' 그들만의 리그를 대리만족시켜주는 걸로 먹고 떨어져라 하는 데도 현실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서 '허구'라는 걸 알지만 빨려드는 형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아이러니와는 동떨어져 있기에 더 희소성이 있다, 실제 거리에서 우연히 스칠 것 같은 인물들, 그것도 구질구질해 보일 정도로 보잘것없는 이들이 벌이는 로맨스 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접하는 숱한 영화나 드라마 풍경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기에, 이 지극히 현실적인 멜로드라마는 오히려 시선을 잡아끄는 마법을 펼친다. 첫 티타임에서 실업자 신세인 상대를 배려해 빵을 주문하라는 권유와 냉큼 요깃감이 될 빵을 가져오는 장면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지만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풍경이란 점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북유럽 식 유머를 절묘하게 구사하는 감독이다. 무표정하게 툭툭 내뱉지만 '촌철살인'을 구현하는 간결한 위트는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표현할 때 종종 구사하는 '삑사리의 미학'(어이없는 실수나 예외적인 상황으로 웃음이 유발되는 장면을 가리킨다)과 닮은꼴이다. 이번 신작에서도 감독의 그런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는데도 정교하게 배치된 핀란드 식 유머의 위력에 영화를 보는 이들은 금방 함락당하고 말 테다. 과장된 몸 개그나 이러고도 안 웃고 배기겠냐는 식으로 음악과 소품과 온갖 장치를 쏟아 붓는 코미디와는 차별화된 '하이 개그'다. 우리가 간혹 접하며 감탄하던 북유럽 가구나 건축양식의 매력처럼 '미니멀'로 승부하는 '고급진' 유머 코드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관객에게 선보인다.
 
복지국가 핀란드의 현실이 시사하는 흥미로운 디테일
 
그런 유머러스함은 생생하게 구현된 캐릭터와 배경 묘사에서 힘을 얻는다. 안사는 동정심이 많은 인물이다.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물품을 폐기하던 중에도 배고픈 이들이 나눔을 요청하면 기꺼이 응한다. 하지만 그런 안사의 행동을 의심한 경비원과 관리자에 의해 부당해고를 당한다. 차가운 시장경제의 풍경이다.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회적 문제를 강조할 때 간간이 묘사되는 소재이긴 하지만 핀란드와 한국사회 시민-노동자 의식 차이가 흥미로운 장면을 조성한다. 안사는 해고를 당하고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퇴근길에는 동료들의 위로와 (결과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노사 대치가 펼쳐진다. 큰 경계에선 다를 바 없는 결론이지만 적어도 핀란드에선 '꽥' 하고 소리라도 지르는 차이가 괜히 울림이 있다.
 
한편 홀라파는 권태로운 일상을 술로 때우는 육체노동자의 전형성을 띈 유형이다. 그는 일하던 공장에서 노후 장비 때문에 사고를 당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음주근무가 발각되어 해고당하고 만다. 그를 위로하던 동료는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하지만 홀라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은 '금속산업노동조합' 소속이라 건설현장 일용직 일을 하게 되면 별로 도움 될 게 없을 거라 답한다. 안사의 경우와 매한가지로 결과는 우울하지만 한국사회 현실보다는 조금의 차별성은 확연하다. 영화로 보는 핀란드 사회와 노사관계 편으로 영상 클립을 만든다면 제법 흥미로운 토론거리가 될 법하다.
 
두 주인공의 연이은 부당해고는 한국독립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 가능한 장면들이지만 핀란드 사회의 면모를 확인시켜주는 차별점이 한국 관객들에겐 핀란드란 나라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 법하다. 지극히 평범한 개인들, 비정규직이나 일용직 노동으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살면서 자주는 아니라도 드물지 않게 겪을법한 '노동문제'가 이 영화에선 주인공들의 상황을 좌우하는 주요한 요소로 자리한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주요한 배경으로 항상 활용되는 불안정 노동의 세계화가 본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주요하게 구성에 기여한다.
 
안사와 홀라파는 이후 각자의 사정으로 거듭 이직을 겪게 된다. 안사의 경우 불가항력적인 경우에 가까운 반면, 홀라파는 음주문제가 늘 발목을 잡는다. 이 경우 피상적으로 묘사된다면 홀라파 개인의 과실로 그에게 닥치는 해고의 책임이 전가되겠지만, 사실감 넘치는 핀란드의 황량한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기에 일방적으로 노동자 개인에게 도덕적 책임을 단죄하기보단 복합적으로 해당 캐릭터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여지를 충분히 남긴다.
 
복지국가 핀란드라는 장미 빛 환상 대신에 그 나라에도 불어 닥친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 그려진다. 세상에 '유토피아'란 원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제도와 인식의 차이가 느껴지는 연출이다. 그런 극사실적인 표현 덕분에 주인공들이 각자, 함께 겪는 위기는 관객들에게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술영화작가의 선물, 깨알 같은 보물찾기 시간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 이미지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 이미지 ⓒ 찬란

 
핀란드 사회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스윽 끼어드는, '시네필'들에겐 환호를 지를 법한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둘이 두근두근 데이트하는 장소는 동네 변두리 극장이다. 한국영화라면 대형 복합상영관이 배경으로 당연시되겠지만 이 영화 속 극장은 평범한 단관 상영관으로 묘사된다. 이 극장은 안팎으로 최신개봉작 대신 시네마테크에서나 볼법한 클래식한 고전과 컬트영화 포스터로 가득하다. 그리고 둘이 첫 데이트로 선택한 영화는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 (2019)'다. 두 감독의 기이한 인연을 인지하고 있던 이들이라면 그야말로 빵 터질 테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짐 자무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각각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천국보다 낯선>으로 전 세계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각인된 후 꾸준히 활동하며 함께 나이를 먹어온 두 감독이다. 핀란드와 미국, 대서양을 경계로 멀리 떨어져 어떤 연관성도 없이 성장한 두 감독은 신기하게도 활동 초창기부터 비슷한 스타일로 인해 재미난 혼동을 일으키곤 했다. 화면 연출이나 영화 속 정서가 유사하다 보니 두 감독의 작품을 헷갈리거나 바꿔 부르곤 했던 것이다. 전 지구적인 현상이라 감독들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필 그런 동료 감독이 처음으로 도전한 좀비 영화를 자기 영화 속 주요 장치로 택한 건 '노리고 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실제 두 감독이 그런 착시효과를 활용해 서로의 작업에 개그 요소로 종종 써먹는 중이다.) 이를 통해 감독 자신의 '시네필' 개그를 구사하는 것과 함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 연애에 서툴다는 점을 효율적으로 부각한다.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도장처럼 화면에 꾹 새겨 넣으면서도 극중 전개에는 무리수가 되지 않는 연출력이 과연 거장이라 불릴만하단 생각을 자연스럽게 조성한다.
 
'사랑의 힘'으로 전쟁과 빈곤의 현실을 뛰어넘길 소망하는 영화
 
둘은 영화 내내 엇갈리고 반목하고 오해에 휩싸이곤 한다. 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방을 잃지 않고자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고치려 노력하고 자기 삶을 충만히 채우려는 작은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평생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꿈같은 건 없이 무미건조한 나날을 술과 담배에 의존해온 '내일 따윈 몰라' 인생 전형 같던 홀라파는 비로소 만난 인연을 위해 금주를 실천한다. 타인에 대한 애정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게 인도한 셈이다.
 
안사는 자기 역시 어려운 처지이지만 주변의 애처로운 존재들에 연민을 거두지 않는다. 그저 모른 척 스쳐 지나면 될 것을 기어코 돌아보고 만다. 그리고 꼿꼿할 정도로 대쪽 같던 그가 타인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둘의 변화를 포착한다면, 그리고 그런 변화의 결단이 별 것 아닌 듯해도 얼마나 중요한 결기를 요구하는지 이해한다면 '사랑'이 얼마나 큰 용광로처럼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깨닫게 될 테다.
 
여전히 둘이 살아가는 세상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잔혹범죄들로 시끄럽다. 라디오를 켜면 늘 전쟁의 참상이 보도되는 중이다. 로맨스 영화라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일 것이다. 관객도 현실의 비참함에 몸서리치겠지만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그 주박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삶을 이어가기 위한 두 변두리 인생의 도전은 이어지고 마침내 결실을 맞이한다. 작금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심한 감독의 은퇴 번복(감독은 2017년 전작 <희망의 건너편>으로 일차 은퇴한 바 있다) 작품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현실에 발을 내디딘 채 주위를 돌아보며 선의를 포기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은은한 온기와 함께 전하려 애쓴다. 안사가 입양한 유기견의 이름에서 연상되듯, 이 영화는 한 세기 전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스>에서 전하려던 메시지를 한층 더 차가워진 세상에서 선보이려 의도한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특히 더 반가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특히 더 반가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 이미지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스틸 이미지 ⓒ 찬란

 
<작품정보>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
2023|핀란드|로맨스/멜로
2023.12.20. 개봉|80분|12세 관람가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주연 알마 포이스티(안사 역), 주시 바타넨(홀라파 역)
출연 얀 히티 아이넨(후오타리 역), 누푸 코이부(리사 역)
       그리고 '알마'(채플린 역)
수입/배급 찬란
공동제공 소지섭, 51k
 
2023 7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사랑은낙엽을타고 아키카우리스마키 알마포이스티 주시바타넨 핀란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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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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