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아시안게임 축구가 개막하기 직전만 해도 많은 팬들은 한국의 우승 가능성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선수구성 면에서는 우승을 노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호화전력으로 평가받았지만 '감독 리스크'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황새' 황선홍 24세 이하 축구대표팀 감독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전설이다. 월드컵 본선무대에 4회나 출전했으며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이자 9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군림했다. 지도자로서도 포항의 리그와 FA컵 제패를 이끌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 한동안 내리막길을 걸었다. FC서울에서 성적부진으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사임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연변 푸더-K리그 2부 대전 하나시티즌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연이어 낙마했다.
2021년부터는 23세 이하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처음으로 프로가 아닌 국가대표 지도자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지만, AFC U-23 아시안컵 8강탈락과 한일전 참패, 올해 7월 중국 원정 평가전 강행 논란, 아시안게임 최종엔트리 논란 등으로 부침을 겪었다. 설상가상 지난 지도자 커리어의 흑역사까지 소환되며 황선홍 감독의 리더십을 바라보는 축구팬들의 여론은 갈수록 악화됐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은 황선홍 감독에게는 중간평가의 무대인 동시에 최대의 고비이기도 했다. 만일 우승을 놓친다면 황 감독이 2024 파리올림픽까지 지휘봉을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대회 개막을 앞두고 이강인의 차출 문제와 와일드카드 선발, 정통 스트라이커 부재 등 대표팀 전력을 둘러싼 의구심과 악재들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황선홍 감독의 존재가 대표팀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충격적인 평가까지 나왔다. 황 감독으로서도 어쩌면 이번 아시안게임은, 대표팀 감독직은 물론이고 그동안 쌓아온 축구인생의 명예가 걸린 도전이었다.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반전이 일어났다. 조별리그부터 3전 전승 16득점 무실점이라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두 경기만에 16강진출과 조 1위를 확정했고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득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토너먼트에서도 키르키스스탄전(5-1)을 시작으로 홈팀 중국(2-0), 복병 우즈베키스탄(2-1)에 이어, 지난7일 열린 결승에서는 라이벌 일본(2-1)을 잇달아 격파하며 4전전승 11득점 3실점이라는 완벽한 결과로 우승을 이끌어냈다.
이번 금메달로 한국 축구는 2014년(이광종호), 2018년(김학범호)에 이어 3개 대회 연속 축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이번 항저우 대회 우승은 홈어드밴티지를 안고 있었던 이광종호, 손흥민-황의조-김민재 등 역대급 전력을 구축했던 김학범호보다 내용 면에서도 더 '완벽한 우승'이었다.
황선홍호는 7경기 총 27득점 3실점에 전 경기 멀티골을 기록했다. 대회 전체를 통틀어 상대에게 선제골과 리드를 내준 경우는 단 한번, 일본과의 결승전 전반의 '25분'에 불과했다. 모든 경기에서 상대를 그야말로 압도하는 경기를 펼쳤고, 진지하게 패배를 걱정해야할 정도의 위기 상황은 단 한번도 없었다. 연장전이나 승부차기도 아예 전무하다.
아시안게임을 포함한 한국의 역대 국제대회 도전사를 모두 돌아봐도 이 정도로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우승을 차지한 사례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약 2주전만 해도 '역대 최약체' 소리까지 듣던 황선홍호의 대반전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황선홍 감독 개인에게도 '치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황 감독은 선수 시절 아시안게임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연령제한이 도입되기전 A대표팀이 출전했던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황선홍 감독은 무려 11골(네파런 8골, 오만전 1골, 일본전 2골)을 터뜨리며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득점 기록을 수립했지만, 4강에서 우즈벡에 0-1로 덜미를 잡히고 3.4위전에서는 쿠웨이트에 연패하는 '히로시마 참사'를 겪으며 노메달에 그쳤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29년만에 지도자로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우즈벡에 설욕했고, 결승전에서는 2년전 아시안컵에서 0-3 굴욕을 선사한 일본과도 재회하여 승리하면서 완벽한 한풀이에 성공했다. 돌이켜보면 황선홍 감독은 선수시절에도 '클라이맥스에 강한 남자'였다. 선수시절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에서는 잇단 좌절을 거듭하며 자칫 '비운의 스타'로 끝날 뻔했으나 마지막 국가대표 무대였던 한일월드컵에서 4강신화의 주역으로 부활하며 대반전에 성공한 바 있다.
물론 일각에서는 아시안게임 우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황 감독의 역량에 대한 의구심의 시선도 존재한다. 그 정도로 화려한 선수들을 보유했으면 '당연히' 우승해야하는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물론 한국이 전력상 이번 대회 최강팀이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우수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우승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한 게 바로 축구다.
황 감독의 절친인 홍명보(울산) 감독은 지도자로서 올림픽 동메달까지 따냈지만 정작 아시안게임(2010 광저우 대회 동메달)에서는 우승하지 못했다. 5년 전 김학범호는 손흥민-황의조를 보유하고도 조별리그에서 말레이시아에게 덜미를 잡히기도 했고, 8강에서는 우즈벡과 7골을 주고받으며 연장까지 접전 끝에 기사회생했다.
결과적으로 큰 위기가 없었으니 '쉬운 우승'을 했다는 식의 평가절하는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위기가 없었다는 것은, 황선홍호가 그만큼 철저한 사전 플랜과 준비를 통하여 여러 변수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4강 우즈벡전에서는 상대의 거친 축구에 엄원상이 부상을 당하는 등 돌발상황이 있었고, 결승 일본전에서는 이른 시간에 상대에게 대회 첫 선제골을 내주며 선수들이 당황할수 있었던 분위기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또한 황 감독은 대회 내내 과감한 용병술과 로테이션을 통하여 팀전력을 극대화시켰다. 에이스로 기대했던 이강인이 컨디션 문제로 대회 내내 크게 기여하지 못했고 송민규의 부상과 전문 공격수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8골을 터뜨린 정우영을 비롯하여 내보내는 출전선수마다 고른 활약을 선보이며 불안요소는 크게 두들지지 않았다. 이는 황선홍 감독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높은 팀을 구축했다는 증명이다.
선수들 역시 아시안게임을 당연히 우승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박을 감당하는 게 쉽지않았을 것이다. 와일드카드이자 주장으로서 가장 부담이 컸을 백승호는 우즈벡전 직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을 할지도 궁금하기도 하다. 부디 좀 믿고 응원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언론과 팬들의 거듭된 비판에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모든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3연패라는 대업을 일궈낸 황선홍 감독과 선수단의 성과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명예회복에 성공한 황선홍 감독은 이제 2024 파리올림픽까지 안정적인 리더십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했다. 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전력을 이어갈 수 있다면 올림픽에서의 메달 도전도 꿈이 아니다. 수년간 거듭되던 슬럼프를 비로소 벗어난 황선홍 감독의 지도자 인생 2막도 지금부터 시작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