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적지 않은 이들이 애를 쓸 법하다. 누군가의 이름이나 유사해 보이는 작업들을 인용해가며 해당 영화의 질감과 흡사한 느낌 혹은 영향을 받았다는 목록을 언급하려 할 테다. 어떤 이는 홍상수를 거론할 테고, 또 다른 이는 몇몇 유럽예술영화 감독이나 작품의 이름을 기술할 테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감독의 야심은 그런 인용을 위해 호출되는 이름 혹은 제목들보다 훨씬 더 원대해 보인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 중 하나였던 이정홍 감독의 <괴인> 이야기다.
 
초보목수 '기홍'의 며칠, 그에게 다가온 별 것 아닌 사건들
 
'기홍'은 목수다. 대충 그의 전사를 추정해보면 회사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프리랜서 목수로 일하는 중이다. 소규모 공사를 발주 받아 주로 개인 영업장 인테리어까지 떠맡는 것으로 보인다. 일감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럭저럭 유지할 정도는 되어 보인다. 고향친구 '경준'을 조수로, 다른 분야는 그때그때 일손을 고용해 감당한다. 우리가 집수리나 개인사업장 신규창업 때 겪게 되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그런 기홍이 요즘 맡고 있는 일은 감성피아노란 이름의 피아노학원 인테리어다. 젊은 원장에게 호감이 가는지 기홍은 사근사근하지만 뭔가 허술하다. '아 이 사람 대인관계, 특히 이성과의 관계에 서툴구나!'하는 게 단박에 드러난다. 하지만 친구임에도 고용관계인 경준이나, 자신이 일시적으로 고용한 일꾼들에겐 허세를 부리거나 위악적으로 대한다. 경준이 그리 해야 되냐고 점잖게 이의를 제기하면 원래 그래야 한다며 자신의 경력을 늘어놓지만 곧바로 돌아오는 친구의 카운터처럼 기홍 역시 아직 이 업계에선 '초짜'에 불과하다. 맡은 일은 그럭저럭 해내지만 기홍의 허술함은 영화 내내 잊을만하면 튀어나온다.
 
감성피아노 공사가 끝나갈 때쯤 기홍은 경준과 술자리를 갖다 그만 귀가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묵살하고 공사 중인 피아노학원 사무실에서 자야 안 늦을 거라고 고집을 피우며 무단침입을 감행한다. 그리고 다음날 공사가 끝나고 기홍은 마음에 들어 하던 원장과의 작별을 아쉬워하지만 상대는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기홍은 마음에 두고 있던 과천의 근사한 전원주택으로 거처를 옮긴다. 집 주인 '정환'은 매일 출근하는 아내 '현정'과 다르게 집에서 늘 빈둥거리는 한량이다. 정환은 무료한 건지 세입자인 기홍을 자주 찾아 술을 먹자고 한다. 상차림 준비를 위해 기홍의 승합차로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가는데 차 지붕에서 물이 콸콸 샌다. 이상한 나머지 블랙박스를 찾아보니 차 지붕에 사람이 떨어진 것을 발견한다. 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정환은 시간 때울 거리를 찾았다는 듯 탐정놀이에 매진하며 기홍에게 뭐 수상한 일 없냐고 탐문한다.
 
그러고 보니 블랙박스 속 영상의 장소가 낯익어 보인다. 경준에게 확인해 보니 자신이 감성피아노 내에서 무단으로 일박한 바로 그 날이다. 하지만 조사를 위해 학원에 방문해 자꾸 성가시게 하니 학원장은 영 불편하게 대한다. 끝내 밤에 몰래 숙박을 했다는 게 들켜서 오히려 역정만 듣는다. 그럼에도 정환의 제안으로 미심쩍은 점을 확인하던 중 마침내 현장에서 단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우연히 범인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오디세이아>, <율리시즈>,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괴인>
 
"괴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괴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일어나곤 하는 소소한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다. 무엇보다 <괴인>의 결정적 요소는 '기홍'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존재감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존재감의 소유자들은 아니다. 좀 유별나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종종 마주칠 법한 이들을 형상화한 정도에 불과하다. 주인공이라 할 기홍은 좀 비호감에다 사회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큰 문제는 없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 인물들도 내 가족이거나 살면서 밀접하게 엮일 관계가 아니라면 그저 이웃 혹은 지인으로 스쳐 지나가는데 별 문제 없을 유형이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들을 조합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연속으로 장편영화, 그것도 136분을 끌어간다? 이건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 되기에 충분한 위험수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제목처럼 이 영화는 투자자라면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 될 만큼 아찔하게 그런 모험에 과감히 달려든다.
 
물론 대책 없이 뛰어든 건 아니다. 감독과 제작진은 확신을 갖고 도전했을 게 분명하다. 그 확신의 발로가 이 영화를 목격한 이들에게는 기이한, 또는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혹은 호롱불 역할을 톡톡히 도맡아준다. 대체 이 영화의 '괴력'은 무엇이기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이 기이한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적지 않은 이들이 고심해 예시 혹은 '레퍼런스'를 호출할 테지만,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물론 정독에는 실패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수행한 과업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서구 대중문화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가진 위상과 상징을 조각조각 해체한 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으로 재구성해낸 것의 의미와 <괴인>이 펼쳐 보이려 한 풍경의 의도가 '통'하는 게 아닐까 하는 몽상에 가까운 것은 맞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 1922년에 조이스가 1904년 6월 16일, 훗날 아일랜드의 수도가 된 당시 대영제국 령 더블린의 평범한 중년남자 레오폴드 블룸의 하루는 21세기 초반 한국에서 주인공 기홍의 며칠로 각색된 것처럼 다가온다. 기홍은 <율리시즈> 서사시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보다는 오히려 그를 초반에 괴롭혔던 거인 폴리페모스의 영락한 후예처럼 보인다. 그런 차원에서 이미지 적용 측면으로 보면 역시 <오디세이아>를 20세기 중반 미국 남부로 옮겨 재구성한 코엔 형제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2000)의 연출과도 비교해볼 만하다(그 영화에선 존 굿맨이 주인공 일행을 가로막는 현대의 폴리페모스 거인을 연기한 바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가 판타지를 가미한 코미디 형태로 <오디세이아>를 각색했다면, <괴인>은 근현대 '모더니즘' 사조의 한 상징이기도 한 제임스 조이스의 방식으로 변용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정도의 갈래로 구별된다. 서양문화에서 대표적인 고전 반열에 속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재해석하는 건 그저 설정 차용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상당한 각오와 원작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는 과제다. 그만큼 자신감과 파격이 필요한 숙제다. 그래서 <괴인>의 도전이 혹여나 조이스와 닿아 있다면 그만큼 그 영화를 만든 이들의 도전이 비범한 시도라는 증명이기도 할 테다.
 
10년간 진행된 오디세우스의 방랑을 조이스는 단 하루 동안 풀어내버린다. 하지만 원작의 주요 캐릭터들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여정 역시 기본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다만 배경만 바뀌고 접근방식만 다를 법이다. 상상하긴 쉽지만 구현하기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닌 도전방식이다. 물론 <괴인>이 난이도로 악명 높은 조이스의 소설을 배경만 한국으로 옮긴 형태는 아니다. <괴인>의 경우엔 좀 더 '기홍'이라는 현대 판 폴리페모스가 주인공이 된 '외전' 형태에 가까워 보이는 접근이다. 이 영락한 폴리페모스가 2020년대 한국에서 애환을 겪으며 살던 중 며칠간 벌어지는 그의 모험담을 풀어내려는 시도라 하겠다.
 
관객의 속물적 기대치를 사뿐히 '즈려밟는' 괴력의 영화
 
"괴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괴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필자의 제멋대로 억측에 의한 꿈보다 해몽으로 대강 본 영화는 그랬다. <괴인>의 메인 포스터에서 주인공이 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안경도 외눈은 아니지만 마치 고대 그리스 유적 속 벽화의 어설픈 비례 속 인물 형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대체 그럼 <괴인> 속 기홍과 주변 인물들이 영화 속 세계에서 며칠간 무슨 사고를 치는 걸까? 별 특별한 건 없다. 기홍은 감성피아노 공사 종료 후 새 일감을 열심히 찾지만 개점휴업 상태다. 경준은 일이 없자 고향으로 내려가며 퇴장한다. 그의 역할은 기홍이라는 캐릭터의 실체를 관객에게 해설하는 음유시인에 가까워 보인다(다른 주요 배역이 비전문 연기자인데 비해 유일하게 '경준'만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라는 차별점도 있다).
 
그리고 서서히 집주인 정환과 그의 아내 현정, 그리고 기이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하나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기홍이 그들과 맺는 관계는 어느 하나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기홍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행동 패턴은 소소한 일상 속 사건의 전개에서 전반부는 그런 관행적 기대치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후반부가 되면 그런 관객의 점쟁이 행세를 놀려먹듯 교묘하게 비틀어버린다.
 
번번이 예측을 어긋나는 상황 전개에 관객은 당혹스러워할 테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거듭 중첩되면 점점 어안이 벙벙해질지도 모른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겼지만 지나고 나니 '펀치 드렁크'에 빠지듯 타격감이 심상찮다. 우리의 속물적 감정은 기홍이 이제 무슨 사고를 칠까 조마조마한 심정, 혹은 관음증 적 시선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지만 그때마다 기홍은 슬그머니 빠져나와 도망쳐 버린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이 저지를 실수와 사고를 기대하다 아이러니에 처하는 셈이다. 그 밸런스와 균형감에 슬슬 약이 오를 지경이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어느새 영화 속 현실로 빨려 들어버리는 감각을 발견한다. 타인의 약점을 발견하면 물고 뜯는 게 생존을 위해 당연하고 정당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냉혹한 시대다. 영화 속에서 그런 속물 캐릭터로만 보였던 기홍과 주변 인물들의 태도는 하지만 너무나 배려와 연민이 가득한 느낌이다. 그러하기에 그 틈새에서 오는 당혹감이 어느 순간부터 흥미로운 성찰로 전환되고 만다. 어디까지 감독이 의도한 노림수인 걸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고, 전설의 해석은 열려 있으니
 
"괴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괴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 전반부의 기홍은 악인은 아니지만 비 호감 캐릭터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이성에 끌리지만 너무나 수가 얄팍하고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놓일 만큼 불순한 의도도 엿보인다. 하지만 소심해서 큰 사고를 칠 위인도 못된다. 하지만 타인의 호의나 충고를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속으로는 신경이 쓰여 안절부절 못하는 존재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면모가 보이지만 어디 영화 속 기홍만 그럴까? 우리는 과연 얼마나 강-강, 약-약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다.
 
경준은 번듯한 전원주택에서 부가티 바이크를 몰며 한량으로 지내지만 세입자나 곤란한 처지에 놓인 상대를 착취하거나 깔보는 한국사회 부유층 행태와는 무관하다. 그의 아내 현정 역시 그렇다. 그들의 일상에 어느 순간 들어온 하나 역시 그가 가진 상황 조건이라면 으레 연상되는 캐릭터와는 차별화되는 존재다. 그런 인물들의 조합은 기이한 화학적 결합으로 영화 후반부를 채운다.
 
영화는 전반부는 기홍의 '괴이'한 면모에 대해 풀어내고 중반부에선 그런 기홍의 색다른 면모가 확인되면서 우리의 편견을 질타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마지막 밤과 새벽에는 그런 상황을 재정립하는데 어떤 단정적 정보나 해설도 추가되지 않기에 관객은 그저 인물들이 선보이는 표정이나 행동 몇 가지를 조합해 각자의 결말을 재조합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초반에 관객이 기홍에 대해, 그리고 중반부 이후 등장한 경준이나 현정 캐릭터에 대해 품고 있던 관습적 편견이 실제로 들어맞을 수도, 혹은 우리가 일상에서라면 쉽게 택하기 어렵지만 어디인가에선 가능할 법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전설은 윤색되고 여러 개의 결말로 전승되기 마련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역시 수많은 외전과 상이한 결말이 알려져 있다. 시대에 따라, 관점에 따라 재해석은 광대무변한 변주를 거듭할 운명이다. 이 영화의 너무나 모호하기에 더 뇌리에 박히는 결말부가 만약 그런 점까지 고려한 결과라면 머리가 아찔해진다. 추정이 다 들어맞는 경우라면, 영화 속 주인공 기홍이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진정으로 '괴인'일 테다.
 
<작품정보>
 
괴인 a Wild Roomer
2022|한국|드라마
2023.11.08. 개봉|136분|15세 관람가
감독 이정홍
출연 박기홍(기홍 역), 최경준(경준 역), 이소정(아영 역),
안주민(정환 역), 이기쁨(하나 역), 전길(현정 역)
제작 영화 <괴인> 제작위원회
제공 다림질스튜디오
투자/배급 ㈜영화사 진진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넷팩상/KBS독립영화상/크리틱b상
2022 48회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2023 11회 무주산골영화제 감독상/영화평론가상
2023 70회 시드니영화제 장편 영화 부문
2023 17회 파이브플레이버스아시아영화제 뉴 아시안 시네마 부문
2023 20회 홍콩아시안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
2023 25회 타이베이영화제 아시안 프리즘 부문
2023 1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어반 스케이프 부문

 
괴인 이정홍감독 박기홍 안주민 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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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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