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개막한 한국 남자프로농구가 초반 의외의 흥행몰이를 일으키고 있다. 10월 24일 개막한 2023-24시즌 정관장 프로농구(KBL)는 주말 6경기에서 총 3만 437명의 관중을 동원한 것으로 집계됐다. 평균 5.073명으로 2017~2018시즌(5105명) 이후 6년 만에 개막 주간 최다 관중이며 역대로는 4위에 해당한다.
 
관중몰이의 비결은 스타 선수들의 이적과 연고지 이전, 새로운 라이벌 구도의 등장 등으로 풍부해진 화제성이 꼽힌다. 지난 여름 프로농구는 오세근, 문성곤, 최준용, 양홍석 등 스타급 선수들의 자리 이동이 잇달았다. KCC는 22년 만에 전주에서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했으며, 오세근을 영입한 서울 SK와 더불어 '슈퍼 2강'으로 꼽히는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다.

KCC와 SK는 프로농구 전통의 명문이자 인기팀으로 꼽힌다. 허웅과 김선형, 자밀 워니, 알리제 존슨 등 개인기량이 뛰어나고 화제성을 갖춘 스타플레이어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서울을 연고로 한 SK는 지난 시즌에도 평균 관중 3685명을 동원하며 전체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KCC의 새 연고지가 된 부산은 KT가 2020~2021시즌을 끝으로 수원으로 떠난 이후 2년 만에 새로운 농구팀을 맞이하게 됐다. 농구에 목말랐던 팬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22일 삼성과의 시즌 첫 홈 개막전에는 무려 8780명의 관중이 입장하기도 했다. 두 팀은 올시즌 프로농구 패권을 놓고 다툴 유력한 후보로 예상되고 있어서, 두 팀의 성적이 리그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여기에 울산 현대모비스, 수원 KT, 창원 LG 등도 탄탄한 전력을 구축하며 대항마를 노리고 있다. 신생팀 고양 소노는 지난 시즌 사상 초유의 '데이원 사태'와 4강돌풍을 보여준 선수단을 그대로 인수하여 또 하나의 신생팀 신화를 기대하게 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KBL의 흥행 열풍은 반가우면서도 다소 이례적인 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남자농구는 국가대표팀이 출전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7위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에 그쳤다.

프로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대표팀은 일본, 중국, 이란 등이 줄줄이 패배하며 한국농구가 이제는 아시아에서도 2-3류로 전락했다는 자조섞인 평가가 잇달았다. 국제 흐름에서 동떨어진 한국농구의 퇴행과, 후진적인 농구행정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잇달았다. 이는 자연히 시즌 개막을 앞둔 남자 프로농구 흥행에도 악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이번 '항저우 참사'는 KBL의 흥행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KBL은 이미 지난 2022-23 시즌 69만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입장 수익(86억 원)을 경신한 바 있으며, 올시즌에는 지난 시즌을 뛰어넘는 인기몰이도 가능하다는 기대가 나온다.
 
2000년대 중후반 찾아온 한국농구의 침체기 당시, 대표팀이 연이어 국제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듭하면서 KBL 역시 뭇매를 맞으며 흥행에 악재가 되었던 것과는 달라진 분위기다.

이는 10여년 전과 비교하여 스포츠팬들의 여론 정서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스포츠에서의 국제대회를 국위선양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심지어 자국리그보다 국제대회에서의 성과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젊은 팬들을 중심으로 '국제대회는 국제대회고, 프로는 프로'라는 별개의 인식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인식이 강해지는 추세다. 국제대회에서 잘하면 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국리그를 즐기는데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스포츠팬들은 프로스포츠를 단순히 '승부'로서만 집착하고 과몰입하는 것이 넘어서, 하나의 '문화-여가 생활'로서 즐기고 있다. 여기에 몇 년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세계적인 위기를 겪으며 제약받았던 프로스포츠 '직관'의 매력을 즐기고 싶은 팬들의 욕구가 더욱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로야구 KBO리그다. 야구 국가대표팀은 최근 몇 년간 도쿄올림픽과 WBC(월드베이스클래식) 등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올해 초 열린 WBC에서는 한일전 참패와 1라운드 탈락이라는 최악의 참사를 겪으며 한국야구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자연히 올시즌 프로야구 인기에 직격탄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2023시즌 KBO리그는 5년 만에 800만 관중을 돌파하는 엄청난 인기몰이를 이어가며 대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야구인들과 전문가들조차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국내 프로야구는 구단-지역별 팬덤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스타플레이어들, 직관 응원 문화 등 다양한 볼거리-즐길거리가 넘쳐날만큼 기반이 탄탄하다는 게 굳건한 인기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다만 길게 봤을 때 이러한 당장의 관중몰이가 해당 스포츠의 발전에도 궁극적으로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해당 종목의 프로리그가 굳건한 기반 위에서 꾸준하게 인기몰이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호재다. 그러나 인기에 안주하여 변화와 혁신을 외면한다면 오히려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WBC 참사를 겪고난 후, 지난 7월에 리그 흥행에 안주하지않고 한국야구 발전을 위한 중장기 종합 대책인 'KBO 리그·팀 코리아 레벨업 프로젝트'를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는 국가대표팀에서 전임 감독제가 부활하고 상시 소집과 평가전 시행, 리그에서는 피치 클록(투구제한시간)과 연장 승부치기 제도 등의 혁신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개혁 프로젝트의 주요 과제는 국가대표팀 전력 향상, KBO리그 경기 제도 개선, 유망주·지도자 육성 등이며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한국야구의 중흥과 저변 확대라는 방향성으로 이어지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반면 농구계는 항저우 참사 이후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대한민국 농구협회는 대표팀 후임감독, 귀화선수, 차기 국제대회 준비, 스포츠 외교력 재건, 장기적인 대표팀 운영 시스템 등 지난 수년간 거듭되어 온 한국농구의 각종 문제점과 개선안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거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몇몇 국가대표 선수들이 SNS에서 개인적으로 농구계의 변화를 호소하거나, 미디어와 일부 농구팬들이 외부에서 쏟아냈던 비판의 목소리 정도가 전부다. 농구계 내부에서 앞으로 한국농구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야할지 건강한 대안이나 활발한 담론이 부재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로 꼽힌다.

그런데 더 큰 비전이나 변화할 의지가 없는 리그가 과연 발전할 수 있을까. KBL과 농구계가 최근의 반짝 관중몰이를 두고 자칫 팬들이 한국농구의 현실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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