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연출한 유지영 감독.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연출한 유지영 감독. ⓒ (주)디오시네마

   
첫 장편 영화 이후 약 5년만에 내놓은 장편 또한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녹진하게 녹아있다. 2018년 발표한 <수성못>이 인생 목표를 향해 가다 좌절당한 뒤 방향타를 잃은 한 청년을 다뤘다면 오는 15일 개봉하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전도유망한 한 작가가 임신과 출산 이후 글 작업과 인간관계 전방에서 혼돈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다. 이 두 작품을 연출한 유지영 감독을 7일 서울 합정동 인근에서 만났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임신을 원치 않던 비혼주의자 재이(한해인)가 임신한 뒤 더욱 자신의 글에 집착하는 과정을 남자친구 건우(이한주)의 헌신과 희생에 빗대는 방식을 취했다. 나름 능력을 인정받는 영어학원 강사였던 건우는 재이의 출산을 독려하며 지지를 약속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문제들로 지치고 만다. 결국 건우는 서로에게 비극일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되고, 이들을 두고 카메라는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부터 알아야"
 
주인공 재이의 정서는 감독이 경험한 20대 후반부터 30대 초중반의 그것과 상통한다. 첫 작품 이후 좀처럼 글을 쓰지 않던 때에 깊어졌던 고민을 다루게 됐다고 한다.
 
"30대 초중반까지 내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시기였다. 겉으론 멀쩡해 보였지만, 누군가와 함께 지내면서 내 삶의 리듬이나 균형감을 지키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혼자였다면 하고 싶은 걸 허락받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데, 난 나로서 살고 있는 건지 문득문득 의문이 들던 때였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행동하면 상대방이 희생하게 되고, 그러면 내가 죄책감이 들더라. 반대로 내가 희생 좀 해서 맞춰가면 내가 곪아가더라. 가족이든 남자친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곤 했다."
 
영화 속 재이가 작가의 정체성, 절정에 올랐을 때의 감각을 유지하고 싶어했듯 유지영 감독은 그 시기에 자신의 고유성에 천착하고 있었다. "둘이 혹은 여럿이 함께 지낼 때도 나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며 "그래서 건우 같은 캐릭터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했다. 즉, 재이는 건우를 통해 개성과 성격이 드러나며, 건우 또한 재이를 통해 그 비극성이 강화되는 식이다.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한 장면.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한 장면. ⓒ (주)디오시네마

 

"어떤 관객분이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건우는 재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재이는 정작 건우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니냐고. 영화에서 재이는 아이를 안 낳고 싶어 했는데 건우가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다. 그때 재이가 자신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으면 관계를 끝내자 했으면 됐을 텐데, 바로 출산 장면으로 넘어갔다. 그건 건우와 쭉 삶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건우를 사랑하지만 재이는 자신이 만족할 글을 쓰고 싶은 타고난 작가였다. 근데 건우는 안정감이 중요한 사람이었지. 재이의 예민한 기질을 견딜수록 건우 또한 더 안정과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고자 했다. 거기서 마찰이 생긴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혹자는 건우의 헌신을 보며 재이가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영화 속 재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기적이면 안 되나요?'라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타인이 좀 불편하게 느끼더라도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게 이기적인 건지 묻고 싶다. 어렸을 때 명절날 시골에 내려가기 싫어하면 명절인데 안 가는 사람이 어딨냐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욕망이 거세당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삐딱하게 묻고 싶었다. 이기적이면 안 되는지, 당신도 그렇게 하길 바란다고. 여기엔 전제 조건이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다. 제가 글을 쓸 때도 이 정도의 시간은 꼭 필요해라고 말했다면 상대는 존중했을 것이다.
 
사실 영화를 다 찍고 걱정이 생긴 게 홀로서기에 실패한 커플을 제외하곤 다 허구인데 혹시나 저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을까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은 게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제 안의 기억을 통해 만든 것이기에 그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작가성을 발휘하다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글쓰기에 집착했던 재이는 유지영 감독의 오랜 습관과도 연결돼있다. 최초의 글쓰기를 초등학생 시절 써온 일기라고 말한 그는 사춘기를 지내며 쌓아온 특유의 감수성을 언급했다.
 
"중학교 입학해서는 친구 사귀기는 걸 좀 어려워했다. 대신 책을 많이 읽었고, 이모가 문학 선생님이셨는데 이해하지도 못하는 시집을 읽곤 했다.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와서 모니터 앞에 앉아 뭐든 썼다. 소설인 적도 있었고, 나의 개똥철학을 담은 에세이인 적도 있었다. 음악을 듣다가 가사나 시를 쓴 적도 있다. 그게 대학 때까지 이어졌다. 영상 문학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조별로 단편 하나 만드는 게 과제였다. 다들 의욕이 없길래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다. 제가 음악을 들으면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거든. 그래서 미대를 간 것도 있는데 영화는 음악도 들어가고 이미지도 들어가니 내 창작욕을 다 채울 수 있는 훌륭한 것이더라.
 
20대 후반까진 예술가를 낭만적으로 생각했고, 영화는 제게 숭고한 것이었다. 연애도 사치였다. 지인이 절 보고 스스로 너무 몰아붙인다고 할 정도였다. 근데 전 세상에 영화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데 타협하고 대충할 거면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피카소 등 그 시대 예술가들이 생활고를 겪을 때도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잖나.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제 명함에 담긴 그림이 세잔의 그림인데 그것을 위해 몇천 번을 그렸다더라. 서른쯤 되니 영화를 빼면 내 삶은 텅 비었더라. 허무함이 들었다.
 
영화 작업이 너무 안 되어서 결국 영화일을 못하면 무얼 하며 살지 생각하니 굉장히 공포스럽더라. 창작하는 사람의 삶을 뒤늦게 고민하기 시작한 셈이다. 인간관계 고민도 늘었고, 연애도 하기 시작했다. 타인들이 주는 기쁨도 알게 됐는데 또 뒤이어 시간을 뺏긴 게 아닐지 허무함도 들더라. 20대엔 제 생각대로 가는 불도저였다면, 30대 중후반부턴 흔들리며 가는 사람이 됐다."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연출한 유지영 감독.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연출한 유지영 감독. ⓒ (주)디오시네마

 

치열하게 자신의 족적과 이기심을 탐구해 온 유지영 감독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그의 20대와 30대가 녹아든 <수성못> 희정과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재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겨달란 거였다.
 
"희정아, 이제 30대가 되었겠구나. 지금쯤 네가 원하는 꿈을 찾았니?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조금은 알게 되었니? 아직도 화가 많이 나니? 화가 나더라도, 매일 힘들더라도 그날에 해야 할 너의 일을 안 하면 10년, 그 이상이 지났을 때 후회할 거야. 더 늦기 전에 너의 일을 해내길.
 
재이야 너를 연기한 한해인 배우가 서핑을 하기에 생각난 건데, 그때는 네가 파도에 이리저리 치였다면 이젠 막 보드 위에 올라갔으니 중심 잡는 연습을 했으면 해. 삶이라는 게 파도처럼 자연이 가지고 있는 리듬이니 거기에 몸을 맡기되, 인간으로서 너의 중심을 잡아서 꼭 좋은 서퍼가 됐으면 한다. 어느 정도 파도를 가지고 놀 수 있게 됐을 때즈음 네 옆에 그 사람이 꼭 함께하길."
나의피투성이연인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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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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