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793년, 프랑스의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흥분과 광기에 휩싸인 군중 사이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코르시카 출신의 포병 장교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 그는 이 혼란을 자기 기회로 삼기로 결정하고, 툴룽에서 영국군을 무찌르며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때마침 하늘도 그에게 행운을 선사한다. 한 사교 파티에서 기품 있는 여인 '조제핀'(바네사 커비)을 만나 첫눈에 반한 것. 자기 운명을 바꿔줄 남자를 찾던 조제핀은 열렬한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그들은 부부가 된다. 비록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조제핀을 만난 후 승승장구한 나폴레옹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둘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나폴레옹의 몰락도 막을 올린다. 

주의!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입니다
 
 영화 <나폴레옹> 관련 이미지.

영화 <나폴레옹> 관련 이미지. ⓒ 소니픽쳐스

 
리들리 스콧의 시대극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다루는 시대를 재현하는 데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역사적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할리우드에서도 손꼽히는 비주얼리스트의 웅장한 영상미에 홀리면 그의 시각에서 해석한 시대, 사건, 인물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칫 잊을 수 있기 때문.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엑소더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모두 마찬가지였다. 리들리 스콧의 화려한 볼거리는 자유의 평등의 가치를 고찰하고, 종교의 의미와 기능을 성찰하며, 젠더 이슈를 고민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품고 있었다. 과거를 재현하는 대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반추한 결과였다.

Apple TV+와 리들리 스콧이 손잡은 <나폴레옹>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뛰어난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전유럽에 자유주의를 흩뿌리고, 대륙법의 기반인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었으며, 황제 자리를 차지해 정점을 찍은 정치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전쟁의 신으로 칭송한 전술가이자 일반 병사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은 꼬마 부사관. 

<나폴레옹>은 이 모든 이미지를 멜로 드라마라는 틀 안에 담아낸다. 위대한 나폴레옹 1세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나폴레옹의 시점에서 그의 모든 행적과 위업을 다시 해석한다. 이 재해석은 분명 신선하고, 그의 일생과 나름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으며, 예상치 못한 울림을 안기기도 한다. 다만 해외에서 먼저 공개된 후 호불호가 격렬히 나뉜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해석을 밀어붙일 뚝심이 부족한 게 결정적인 패착이다.

화살표가 확실한 오프닝 시퀀스

당장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이 단두대에서 달아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대놓고 알려준다. 오프닝 분위기만 느껴도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로 향한다. 사형집행인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치운 후 자세를 고정시킨다. 거대한 칼이 그녀의 하얀 목에 닿고, 집행인이 왕비의 목을 들어 올리자 지켜보던 군중이 환호한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상징하는 시작점. 그러나 연출은 역사적 중요성과 사뭇 대조된다. 웅장하거나 비극적인 음악이 깔려야 할 것 같은 직관에 반하는 음악이 들려온다. 왈츠를 듣는 듯 신나고 경박스럽기까지 하다. 웅장한 전기 영화나 서사시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라 미리 경고하는 듯하다. 기록된 역사와 달리 나폴레옹이 군중 안에서 왕후의 처형을 지켜보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러니 <나폴레옹>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위대한 정치인이자 뛰어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의 후광을 지우는 것. 실제로 영화는 혁명, 쿠데타, 즉위식 등 그가 주도한 여러 정치적 사건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데서 그친다. 배경이나 맥락은 사치라는 듯이 생략한다. 보나파르트 가문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동기와 욕망에 대한 설명도 많지 않다. 황제까지 즉위한 나폴레옹 1세의 정치적 여정을 영화만 보고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전쟁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은 보나파르트 장군의 모습도 편린만 스쳐 지나간다. 물론 각각의 전투 시퀀스는 인상적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대표적이다. 적군 유인, 보병 간 전투, 기병대 기습, 포격으로 마무리되는 전투 양상을 명확하게 담아냈다. 워털루 전투 역시 나폴레옹의 최후에 걸맞은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다만 나머지 전투는 그저 나폴레옹이 거쳐야 했던 퀘스트 중 일부로 짚고 넘어간다.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도 활용된다. 극 중 나폴레옹은 카리스마형 주인공이 아니다. 군사적 재능은 있지만 전장에서 숨을 헐떡이며 벌벌 떤다. 1799년 쿠데타 장면도 비장함보다 우스꽝스러움으로 가득하다. 그가 지휘한 전투에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는 마지막 자막은 화룡점정이다. 리들리 스콧 작품 중 <글래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등과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해도 이상하지 않다. 해외에서 영국인(리들리 스콧)이 프랑스 위인을 비하했다는 지적이 나올 여지도 충분해 보인다. 

순정마초 나폴레옹
 
 영화 <나폴레옹> 관련 이미지.

영화 <나폴레옹> 관련 이미지. ⓒ 소니픽쳐스

 
이처럼 정치인과 군인의 모습을 지운 여백에 <나폴레옹>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을 그려 놓는다. 나폴레옹은 극장에서 조제핀을 만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고, 곧장 결혼한다. 그는 이집트 원정 전후로 조제핀의 불륜을 확인하지만, 가까스로 이혼 위기를 극복한다. 이후 부부는 아들을 낳지 못해 갈등을 빚고, 끝내 이혼을 선택하지만, 죽을 때까지 친구로 남는다.

나폴레옹이 겪은 수많은 사건들은 이 사랑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조제핀이 "승리의 부인(마담 드 빅투아르)"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재해석으로 보인다. 극 중 일방적이었던 그의 사랑이 양방향이 되고, 조제핀이 마침내 그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지며, 행운이 차오르는 순간부터 그의 전성기가 펼쳐진다. 쿠데타로 제1집정을 거쳐 황제가 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을 무너뜨리며 유럽을 제패한다. 

반면에 그가 더 큰 영광을 원한다면서 조제핀을 버리자 몰락이 시작된다. 이혼한 순간부터 그의 운은 다한다. 그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퇴위하고, 유배를 떠난다. 마지막 기회도 그녀에게 달려 있다. 조제핀이 아직 생기 있을 때, 그는 알바 섬을 탈출한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폐렴으로 사망하자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렇게 황후와 황제는 흥망성쇠를 같이 겪는다. 

리들리 스콧다운 영상미도 이 로맨스와 어우러지며 힘을 발한다. 황제 즉위식과 텅 빈 모스크바에 나폴레옹이 입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스크린을 벌겋게 물들인 모스크바 대화재는 정점이다. 이 장면들은 정치인이자 군인으로서 나폴레옹의 정점과 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조제핀의 내레이션이 나폴레옹을 감싸는 연출이 더해지면서 조제핀이라는 행운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그 행운이 그를 배신했음을 보여준다. 

부실했던 기초 공사

그러나 과감한 재해석에 충분히 힘을 실어주지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오프닝에서 나폴레옹의 일생을 로맨스로 풀어내겠다는 지향점을 보여줬는데, 정작 초반 전개가 그 방향성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실제로 초반부는 신마다 정치인, 군인, 남자 나폴레옹의 모습이 뒤엉켜 있다. 극장 안에서 편집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난잡하다. 특히 이집트 원정까지는 나폴레옹의 연애사가 위업을 포괄하지 못한 채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특히 로맨스를 쌓아 올리는 분량이 부족하다. <나폴레옹>은 관객이 순정남 나폴레옹에게 이입하고, 로맨스의 관점에서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따라간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가 조제핀을 사랑하는 과정은 급하게 지나가고, 조제핀의 개인사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히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관계도, 그녀가 그의 행운을 뜻한다는 해석도 부각될 수가 없다. 나폴레옹을 운 좋게 권력을 잡은 정신병자 내지는 사랑하는 여자도 차지 못한 찌질한 전쟁광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부실한 초반 전개는 러닝타임을 고려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판단착오에 가까워 보인다. 근래 OTT 공개 예정 작품은 극장 개봉 시 러닝타임의 제한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3시간을 넘긴 <플라워 킬링 문>이 대표적이다. 조제핀의 삶을 보다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4시간 30분 분량의 컷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아쉽다. <나폴레옹>의 완성도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2011년 MBC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공개된 '순정마초'가 떠오른다. 가사 때문이다. "나의 사랑을 버린 그댈 잊지 못한, 죽은 심장 상처 난 백합 순정마초." 첫사랑을 기억하는 순정남이자, 다른 여자들을 차버리고 다니는 마초라는 의미였다.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가사다. 나폴레옹의 첫사랑이자 그 사랑을 배신했던 조제핀. 첫사랑인 황후를 버리고 떠난 나폴레옹. 이 커플의 관계가 가사와 일치한다. 

이 지점에서 나폴레옹 1세의 일생을 그려낸 장엄한 서사시를 기대할 이들에게 <나폴레옹>이 실망스러운 이유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배경으로 조금 더 웅장하게, 위엄 있게, 극적으로 그려낸 리들리 스콧 버전의 '순정마초'니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나폴레옹 리들리스콧 호아킨피닉스 바네사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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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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