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LA 흑인 폭동'은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에게 차별받는다고 주장하던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또다른 소수민족인 한국인들이 애꿎은 분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또다른 인종갈등을 만들어낸 비극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11월 2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8회에서는 '코리아타운의 탄생과 비극, LA 폭동은 왜 일어났나'편을 통하여 미주 한인 이민자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명했다. 이찬행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아시아인들의 대규모 미국 이민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부터다. 당시 미국은 서부 영토 확장으로 국토의 규모가 급격하게 넓어졌고,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골드 러시(금광을 찾기 위하여 미국 개척민들이 서부로 몰려간 현상)가 발생하며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 당시 서부로 몰려든 사람들은 개척자를 의미하는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 골드러시가 벌어진 1849년의 뒷자릿만 인용한 것)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직 방대해진 미국 영토에서 동-서부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없었다. 미국은 서부의 오클랜드에서 동부의 뉴욕을 잇는 3000킬로미터 규모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기획했다. 이처럼 금광산과 철도 건설을 위해서는 자연히 막대한 노동인력이 필요해졌고 그 자리에 투입된 것이 바로 아시아인들이었다.
 
19세기 중국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한 막대한 배상금과 흉작 등으로 국운이 기울이자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미국 이민을 대거 선택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아시아계 노동자들을 가리켜 인도어로 머슴, 일꾼을 의미하는 '쿨리'로 불렸다. 최초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모여든 곳이 샌프란시스코였고, 가장 숫자가 많았던 중국계 이민자들이 급증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시작한 것이 '차이나타운'의 기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과 청나라인들간 일자리 경쟁이 벌어지면서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와 적대감이 시작됐다. 미국인보다 저렴한 임금에 노동력을 제공한 청나라인들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반감이 커지면서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시행되어 청나라인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추방시켰다.
 
청나라인들이 사라진 노동시장에서 그 빈자리를 대체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열강이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정작 막대한 전비지출과 노동력 상실로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진 상태였다. 미국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경쟁과 견제가 심하던 캘러포니아나 본토 지역보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적은 임금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하와이에 눈을 돌렸다.
 
하와이에 일본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은 적은 임금에 반발하여 파업을 일으키거나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사태가 빈번해졌다. 난처해진 하와이 농장주들이 일본인들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조선인들이었다.
 
한인들의 대규모 미주 이민의 역사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에서 시작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은 갤릭호를 타고 남성 48명, 여성 22명, 아이 16명까지 총 86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고 한다. 개인이나 소수의 이민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된 대규모 이민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미국 이주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호러스 알렌이다. 선교사 겸 의사였던 그는 현재의 세브란스 병원의 되는 '광혜원'을 건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알렌은 주한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조-미 외교의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당시 국왕인 고종으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조합은 조선에 있던 알렌에게 조선인 노동자를 보내줄 것으로 요청했고, 알렌은 고종의 승낙을 얻어 대규모 한인 이주민을 모집하게 된 것.
 
당시 해외 이민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조선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인들과는 달리 조상의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이에 알렌은 홍보에 앞장서서 안정된 월급과 학비면제, 숙식 제공, 휴일 보장 등의 조건 내세우며 조선인들을 설득했다. 당시 조선 화폐로 57원의 월급은 쌀 한 가마니(60원)와 맞먹는 규모였다. 이에 피폐한 삶에 지쳐있던 많은 조선인들이 고심 끝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이민을 선택했다.
 
하지만 하와이로 떠난 조선 노동자들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열악한 환경과 무더위 속에 하루 10시간 이상 쉴틈없이 강도 높은노동을 이어가야 했고, 감독관들의 감시와 폭언, 체벌 등에도 시달려야 했다.

1910년대 초창기에는 남녀 성비가 무려 9대 1일만큼 남성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가정을 이루지 못한 미혼 남성 조선인 노동자들의 능률이 떨어지거나 술과 노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이에 농장주들은 특단의 대책으로 조선 본국의 여성들과 혼인을 하여 신부가 이민을 올 수 있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각각 하와이와 조선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남성과 여성의 중매를 주선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사진 신부'였다. 본국에 있는 여성들이 남성 노동자들의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고, 남성이 다시 자신을 선택해준 여성의 사진을 받아 승낙하면 결혼이 성사되는 방식이었다. 신부의 뱃삵(당시 쌀 50가마니) 등은 모두 남편 측이 부담한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이 정해준 남성과 혼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비록 사진으로라도 여성이 자신의 원하는 배우라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하지만 사진 신부들의 환상이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번도 먼 해외를 나가보지 못한 신부들은 열악하고 고단한 뱃길에 지쳐 스스로 바다에 투신하거나 극심한 멀미로 시력을 잃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조선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5~20세였고, 사진 신부들 역시 대부분 10대의 어린 소녀다. 그러나 남편이 된 남성들은 나이를 속인 탓에 신부들과의 나이차는 평균 15살 이상이었고, 심지어 16세 여성이 75세 남성을 남편으로 맞이한 경우도 있었다. 남성들의 실체를 알고 이혼한 부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싼 뱃삯 때문에 어쩔수 없이 혼인을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사진 신부들은 낯설고 고단한 하와이에서의 삶을 가족을 지키고 행복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터내야만 했다.
 
이후 한인들은 하와이 외에도 멕시코, 쿠바 일대로 진출하여 현지 농장들에서 일했다. 멕시코 거주 한인들은 밧줄과 카펫의 원료가 되는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고, 그 한국식 발음인 '애니깽'이라는 제목으로 미주 한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미국 본토에서 한인들의 숫자가 차츰 늘어나면서 한인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LA에서 약 100km 떨어진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지역에는 미국 최초의 코리아타운인 '파차파 캠프'가 설립됐다. 이 지역은 19세기말 미국 최고의 부촌으로 통했고 오렌지 농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인종에게 취업의 문이 활짝 열린 기회의 땅이었다.
 
파차파캠프의 설립을 주도한 것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다. 그는 한인 노동국을 설립하고 한인 이민자들을 위하여 일자리 주선에 힘썼다. 안창호와 한인들은 노동으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한인들은 파차파 캠프를 통하여 결혼식, 생일잔치 등의 개인행사에서부터 토론과 예배 등의 사회활동을 공유하며 이주민의 애환을 달래고 끈끈한 공동체 의식을 이어갔다. 안창호는 파차캠프의 질서를 통하여 엄격한 규율을 도입했고 밤 9시 소등, 도박과 폭음 금지, 내복을 보이지 말고 흰색 셔츠를 입을 것 등의 복장규정을 권장했다.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미개하다고 무시 당하는 이미지가 굳어지면 독립할 만한 자격도 없다는 선입견을 생기는 것을 극도로 우려했던 안창호는 "질서와 환경(청결)은 문명민의 자격"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70년 후, LA에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동체인 'LA 코리아 타운'이 형성된다. 이곳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사회의 중심 커뮤니일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한국 문화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의 관광 명소로도 자리매김했다.
 
20세기 들어 LA는 산업의 발전으로 미국에서 가장 번영하고 일자리가 넘치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이민자들에게 LA는 기회의 땅이였다. 또한 2차대전 이후로는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전쟁보급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인 1965년에는,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며 유색인종의 국적별 할당제가 폐지되면서 미국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때부터 LA에는 아시아계, 흑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들게 됐다.
 
부유한 백인들은 급증한 흑인과 외부 이민자들로 부동산 가치가 급락할 것을 우려하여 오렌지 카운트 등 교외 지역으로 이주했다. LA 일대가 슬럼화가 되며 땅값이 하락하자 그 틈을 노려서 한인들이 진출하여 하나씩 상점을 사들였고, 식료품 마트, 주류가게, 주유소 등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 사회의 핫플레이스가 된 올림픽마켓과 나이트클럽 영빈관을 만들어낸 고 이희덕씨, 코리타아운 한글간판 변경 운동을 주도한 김진형 한인 번영회장 등은, 오늘날 LA 코리아타운의 발전을 주도하는 데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980년 12월 8일에는 LA시의 승인을 받아 공식식적으로 'LA 코리아타운'이라는 명칭이 인정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92년 'LA 폭동사건'은 어려움 속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을 차근차근 키워가던 미국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폭동 약 1년 전, 미국 사회의 인종갈등에 불씨를 담긴 '로드니 킹 사건'이 발생한다. 1991년 3월 3일 미국 LA의 한 고속도로에서 과속주행을 하며 도망치던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에게 체포되어 81초간 곤봉으로 무려 56회나 구타 당한 과잉 진압사건이었다.
 
그로부터 약 13일 뒤에는 LA에서 '라타샤 할린스 살인사건(1991년 3월 16일)'이 발새한다. 당시 15세의 흑인 소녀 라타샤는 오렌지 주스를 구매하려다가 물건을 훔치는 도둑으로 오해한 상점주인인 한인 이민자 1세대인 두순자과 시비가 붙었다. 두 사람은 실랑이를 벌이다가 두순자가 총을 꺼내들고, 라탸샤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재판에서 두순자는 집행유예와 400시간 사회봉사 선고를 선고했다. 흑인 사회는 이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크게 분노했다.
 
그런데 얼마 뒤인 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 사건 판결에서는 가해자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사실상 4명 전원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것이었다. 사실 이미 판결이 내려지기 전부터 수상쩍은 정황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엄연히 LA 관할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음에도 법정이 백인 거주민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백인 거주지역인 시미밸리로 변경되었고,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단 12인에는 백인만 10명, 흑인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누가 봐도 공정성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최종판결에 분노한 흑인 사회는 폭발했다.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 30분, LA 거리에는 재판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분노한 흑인들이 법원을 비롯하여 각종 관공서와 언론사를 점거하며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물론 평화로운 시위를 주장한 이들도 많았고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흑인들이 다수였지만, 과격한 이들이 앞장서서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사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동이 발생한 지 1시간 만에 흑인갱단과 폭도들이 코리아타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히스패닉계 폭도들도 이에 동참하여 곳곳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상점 곳곳이 불에 타고 기물이 파손됐다. 많은 한인들은 수십년의 노력으로 일궈온 피와 땀의 결실이 하루아침에 불 타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며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했다.

폭동의 여파가 한인 사회로 옮겨간 이유는 첫 번째로 불운하게 코리아타운이 폭동발발 지역과 인접했다는 지리적 요인,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로드니 킹과 라타샤 사건으로 인하여 흑인들의 한인에 대한 적대감도 백인 못지 않게 높아져 있었다는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한인과 흑인들은 오래전부터 서로에 대하여 불신하며 갈등의 골이 높아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LA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지역을 보호하는 데 집중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소방관들은 출동신고를 받고도 경찰의 보호 없이 출동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또한 LA 경찰은 폭동을 진압할 만한 인력이 부족했고 심지어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는 초기 폭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도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 참석한 것이 드러나며 훗날 직위해제됐다. 주방위군 투입이 결정되었으나 탄약 지원 부족으로 폭동이 시작된 지 2일 차가 되어서야 겨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에 의지할 곳이 없음을 깨달은 한인들은 자체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들은 비상 방송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자경단을 조직하여 폭도들에 맞섰다. 한인들은 옥상에서 보초를 서며 폭도들의 공격에 대응했는데 이로 인하여 '루프탑 코리안'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의 활약상은 현지 뉴스에도 보도되며 큰 화제가 됐다.
 
한인 자경단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위협사격만 실시하고 살상은 절대 금지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지켰다. 다행히 자경단의 활약으로 폭도들은 더 이상 약탈과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LA 폭동 당시 발생한 인명피해는 60여 명에 이르며 그중에는 19세의 한인 청년이었던 고 이재성군도 있었다. 재성군은 한인 자경단으로 동료들과 도움을 필요하 곳을 찾아다가다 오인으로 인한 총격을 받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폭동 3일 차인 5월 1일이 되어 주방위군이 나서고, 사건의 빌미가 된 피해자 로드니 킹이 기자회견을 열고 "중립을 지키고 싶다. 유색인종들을 사랑한다"고 호소하며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다행히 이때부터 전환점이 마련되어 방화와 약탈은 사라지고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2일에는 10만 명의 한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Live together(함께 삽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화를 요구하는 거리행진을 벌였다. 결국 약 일주일 만인 5월 4일에야 모든 폭동은 종결을 고했다.
 
LA 폭동은 미국 사회 인종 갈등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임과 동시에, 한인들도 미국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교훈을 남겼다. 폭동 이후 한인사회는 타 인종과의 교류과 공생의 필요성에 눈을 떴고, 미국의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2020년대에는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서 한국계 의원이 4명이나 탄생하여 정계에서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

"나는 흑인, 황인, 백인이 모두 형제라고 믿습니다." 인권운동가 W.E.B. 듀보이스가 남긴 어록이다. 2023년 기준으로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시작한 지 어느덧 120여 년의 역사가 흘렀다. 각기 다른 인종과 소수민족들이 서로를 조금만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하여 노력했더라면 LA 폭동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은 나와 조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벌거벗은세계사 LA흑인폭동 코리아타운 미주한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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