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두 나라의 외교장관과 국방장관이 함께 만나는 '2+2회담'은 양국 관계의 긴밀도를 반영하는 증표로 이해된다. 이같은 외교와 국방의 팀워크는 평시의 우방국뿐 아니라 전시의 교전국을 상대로도 활발히 전개된다.
 
고려가 거란족의 파상 공세로부터 살아남은 한 가지 요인도 외교와 국방의 시너지 작용이다. 고려에 대한 요나라의 침공인 993년의 제1차 여요전쟁 때는 서희의 외교 협상술이 거란군을 돌려 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의 군사력과 더불어 서희의 외교 역량이 제1차 전쟁의 명운을 결정지었다.

1018년 12월 10일에 발발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고려사> 현종세가에 따르면 음력 무오년 12월 10일인 양력 1019년 1월 18일 발발한 제3차 여요전쟁 때는 강감찬의 활약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외교력과 함께 강감찬 부대의 전투력이 제3차 전쟁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이런 시너지 작용은 <고려거란전쟁>에서 묘사되고 있는 1010년의 제2차 전쟁 때도 당연히 작동됐다. 그렇지만 제2차의 경우에는 이것이 잘 부각되지 않는다. 쿠데타를 일으켜 천추태후와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康兆) 한 사람이 제2차 전쟁과 관련해 크게 부각된 결과인 측면도 크다.

요나라가 제2차 침공을 벌인 것은 고려와 송나라(북송)의 관계를 철저히 끊어놓음으로써 요나라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서였다. 송을 정복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고려를 제압하는 것이 개전 목적였다. 이런 욕심을 은폐하고자 내세운 것이 고려 역신 강조를 응징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때문에 강조의 응징이 전쟁의 명분이 되다 보니, 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히 강조 1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전쟁과 관련해 강조가 얼마나 부각됐는지는 요나라 성종의 역사를 담은 <요사> 성종본기의 기술 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제2차 여요전쟁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고려군'으로 표기해도 될 것을 굳이 강조로 표기하곤 했다. 그래서 '고려 대 요나라'가 아닌 '강조 대 요나라' 전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게 만든다.
 
성종본기는 강조(康兆)를 강조(康肇)로 표기하면서 "(음력) 11월 을유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강조가 병력을 거느리고 항전"했다고 말한다. 고려군이 항전했다고 해도 될 것을 이렇게 기술한 것이다. 뒤이어 "병오일, 조(肇)가 다시 출전해", "조(肇)와 부장 이립(李立)을 사로잡은 뒤" 등등으로 강조의 이름을 계속 언급했다.
 
요나라 역사서에도 비중 있었던 '강조'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요사>를 기록한 주체는 몽골족 원나라 조정이다. 요나라 조정이 강조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 전쟁에 관한 자료를 남겼기에, 원나라 조정 역시 같은 방향으로 기술했으리라 볼 수 있다.
 
요나라는 강조의 이름을 거론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강조는 이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때문에 강조 1인이 주목을 끌다 보니, 외교·국방의 시너지 작용이 관심을 덜 끄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종시대 역사를 담은 <고려사> 현종세가에 따르면, 제2차 때 요성종이 지휘한 병력은 40만이다. 압록강을 막 넘은 이 대군을 일주일 간이나 묶어놓은 부대가 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배우 지승현이 연기하는 양규 부대가 바로 그 주역이다. 이 부대의 활약은 거란군의 군사작전이 초장부터 꼬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화진 점령에 실패한 요성종은 이 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다음 작전에 착수했다. 하지만 흥화진을 그대로 둔 채 무작장 남하할 수는 없었다. <고려사> 양규열전은 요성종이 20만 명은 압록강 주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 명만 지금의 평북 선천군인 통주(通州)로 진격시켰다고 설명한다. 양규 부대가 거란 대군의 절반을 묶어놓은 셈이다.
 
이 일은 전쟁의 전체 구도에 영향을 끼쳤다. 거란군은 남하하면서도 압록강 쪽을 흘끔흘끔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거란군은 앞만 보고 싸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거란군이 개경에 침입해 궁궐을 불사른 뒤 도로 퇴각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양규 부대의 전공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흥화진에서 뛰어나가 거란군에 장악된 고려 백성과 고려 땅을 되찾는 작전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양규는 강조가 잃은 통주를 되찾았다. 또, 거란군에 넘어간 곽주성(평북 정주)을 기습해 적군 6천을 섬멸하고 그곳 백성 7천을 통주로 이거시켰다. 개경을 침범했다가 퇴각하는 거란군 2천여 명을 압록강 근처에서 격퇴하고 백성 3천 명을 해방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양규는 목숨을 다해 이 전쟁에 임했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안확은 <조선무사 영웅전>에서 양규가 김숙흥 장군과 함께 벌인 최후의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개경을 침범하고 돌아오는 거란군을 격퇴한 뒤의 일이다.
 
"3일 후에 적의 원병이 크게 이르러 대전(大戰)이 열릴새 양(楊)이 소수의 병사로써 1일에 3회를 승첩하였으나 병력이 점차 고갈되어가매 양과 숙흥이 모두 역전 끝에 드디어 죽게 됐다. 그러나 적 또한 큰 비를 만나 수습치 못하고 퇴주하게 되니, 최후에 후(後)장군 정성(鄭成)이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섬멸하였다."
 
양규는 거란 대군의 발목을 묶어놓고 이들의 작전에 차질을 줬을 뿐 아니라 본거지를 뛰쳐나가 적군을 기습하고 고려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이런 방법으로 거란군의 제2차 고려 침공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양규 부대를 비롯한 정부군만 이 전쟁에 기여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전쟁 1세기 뒤인 1123년에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은 고구려 조의선인 및 신라 화랑을 계승한 고려 승군들의 역할을 언급했다.
 
고려가 요나라에게 거짓말을 했던 까닭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2TV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승군들은 서긍의 기록에서 재가화상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서긍은 "이전에 거란이 고려에 패배한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임진왜란 승병장인 사명대사 등으로 계승될 고려 승군의 전통이 거란족과의 기나긴 전쟁에서도 빛을 발했던 것이다.
 
양규 부대나 승군들이 거둔 군사적 성과에 더해, 고려 조정의 외교도 한몫을 했다. 요성종이 회군을 결심한 것은 고려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려 조정이 철군의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외국에 가서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욕 먹을 일이 아니지만,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이것이 치욕으로 간주됐다. '친히 찾아가 알현한다'는 의미의 친조(親朝)는 제후가 천자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예법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강대국과 사대관계를 맺더라도 친조만큼은 최대한 기피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식상으로는 제후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국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제2차 전쟁에서 고려는 친조 문제를 역이용했다. 요성종에게 '일단 돌아가 계시면 저희 군주가 직접 찾아가 알현하겠다'는 식의 거짓 약속을 해줌으로써 요성종이 덜 부끄럽게 철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뒤 요나라가 약속 이행을 촉구했지만, 고려는 무시해버렸다. 높이 평가할 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거란족이 흔쾌히 철군하게 만든 고려의 외교도 이 전쟁에 영향을 끼쳤다.
 
양규 및 승려들의 희생과 더불어 그런 외교작전도 요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과 관련해 강조에게만 지나치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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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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