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풍자로 가득하다. 젠더의 신경질적인 충돌, 돈이 만든 새로운 신분의 '부자'들이 유람선에서 벌이는 온갖 역겨운 작태, 그리고 돌연한 사고로 유람선이 침몰해 도착한 섬에서 벌어지는 계급의 역전까지, 영화는 블랙 코미디로 작정하고 위선을 폭로한다.
 
칼(해리스 딕킨슨)은 모델이다. 여친 야야(찰비 딘크릭)도 모델인데 칼보다 상위 레벨이다. 당연히 더 번다. 칼은 자신보다 더 버는 야야가 저녁 식사비를 자신에게 미루는 것이 짜증난다. 그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야야의 태도를 문제 삼지만 실은 돈(데이트 비용)이 문제다. 야야가 여성성을 활용해 데이트 비용을 회피해온 건 얄밉지만, 그렇다고 칼이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야야를 비난하는 것도 허위이다. 그는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력자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기꺼이 상납했으니 말이다.
 
야야는 모델이자 인플루언서다. SNS로 자신의 신상(소비행태)을 기꺼이 공개하고 '좋아요'를 받아 돈을 번다. 광고와 협찬을 받아 소비를 전시하고, 팔로워에게 '너희도 이것을 쓰고 나처럼 되라'고 욕망을 부추기는 게 일이다. 야야와 칼이 승선한 호화 유람선도 제공받은 협찬이다. 배 위에서 찰칵찰칵 찍힌 '부캐'는 무엇 하나 진짜가 아니지만, 보는 이들은 고급 유람선에 올라 즐길 수 있는 그의 '가짜'를 욕망하게 된다. 디지털의 노예가 된 세상에서 이미지가 삶을 대체해 버렸다.
 
부자들이 유람선에서 벌이는 일도 위선으로 가득하다. "똥의 왕"이라는 러시아 부자는 첩과 부인을 동반하고 승선했다. 두 여자는 남자의 재산을 적당히 나누어 누리는 것에 동의했는지 갈등이 없다. 대신 갈등 없음을 갑질로 해소한다. 승무원의 의사를 배제한 평등한 즐거움을 위해, 승무원은 들어가기 싫은 스파 욕조에 몸을 담가야 하거나 바다로 향한 고무 미끄럼틀을 타고 짠물에 입수해야 한다. 을은 갑의 자기 과시와 보는 즐거움을 위해 연기까지 해내야 한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부자의 자부심에 이르러선 이들의 허위가 사악하기까지 하다. 수류탄과 지뢰를 만들어 부를 이루고 잘 먹고 잘 살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산품으로 죽어갔을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악마적 도취감. 오펜하이머의 고뇌가 무색하다. 이들의 몰염치는 자신의 생산품으로 해를 당하는 설정으로 보는 이의 분노를 해소시키지만, 지뢰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삶은 일회성 복수로 회복되지 않는다. 한국도 전쟁을 치르며 한반도에 매설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뢰로 피해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지뢰 등으로 잃어버린 신체는 이제 이념의 갈등뿐 아니라 부자들의 돈벌이에 동원되었음을 상기하게 만든다.
 
유람선에서 부자는 누리고 가난한 승무원은 빡세게 일한다. 승무원들은 부자들의 팁을 얻기 위해 간이라도 빼줄 서비스를 제공한다. 승무원도 다 같은 승무원이 아니다. 계급 내 차이는 더 명확하다. 알코올 중독인 선장을 위시해 백인 승무원은 서비스 관리직에 배치되어 지시를 내리고, 유색인종 노동자는 엔진실이나 식당, 객실에서 눈에 띄지 않게 일한다. 피부색이 곧 계급이 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유람선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계속 호화로울 것 같던 유람선이 거친 파도에 흔들리기 시작할 즈음 균열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먹어도 먹어도 값비싼 음식들이 끝없이 서비스되고 부자 승객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멀미를 시작한다. 한껏 고가의 장신구와 옷으로 멋을 냈지만, 계속 먹으라는 승무원의 권유로 억지로 삼킨 술과 음식이 마침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토사물은 마치 부자들의 내면에 썩고 있던 위선의 축적물처럼 더럽고 역겹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음식을 먹고 토하기 시작한 승객들이 각자의 방에서 변기를 붙들고 마저 남은 위선과 오만의 찌꺼기를 위로 아래로 쏟아내는 동안, 청소 노동자들은 부자들이 쏟아낸 토사물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부자가 싼 똥을 가난한 사람이 치워야 하는 자본주의 부조리는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쏟아진 오물에 부자들의 몸이 뒤범벅이 되고서야 고약한 카타르시스에 도달한다.
 
부자들을 혼내려는 기후의 복수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자들이 오물과 한몸이 되어 엉겨있을 때 저 멀리 해적으로 보이는 일당이 승선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재난 극복이 주제가 아닌 영화는 과정을 생략하고 난파된 유람선에서 겨우 살아나 섬에 떠밀려온 생존자들의 허위로 옮아간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무인도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원시로 돌아가기밖에 없다. 재난이 우연한 혁명을 일으켰다. 무인도에서 돈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인도에서 돈으로 갑질할 방도가 없으니 억지 평등이 왔다. 이도 잠시, 원시 삶에서 필수인 불 피우기와 짐승 사냥이나 물고기 잡기에 능하지 못한 사람들은 저 계급으로 전락한다. 이곳에서 캡틴은 부자나 백인 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이를 척척해낼 사람이다. 부자들이 게워낸 토사물을 치우던 가장 밑바닥 청소노동자인 아비게일(돌리 드레옹)이 바로 그 능력자다.
 
그는 영리하다. 생존자들의 무능을 간파하고 상황을 장악한다. 자신이 대장임을 숙지시키고 복종하게 만든다. 새로운 지배계급의 탄생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무성애자로 여겨지던 중년의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는 자신의 성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취한다. 물고기를 주고 욕망을 채운다. 젠더의 전복이다.
 
하대 받던 유색인종 아줌마 청소 노동자의 계급 상승은 일면 매우 통쾌하다. 권력자인 백인과 남자들을 길들여 "모계사회를 구성"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의 계급 상승은 임시적이고 위태롭다. 마침내 야야가 발견한 문명사회로 복귀할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험당하고 마는 허약한 위치인 것이다. 돈이 위세를 떨칠 수 없는 곳에서는 기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선 다시 지긋지긋한 백인들의 노예로 돌아가야 하는 취약함 말이다. 난생처음 느껴본 인종적 우월감과 효능감의 상실을 목전에 둔 그에게 백인성을 버리지 못한 야야는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낸다. 문명의 문 앞에서 백인 차별주의자의 본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재난의 위기는 인간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잠깐 생각해 본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상승된 신분을 수호하도록 행동할까? 아니면 무인도에서 불 피우고 고기 잡는 것도 고된 일이니 다시 백인의 하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까? 잠깐의 짜릿한 계급 상승은 어쩌면 아비게일의 나머지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지도 모르겠다. 문명이 소거된 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빼앗겨 왔는지를 명백히 깨달았을 테니 말이다.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상처와 분노를 남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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