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2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2

 
"승리하기 위하여 치른 대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패배한 다음에 겪는 고통에는 절대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지키려는 백성들과의 신의가, 오히려 백성들을 지옥에 빠뜨릴 수도 있다. 제 아무리 숭고한 가치도 승전에 도움이 되 않는다면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지도자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일까. 12월 2~3일 방송된 <고려거란전쟁> 7~8회에서는 2차 여요전쟁으로 최대의 위기에 놓인 고려의 모습을 통하여 전쟁 속에 담긴 정치학을 조명했다.
 
흥화진의 고려군은 양규(지승현)의 지휘 아래 거란(요나라) 40만 대군의 거듭된 공세를 끝내 격퇴해낸다. 거란 황제 아율융서(요 성종, 김혁)는 흥화진 함락에 실패한데 크게 분노하여 선봉장들을 처형하려 하지만, 소배압(김준배)은 이를 만류하며 "폐하께서 선봉장을 참하신다면 그만큼 이 패전의 의미는 무거워진다. 허나 폐하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넘기신다면 이 패전의 무게는 아주 가벼워질 것"이라고 일깨워준다.
 
야율융서는 소배압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수들을 용서하고, 흥화진에 예비병력을 남겨둔 뒤 강조(이원종)가 이끄는 고려 본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통주로 향한다.
 
양규는 거란군의 포위를 뚫고 봉화를 올려서 흥화진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알린다. 삼수채에 포진한 강조의 고려 본군은 흥화진의 소식에 크게 고무된다.
 
거란군과의 정면대결에 나선 강조의 고려군은 대기병용 병기로 준비한 '검차진(전투용 수레)'을 앞세워 대회전에서 거란이 자랑하던 철갑기병을 연이어 격퇴한다. 전령을 통하여 전황을 보고받은 현종(김동준)은 직접 백성들 앞에서 나서서 고려군이 이기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개경은 승전의 분위기에 잠시 고무된다.

하지만 거란군 선봉도통 야율분노가 고려군의 본진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찾아내 단독으로 은밀하게 기습을 가한다. 강조는 거란군에 생포당하고 순식간에 수뇌부를 잃은 고려군은 그대로 붕괴되고 만다. 이에 2차 여요전쟁의 주도권은 거란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고려거란전쟁>의 전쟁신 관련 연출은 기대가 컸던 만큼 평가가 엇갈린다. 드라마는 제 2차 여요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였던 흥화진 공방전과 통주(삼수채) 전투를 위주로 진행된다. 검차와 진법, 공성전, 인간방패 전략 등 이전의 사극에 비하여 전투의 고증과 사실성에서 진일보한 부분은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스펙터클에 치중한 보여주기식 연출이 아니라 전쟁의 잔혹함과 비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더 주력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제작여건의 한계 때문인지 지나치게 내용이 축약된 급전개와 부실한 세부묘사는 아쉬움을 남긴다. 6회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며 긴박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흥화진 전투는, 이어진 7회 오프닝에서는 곧바로 고려군이 승리했다는 결말만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맥빠지게 한다.
 
또한 강조의 최후를 장식한 통주 전투는 그 규모로만 보면 1~3차 여요전쟁은 물론 한반도 전쟁사에 유례없는 대회전이었지만 정작 드라마에서는 그 스케일과 전개가 너무 부실하게 그려진다. 승승장구하던 강조가 단 한 번의 기습으로 어이없이 생포당하고 고려군이 붕괴되는 과정도 개연성이 크게 떨어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강조는 초반의 승세에 고무되어 방심하다가 거란군 기병들에게 본진이 돌파당하며 생포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실제로 이 전투의 패배는 고려를 한때 멸망의 위기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에는 강조가 자신의 장막 안에서 바둑을 두며 전략을 논의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란군에게 붙잡히는 장면만 묘사된다. 세부적인 전후 내용은 대부분 대사로만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 그친다. 시청자들로서는 내용 전개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KBS2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2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2

 
오히려 드라마에서 전쟁신 묘사보다 더 주력한 것은, 전쟁에 대처하는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강조의 패전 이후 '현종과 강감찬의 논쟁'은 8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현종은 지난 번처럼 전황을 궁금해하는 백성들에게 솔직하게 소식을 알려야할지 고민한다. 그러나 강감찬(최수종)은 패전 소식을 함구할 것을 조언하며 "백성들과 함께하시라고 한 것은 그것이 승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함구하라는 것도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현종은 "백성들을 속이라는 것이냐. 백성들에 대한 신의를 버린다면 승전보다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황제와 백성들의 신의가 무너져 있다면 무슨 힘으로 이 나라를 재건하겠냐"라며 반박한다. 하지만 강감찬은 "그것은 승리한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다. 지금 그것까지 챙기려는 것은 폐하의 욕심"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동안 굳건한 신뢰관계를 형성해오던 현종과 강감찬은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의견이 대립하며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다. 격앙된 현종은 "백성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중요한 일을, 어찌 전승의 제물로만 생각할 수 있나"라며 명분에 입각한 이상론을 제기한다.
 
이에 강감찬은 '전쟁은 철저히 현실'임을 강조하며 "인간이 살아서 겪는 유일한 지옥이 전쟁이다. 폐하께서 패전의 소식을 솔직히 전한다면 백성들은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럴 때 전장에서 군사들을 더 보내달라 청하면 어떡할 것이냐. 후방이 다 무너졌는데 무슨 수로 전장의 장수들을 지원할 것이냐"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강감찬은 "부디 승리만을 생각하시라"며 간곡하게 호소한다. 결국 강감찬의 조언을 받아들인 현종은 내관을 대신 보내 "고려군이 계속 잘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일단 백성들을 안심시킨다.
 
한편 거란군에 생포된 강조는 실제 역사처럼 장렬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역사 기록에서 승전에 교만해져서 거란군을 우습게 보고 허세를 부렸다거나, 자신이 시해한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죄책감을 느꼈다는 등 강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조는 야율융서의 마지막 회유에도 "야만인의 신하가 되느니, 죽어도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 이 반역자를 믿고 대군을 맡겨주신 고려의 황제폐하를 위하여 죽어도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일갈하며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야율융서가 직접 휘두른 도끼에 최후를 맞이한다. 출정을 앞두고 현종의 가절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과 함께, 이 드라마에서 '반역자이면서도 충신'으로 묘사된 강조의 복합적인 캐릭터성을 잘 드러낸 장면이다.
 
강조의 죽음과 고려군의 연이은 패주로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개경의 조정은  거란에 항복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최항(김정학)은 강감찬과의 대화에서 "항복은 힘이 남아있을 때 하는 것이다. 고려군이 다 전멸한 뒤에는 항복을 청해도 받지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폐하가 직접 거란 황제에게 가서 친조(일국의 군주가 상국의 조회에 참석해 신하를 자청하는 것)를 할 수 있게 설득해 달라"고 요구한다.
 
현종은 모든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항복을 제안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 믿었던 강감찬마저도 거란 황제에게 친조를 청하라는 의견을 내놓자 크게 실망하여 이를 추궁한다.

하지만 현종과의 독대에서 강감찬은 "적을 기만하여 시간을 벌자는 것"이라며 비로소 본심을 털어놓는다. 고려가 항복했다고 생각하여 거란이 진격을 늦추고 방심하는 사이에, 전열을 재정비하자는 것.
 
강감찬은 "친조를 청하는 표문 어디에도 항복이라는 글자는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날짜를 못박지 않은 약속이니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며 "실제 친조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고려는 자주국이 아니라 거란의 속국이 되는 것"이라고 일깨워준다.
 
놀란 현종이 "거짓 약속을 하라는 말이냐, 아무리 적국과의 관계에도 외교에 최소한의 신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강감찬은 "신의를 먼저 저버린 것은 거란이다. 거짓 명분을 내세워 고려를 침략한 거란에게까지 공명정대한 외교를 펼쳐야 할 이유는 없다"고 일축한다.
 
강감찬은 직접 표문을 지어 거란의 진중에 다녀올 사신을 자청한다. 그제야 강감찬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 현종은 "처음엔 아버지처럼 자상한 늙은 신하였고, 그 다음에는 바른 말 하기 좋아하는 고집쟁이 신하였다. 헌데 이제보니 승리에만 미쳐있는 광인 같다"며 놀라워한다.
 
이에 강감찬은 "맞다. 소신은 미치도록 승리하고 싶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다"고 화답한다. 현종은 강감찬이 사신으로 거란의 진중을 향해 떠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다.

앞서 현종과의 논쟁에 이어 다시 한번 '전쟁과 정치는 결국 모두 평화를 위한 수단이며, 국익은 명분이 아닌 실리가 우선'이라는 드라마의 주제의식를 강감찬의 대사를 통하여 대변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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