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갈매기>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이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랬다. 사랑과 꿈을 좇지만 이상향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잠시 요동치던 날개는 꺾이고 말았다. 김미조 감독은 그런 갈매기의 이야기로부터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렸고 말한다. 자유로운 두 날개를 가졌지만 육지의 곁을 맴돌기만 하는, 결국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오복(정애화 분)은 딸 인애(고서희 분)의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양가의 상견례를 가진 날 밤, 상인회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밤이 새도록 흥겨운 술자리도 가졌다.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셋째 딸 지애(김가빈 분)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아이를 둘이나 낳고 잘 살고 있는 첫째에 이어 인애까지. 세 아이를 번듯하게 키우기 위해 자신의 삶은 묻어둔 채로 참 열심히도 살았다.
이제 막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어둑한 아침, 홀로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는 오복의 모습이 이상하다. 어쩐지 자신의 뒤를 자꾸 돌아보고, 동네 목욕탕에 들러 몸을 깨끗이 씻고, 피 묻은 자신의 속옷을 무심하게 빤다. 가게 문도 열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 영화는 그런 오복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지만 지난 새벽에 어떤 일이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법하다. 영화 <갈매기>는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02.
자신에게 벌어진 부정적인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나이가 적거나 많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일이 자신의 수치심과 연결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연관이 없거나, 그 부끄러움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다.
오복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일어난 성폭행을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삼킨다. 산부인과에서 검사받는 일도 혼자 감내하고, 멈추지 않는 하혈의 자국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감춘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밤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자신을 더럽힌 기택(김병춘 분)의 가게 수조에 소주병을 던져 깨보기도 하지만 그날밤의 사건은 여전히 살아남아 곁을 맴돈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기분.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은 그저 지난밤의 숙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잔소리를 해온다.
그녀가 이렇게 홀로 속앓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해자인 기택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시장 사람들과 떠들고 웃으며 하루를 보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 심지어는 오복의 집으로 전복과 문어를 한 상자 들고 나타나기까지 한다. 자신의 잘못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오복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지난 밤의 일을 떠벌렸는지 감시라도 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