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의 주역들.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의 주역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배우 배우경, 위다은, 김지원, 김영민. ⓒ 정재필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필름이 사라지고 대본만 겨우 전해지던 영화가 새로운 옷을 입고 관객과 만나는 중이다. 노필 감독, 배우 신영균,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던 <붉은 장미의 추억>(1962)은 '낭독극'과 영화적 요소를 더한 결과물로 재탄생했다. 단 하루의 촬영, 배우들은 일인다역을 하거나 현장 일을 거들며 영화에 스며들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사내와 실종된 부친의 행방을 쫓는 여가수의 사랑 이야기. <붉은 장미의 추억>은 지금 분류로 치면 막장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본인이 원하던 예술영화를 제쳐두고 통속극을 찍어야 했던 청년 노필 감독을 떠올려 보면 단순하게 치부할 작품은 아니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중랑문화재단의 협업 프로젝트로 서른여덟이란 나이에 요절한 감독의 흔적을 발견하는 의의가 있다. 마침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5일 오후 서울 노원 더숲아트시네마에서 김영민, 김지원, 배우경, 위다은 등 네 명의 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
 
"예술가들 더는 상처받지 않길"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 김영민은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기도 하다. 그의 참여로 해당 프로젝트가 대외적 홍보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는 평에 그는 "다 된 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라며 짐짓 민망해했다.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오프리밋> 등으로 활동해 온 김지원은 극중 아나운서와 송정자 역할을 병행하며 무게감을 더했다. 배우경 또한 박 변호사와 이 지배인을 연기해 주인공들에게 시련 혹은 조력이 되었고, 위다은은 실제로 이번 영화 조연출을 의뢰받았다가, 극중 조연출 역할로 출연해 현실과 과거를 잇는 가교가 됐다. 일종의 극 속의 극 형식인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캐릭터였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제가 유령(장국영) 역할로 찬실이를 위로하는 존재였잖나. 이번 작품에선 노필 감독의 현신이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배우들과 현장을 바라보나 생각하며, 자연인 김영민 또한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영민)
 
배우들은 공통으로 사라졌던 영화를 새롭게 재탄생시켰다는 데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를 두고 국내 1세대 영화 평론가 김종원은 영화계에 새 역사를 썼다고 평하기도 했다.
 
"제가 올해로 스물아홉인데 1960년대 영화를 볼 기회가 없기도 했고, 이번 작업이 아니었다면 영화 작업은 전혀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으로 난생처음 영화제 레드카펫도 밟아보게 됐다. 문삼화 연출님(본래 <붉은 장미의 추억> 낭독극 버전을 연출했다. 백재호 감독이 이를 영화화시킨 것, 기자 주)의 제안에 생소하기도 했는데 극장 객석에서 관객분들과 같이 영화를 보니 참 묘하더라.
 
이 영화를 할머니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굉장히 솔직하신 분이라 제 공연이 재미없으면 표정이 안 좋으시다(웃음). 근데 이번엔 영화를 보시고 로비에 한참을 앉아 계시더라. '그 한복 입은 배우(김지원)가 잘하더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제겐 아주 소중한 표현이었다. 노원 복지회관에서 어르신들을 모신 대관 행사를 한다는데 실제로 당시 이 영화를 보신 분도 계실까 내심 기대도 하고 있다." (위다은)

 
이 작품 직전 배우경은 국립극단 시즌 단원 오디션에 떨어져 낙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당시 심사위원이 문삼화 연출이었고, 그에게 이번 작품 출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역시나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진 않지만, 이렇게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배우경이 말했다.
 
이는 원작 영화 감독인 노필의 생애와도 맞닿아 있다. 스물셋에 데뷔작 <안창남 비행사>를 내놓은 그는 생계가 어려워지자 사재를 털거나 돈을 빌려 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결국 빚더미에 올라 서른여덟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를 연기한 김영민은 영화 말미 대본에 없던 대사를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내뱉는다. 좌충우돌하며 낭독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향해 '고맙소'라고 한 것.
 
"사실 이런 이야기는 꺼내기 조심스러운데, 예술인들이 창작하면서 마음을 다치는 경험을 다들 하잖나. 예술을 하기 때문에 겪는 문제들이 있다. 시스템 문제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자기 인생을 바쳐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작품으로 60년 전을 추억하는 게 노필 감독님 입장에서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민)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의 주역들.

"이 영화를 할머니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영화를 보시고 로비에 한참을 앉아 계시더라. '그 한복 입은 배우(김지원)가 잘하더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제겐 아주 소중한 표현이었다." ⓒ 정재필

 
소름 돋는 연결고리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에 참여한 배우들이 저마다 노필 감독이든 작품 관련이든 하나씩 연결 고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 김지미가 연기한 현주 역을 맡은 배우 유다온의 실명이 현주였다. 연극 <검정고무신>에 출연한 배우경은 해당 무대에서 안창남 비행사가 등장하는 노래('안창남과 엄복동')를 부르기도 했다.
 
"제가 음치라 노래를 안 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무대에서 완창했다. 그러고 나서 이 작품을 만나니 기분이 묘하더라. 선배 배우들이 항상 연극인은 시대의 얼굴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배우경)
 
"유다온 배우가 1960년대 말투를 위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계속 들었듯 저도 유튜브로 1960년대 영화를 밤새 재생시켜 놓았다. <대한늬우스>도 많이 보고(웃음). 원작 영화에 출연하신 분들 보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선배 배우들 이름이 보이잖나. 개인적 인연은 없지만, 그분들의 길을 이어서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입은 한복도 돌아가신 배우 윤소정 선생님이 후배들을 위해 남기신 것 중 하나다. 극단에서 챙겨놓고 있던 거였지. 이처럼 과거와 지금의 묘하게 이어지고 있다. 저 또한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한다." (김지원)

 
"김지원 선배님 한복이 엄청 얇았다. 당시 무대가 용마폭포공원 무대였고, 보시면 알겠지만 폭포수 습기 때문에 대본 종이가 젖어가고 있었다. 10월이었는데 날도 엄청 추웠다. 저는 나름 보온이 되는 터틀넥을 입고 있어서 힘든 티를 내지 말아야지 생각 중이었는데 정작 김영민 선배께서는 그 추운 날 본인 촬영이 아닌데도 주변을 계속 맴돌고 계시더라. 제가 조연출이기도 해서 차에 들어가 계시라고 했는데 아니라고 부르면 들리는 곳에 있겠다고 하셨다. 그 모습이 마치 노필 감독님 같았다. 저도 선배님 같은 모습을 보이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위다은)
 
낭독 대사가 있는 배우들이 말투를 연구할 때 위다은은 폴리 아티스트 역할도 해야했다. 극중 들어갈 효과음들을 여러 소도구를 이용해 만들어 내는 일이다. "집에서 비닐봉지 같은 것들을 활용하거나, 유튜브를 보며 소리를 연구했다"며 "김지원 선배님이 큰 박스에 이것저것 소품을 가져오시고 아이디어도 주셨다. 선배님 덕에 해낼 수 있었다"고 웃어 보였다.
 
진심과 열정을 꾹꾹 눌러담은 결과물이다. 현재 <붉은 장미의 추억>은 기존 배급망이 아닌 제작진이 직접 개별 극장을 접촉해 영화를 상영하는 순차 개봉 방식을 택했다. 일종의 대안 배급인 셈이다. 배우들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갔으면 좋겠는지 물었다.
 
"이때 통속극을 보면 막장 드라마의 원조라고들 하는데 제 생각엔 요즘 사람들이 당시 행동을 하면 막장처럼 되지만, 그땐 휴전 직후라 사람들 일부가 총기를 갖고 있기도 했다. 시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도 있다.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막장이라기 보단 현실감 있는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바라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배우경)
 
"요즘 드라마가 너무 수위가 높아지니까 처음 이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더라(웃음). 지금 기준에선 귀여운 막장 정도랄까. 가족애도 있고, 볼거리가 참 많다." (김지원)
 
"저와 김지원 배우를 제외하고 극단 뚱딴지 소속 배우들이 참여했다. 이 극단의 또다른 낭독극도 무대에 올랐는데, 노하우가 많다고 느껴진다. 좋은 배우들이 자신의 장점을 십분 꺼내보인다. 문삼화 연출님이 알맞게 잘 조절하시더라. 이번 영화 작업이 단 하루 촬영이라 힘든 순간이 많았을 텐데 지원 배우가 딱 버텨줬고, 배우들도 파이팅 넘쳤다. 극단의 아름다운 마음이 녹아있다." (김영민)
 
"그때 서리가 장난 아니었다. 촬영 중 신발은 이미 다 젖었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촬영한 게 아니라 공원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도중에 개 짖는 소리도 많이 나고(웃음). 이 와중에 문삼화 연출님이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 문을 열어주셨다." (위다은)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의 주역들.

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의 주역들 . 왼쪽부터 배우경, 김영민, 김지원, 위다은. ⓒ 정재필

 
지속할 수 있는 힘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끝내 스스로 창작의 삶을 중단해야 했던 노필 감독은 영화에서 배우들 주변에 남아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이십 수년 넘게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네 사람에게 연기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물었다.

"요즘 다른 예술 분야에서 힘을 얻는다. 엊그제 본 극단 뚱딴지의 낭독공연도 그렇고, 종묘제례를 얼마 전 봤는데 조선 시대 사람들이 악기를 두드렸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음악이든 미술이든 연극이든 비슷한 무언가가 있구나 느꼈다. 과거에 제가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 적 있는 것 같다. 실패에 두려움이 있는데 실패해도 괜찮다고. 제 공연에서 단 한 사람만 만족하고 가셔도 성공한 거라고. 그 마음을 떠올리고 있다." (김영민)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되게 많다. 관객, 동료, 가족일 수 있는데 계속 연기하며 드는 생각은 이게 참 재밌는 공부라는 것이다. 재밌기에 계속 할 수 있다. 뭔가 배우는 게 있고 채워지는 게 있다. 동료를 만나 연습하면 재밌고, 관객과 만나면 더 재밌다. 여전히 제겐 공부하는 시간들이다." (김지원)
 
"연기가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기다림을 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다림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배우는 곧 배워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잘 배우고 기다리면 이번처럼 기회가 찾아온다." (배우경)
 
"올해 일인극에 도전했는데 그때 진짜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었다. 근데 관객분들을 만나는 순간 고통이 사라지더라. 결국 연기는 관객과 만나는 순간 완성되는 것 같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연기하는 것 같다." (위다은)
붉은장미의추억 노필 통속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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