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미의 세계> 포스터.?트윈플러스파트너스
작은 극단에서 연극과 잡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는 수연, 그녀는 밥을 깨작대며 잘 먹지 않고 먹어도 토하기 일쑤다. 거식증이다. 그리고 우울해 보인다. 사연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할머니가 전세를 들어 사는 집이 철거되니 와서 집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영순은 요양병원에 있다고 했다. 수연은 마지못해 통영으로 향한다.
영순은 작가다. 정확히 말해 소설가다. '딸'을 소재로 한 소설이 꽤 히트쳐서 잘 나갔고 덕분에 지금도 대접받고 있는 듯하다. 수연은 영순의 집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향한다. 7년 만에 조우한 할머니와 손녀, 하지만 그들 사이엔 반가움이나 애틋함은커녕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으르렁거림만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할머니와 손녀만 있을 뿐 딸이자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3대의 딸이자 엄마 경미는 오래 전에 집을 나갔다. 영순과 수연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지점은 바로 경미다. 둘 다 경미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영순은 수연 때문에 경미가 이상해졌다고 하고 수연은 영순이 경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경미는 돌아오지 않거나 못할 것 같은데, 그들 사이는 회복될 수 있는 걸까. 결국 변하지 않을 것인가.
불행의 씨앗이자 근원으로서의 가족
영화 <경미의 세계>는 한예종 영상원 출신 구지현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자 고 김미수 배우의 유작이자 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이다. 4년 만에 극장에서 빛을 본 케이스인데, 코로나19로 수많은 상업영화들이 개봉을 연기했던 바 하물며 독립영화는 개봉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을 테다.
영화에는 경미가 거의 또는 아예 나오지 않지만 제목은 당당히 '경미의 세계'다. 집을 나간 후 본 적이 없는 경미를 두고 경미의 엄마 영순과 경미의 딸 수연이 서로 폐부를 찌르는 말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낸다. 그런데 서로의 말이 다르다. 그것도 완전히 다르니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기억을 왜곡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실로 오랜만에 만났지만 할머니와 손녀는 여전히 경미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런데 영순이 하는 말을 듣고 또 그들이 따로 또 같이 하는 행동, 그리고 생김새를 보면 할머니와 손녀는 똑 닮았다. 영순은 말한다. "너 아직도 먹고 토하지? 나는 네가 왜 그러는 줄 안다. 우리 둘은 똑같아. 삶을 자기 손 안에서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 그것 때문에 안 먹능 거잖아. 나만큼 널 잘 아는 사람은 없어." 혈육이기에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일면 소름 끼친다.
가족은 행복의 진원지여야 한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가족이라고 해도 한몸이 아니고 분신도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불행의 씨앗이자 근원이다. 가족이라도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최소한의 거리를 둬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극중에서 영순과 경미와 수연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서로를 위한다며 통제하고 풀어준다며 방관하고 자신이 받은 걸 내리물림하며 학대했다.
혈육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려는 몸부림
수연은 배우지망생으로 작은 극단에서 <밥 먹기 싫어요>라는 아동 그림자극을 한다. 아이라면 마땅히 엄마 말을 잘 듣고 밥을 잘 먹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하필 밥 먹기 싫다는 내용이라니, 수연은 괴리감을 느낀다. 거기에 극단의 다른 연극 <굴레>에 긴급 투입되며 괴리감이 심해진다. 하필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기 힘든 가족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라도 근원적인 의문이 들어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렇게도 경멸하는 할머니와 엄마에게서 왔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어디로 갈지는 스스로 정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마저도 가족, 혈육이라는 굴레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결국 덮쳐오는 혼란을 어쩌지 못하고 스스로를 향해 경멸하게 된다. 경미가 모든 걸 뒤로 하고 집에서 도망친 게 이해된다. 사슬을 끊고 굴레에서 벗어나 관계에서 사라져 나를 되찾기 위함이었을 테다. 다만 <경미의 세계>는 영순이나 수연의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둘이 오랜만에 조우해 현실을 직시했을 뿐이다. 그게 더 현실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하겠지만 마지막까지도 한없이 우울하니 너무 처지는 것 같다.
피해자가 결국 가해자가 되고마는 무한 굴레 이야기와 사슬을 끊고 굴레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한국독립영화계에서 오랫동안 주제로 사용되어 왔다. 이 영화도 그 주제를 가져와 약간의 변주를 넣었다. 하여 신선하다고도 패기 있다고도 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묵직하고 짙은 여운이 오래 그리고 깊이 이어질 것이다. 잠식 당하지 말고 작품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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