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이란 무엇인가. 거만할 오(傲)에 다시 거만할 만(慢)을 붙여 오만이라 하였다. 그저 일시적 거만함을 넘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저만 아는 자세를 우리는 오만하다 이른다. 오만은 스스로가 거만하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점에서 일상적이며, 저 아닌 다른 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저와 같을 수는 없으리라 여긴다.
 
때로 오만한 영화를 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지난해 여름 개봉한 <탑건: 매버릭>이 톰 크루즈의 노익장과 함께 끝을 모르고 진화하는 할리우드의 첨단 기술력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영화로부터 진정 보아야 할 것은 너무나도 쉽게 무시되어 좀처럼 조명 받지 못했다. 이 영화가 얼마나 오만한지, 또 그 오만이 전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란 사실이 말이다. 요컨대 할리우드는, 또 그로 표상되는 상업영화계는 습관적으로 오만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탑건: 매버릭>은 탑건으로 불리우는 미 해군 항공대 정예 조종사들이 잠재적 적국으로 지목된 어느 나라에서 비밀리에 준비한 핵시설을 폭격해 파괴하는 이야기였다. 미국이 판매한 4세대 F-14 전투기가 적 기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동맹이었던 나라의 기지로 보이는 이곳을 미국이 기습 폭격하는 것이다.
 
스파이 게임 포스터

▲ 스파이 게임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할리우드 영화가 무심코 범하는 오만
 
핵개발은 이뤄져선 안 되는 것으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이를 파괴하는 조종사의 이야기로만 영화를 이해하면 그저 호쾌한 액션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선전포고도 없이 타국 국경 너머 시설을 폭격하는 미국 군대의 군사행동은 국제법상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타국 영화가 스스로의 잣대로 미국 본토를 폭격하는 이야기를 영웅적으로 다룬다면 미국 관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랍게도 이와 같은 문제는 얼마 화제가 되지 않고 묻히고 말았으나, 이는 그저 가벼운 문제일 수만은 없는 일이다.
 
<매버릭>이 아니더라도 미국 영화에서 이와 같은 오만은 수시로 발견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스파이 게임>과 같은 류의 영화가 되겠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간판스타였던 토니 스콧의 작품으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잘 만들어진 첩보물이다. 재미와 연출, 편집, 연기, 각본 등 여러 요소에서 합격점을 줄 만한 이 작품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매버릭>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너무나 자연스러운 할리우드와 미국의 오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 게임>은 1991년 CIA에서 은퇴를 앞둔 요원 나단 뮈어(로버트 레드포드 분)의 마지막 근무일을 그린다.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은퇴 후만 생각해도 좋을 마지막 날이다. 그러나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그를 마음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소식은 다름 아닌 제 부하였던 톰 비숍(브래드 피트 분)이 중국에서 체포됐단 내용이다.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24시간 뒤 사형에 처해질 예정이란다.

마침 며칠 뒤 미국과 중국은 양국 정상이 만나 경제협력을 논의하기로 한 상황, CIA 수뇌부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일을 덮으려 한다. 겨우 회의에 참석한 뮈어는 CIA가 비숍을 구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독자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뮈어의 후임자를 비롯해 그의 움직임을 견제하려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뮈어는 현장에서 갈고 닦은 솜씨로 신출귀몰하게 일을 처리해간다.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사형 위기 놓인 미국 요원, 남은 건 하루 뿐
 
영화는 CIA 청사 내에서 뮈어가 도청과 감시를 피해가며 비숍의 처형을 늦추는 등의 공작을 벌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담아낸다. 한편으로 뮈어는 CIA 회의자리에서 비숍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영화는 이를 통하여 뮈어와 비숍의 관계를 깊이 있게 풀어낸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정보국 장교와 저격수로 처음 만난 뒤, 비숍에게 노하우를 가르쳐가며 현장요원으로 키워내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등장한다. 관객은 그로부터 뮈어와 비숍 사이에 흐르는 신뢰와 애증을 알게 된다.
 
한때 둘은 레바논 베이루트 등 서아시아 일대에서 CIA의 공작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비숍은 한 여자를 통해 암살대상인 요인에게 접근한다. 여자를 통해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야 과거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지만, 뮈어는 비숍이 지나치게 여자에게 빠지는 것을 우려한다. 더구나 그 여자는 신원도 영 수상한 탓에 비숍이 그녀 때문에 일을 망치고 스스로를 망가뜨릴까 걱정하는 것이다.
 
여자는 중국을 대상으로 테러를 저질렀던 이력이 있었다. 본래 건물만 폭파하려 했었지만 계획이 엇나가 사람을 죽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조국인 영국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되자 국외로 도피했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빈민들을 대상으로 봉사를 하며 살아가던 터였다. 의료봉사 과정에서 그녀가 알게 된 현지인에게 접근하고자 비숍이 그녀를 이용한 것이었으나, 꼭 그만 그녀를 이용했으리란 보장도 없는 일이다. 내전과 물밑에서 이뤄지는 정보전이 치열한 이 일대에선 그런 일이 꽤나 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음 약한 비숍은 사실을 알고도 그녀를 쳐내지 못한다. 그러고도 계속 그녀를 만나니 뮈어는 그들을 떼어놓기로 결심한다. 그저 떼어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 정보를 흘려 여자를 납치해 송환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여자는 중국 외딴 감옥에 수감된다.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만리 이역에서 부하를 구출하다
 
비숍이 스파이 혐의로 중국에 체포된 건 그녀를 탈옥시키려는 작전에 실패한 탓이다. 동료들과 교도소에 침입해 탈출을 도모했으나 도리어 제가 잡히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처형과 구출을 놓고 만 하루 동안의 급박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무대는 버지니아 주 CIA 본부, 건물을 나서면 그대로 은퇴가 되는 뮈어의 마지막 근무다. 그 하루 동안 중국 외딴 감옥에 수감된 비숍을 구해야 한다.
 
문제는 모든 역경을 건너 최종장에 드러난다. 뮈어는 모든 감시와 압박을 뚫고서 비숍을 구해낸다. 문서를 조작하여 군이 구출작전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중국 외딴 섬을 향해 날아가는 두 대의 헬리콥터와 거기서 내린 특수부대원들이 감옥을 지키는 경비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압도적인 전력으로 승리하여 비숍과 여자를 구출해 돌아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하루 만에 태평양을 건너 제 부하를 구해내는 뮈어의 의리와 용기, 재주가 워낙 대단하여 영화를 보는 이들은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가 이 안에 들어 있다. 이 영화 뿐 아니라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자주 드러내는 오만한 민낯이 말이다.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할리우드 영화 속 타국은 어떤 모습인가
 
비숍의 여자는 중국 공관에 테러를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게 했다. 중국은 그녀를 수배해왔고 제3국에서 적법하지 않은 방식이긴 하였으나 그녀를 체포해 구속하는 데 성공한다. 비숍은 그녀를 구하겠다며 중국에 몰래 입국해 죄수를 빼내려하지만 실패한다. CIA 소속인 게 드러나 스파이 혐의로 처형까지 당할 처지에 놓인다.
 
그럼에 영화는 엄연히 중국의 국내법을 어겨 중국 영토 내에 구속된 이들을 군을 동원해 빼내는 이야기다. 감옥을 깨는 과정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를 냈을 것이 뻔한 일이다. 만약 중국이 미국을 배경으로 이와 같은 영화를 찍었다면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를 생각한다.
 
국가가 타국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하는 건 주권국가의 전쟁 개전권을 금지한 1928년 미국과 프랑스 간 협약 이후 국제법상 범죄행위로 받아들여져 왔다. 협약 체결 뒤 이를 강제할 조직이 없어 문제가 되기는 하였으나 2차 대전 뒤 UN이 창설되며 그 헌장을 통해 이를 명확히 했다. 전쟁이 곧 범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국가의 무력행사를 허용할 때가 있다. UN헌장 제51조가 규정하는 자위권이다. 자국, 혹은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가 무력공격을 당했을 경우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조치를 취할 때까지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조항은 침략을 당한 국가가 방어를 위하여서만 무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스파이 게임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우리는 오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보고 있자면 국제법이 무력함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UN이 창설되고 그 헌장이 제정돼 느슨하나마 구속력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전쟁으로부터 엄청난 손실을 겪은 끝에 인류가 겨우 마련한 대책이며 성과이기 때문이다.
 
<스파이 게임>과 <매버릭>이 너무나 가볍게 무시한 것, 타국의 영토에 군대를 보내어 시설을 부수고 제 목적을 이루는 일은 그저 영화적 쾌감을 자아내기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범죄를 미화하는 일이며, 인류와 역사의 발전에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위 두 영화처럼 기획단계에서부터 논의가 되어 마땅한 문제가 아무렇지 않게 영화화되는 상황은 결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오만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여서 오만이다. 심지어 문제를 알고 나서도 경각심을 갖지 않는 것이 또한 오만이다. 그로부터 적잖은 할리우드 영화가 이와 얼마 다르지 않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저들의 정의로움을 강조하며 타국의 주권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다. 이와 같은 작품이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이와 같은 시각이 보는 이에게 자연스레 내면화된다는 점이다.
 
근 몇 년간 동남아시아며 남미 일대를 무대로 한 몇몇 한국 문화콘텐츠가 해당 국가를 범죄와 부패가 만연하고 법질서가 서지 않은 곳으로 묘사하며, 그들의 주권을 무시하는 묘사를 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만의 전염은 그토록 위험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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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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