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절해고도> 포스터 이미지

영화 <절해고도> 포스터 이미지 ⓒ 무브먼트

 
제목을 보고 떠오른 단상들
 
<절해고도>라는 영화제목을 접했을 때 떠오르는 인상은 두 가지였다. 우선 첫 번째는 사극에서 종종 접하던 문장,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서릿발 같은 형벌의 문장이다. '절해고도'의 본뜻인 망망대해에 고립되어 유배가 풀리기 전까지는 결코 자의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 심지어 빈궁한 거처 주변 사방을 가시로 울타리를 둘러쳐 죄인의 정신까지 가둬놓겠다는 국가권력의 강요를 이르는 말이다. 원래 귀양도 등급이 있는 법인데, 수도에서 가깝고 풍요로운 동네에 보내는 건 사실상 잠시 쉬다 오라거나 정상참작을 해준다는 의미이다.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내보내지만 기회를 봐 곧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암묵적 표시이거나, 누가 봐도 벌주기 뭐하지만 국법이 준엄해 어쩔 수 없이 유배를 보낸다는 양해각서 같은 조치이다. 후자의 경우 주로 부모의 원수를 갚은 효자 정도는 되어야 적용되던 사례다.
 
그에 비해 절해고도에 유배를 보낸다는 건 살아서 다시 육지에 발붙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위리안치까지 한다면 귀양의 그나마 나은 점인 변경에서만 얌전히 있다면 산보 정도는 가능하다는 자유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세상에 잊혀버리고 운신도 못하는 무기수 신세다. 이 영화의 제목은 그런 처연하고 답이 없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는 걸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떠오른 또 다른 인상은 뜬금없지만 현재의 장기투쟁현장, 소수가 남아 주로 농성장을 차리고 정부나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대항해 누가 먼저 지쳐 쓰러지나 경합하듯 자존심을 걸고 고립무원의 투쟁을 벌이는 이들을 기록한 <섬과 섬을 잇다>라는 르포집의 제목이었다. 시사만화가와 기록 작가들의 협업으로 밀양 송전탑이나 쌍용 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등 전국 곳곳에 현대판 절해고도처럼 대다수의 외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곳들을 소개하는 기획 프로젝트로 2권의 책이 나온 바 있다.
 
전자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그들이 그냥 주저앉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라도 전환점을 찾아내기 위해 각자의 삶을 걸고 분투할 것이라는 암시다. 실제로 영화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도 허투루가 아니라 내공을 꾹꾹 눌러 담은 채로. 주인공들은 사회 주류에 편입되거나 정착하는 데 실패하기 딱 좋은 캐릭터들이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에 급급한 예술가, 재능 있지만 안정된 자리를 얻지 못한 인문학 강사, 독창적 재능 때문에 별종으로 몰려 차별당하는 청소년을 통해 '정상성'과 '평균'을 선호하는 한국사회 시스템이 초래하는 불행을 묘사하지만 사회비판 대신 극중 인물들의 성찰과 치유를 찾는 여정으로 잔잔한 동행을 관객에게 청하려 한다.
 
주변부 예술가의 우유부단한 삶이 초래한 위기
 
 영화 <절해고도> 스틸 이미지

영화 <절해고도> 스틸 이미지 ⓒ 무브먼트

 
영화는 중년에 접어든 예술가 윤철과 그의 10대 후반 딸 지나, 그리고 우연히 만나 연애에 이르게 된 연상의 애인 영지, 세 사람의 엇갈린 시간이 교차되다 마침내 만나는 과정을 독창적인 시공간 연출로 표현한다. 20~30대 창작자들의 동 세대적 경향성과는 차별화되는 중견 감독의 독특한 이력과 지나온 활동이 응축된 것 마냥 <절해고도>는 이채로운 전개와 풍경을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오밀조밀하게 축조해낸다.
 
윤철은 한때 촉망받던 조각가였지만 지금은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건 처리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데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조각가이지만 요즘 그의 생계에 가장 보탬이 되는 건 초중고 학교 과학수업용 공룡이나 행성 모형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이다. 시골 작업실 한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크게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도 한때 결혼해 가정을 꾸린 바 있다. 하지만 능력 있고 돈 잘 버는 전처는 윤철에게 실망해 이혼한 상태다. 고3이 된 딸 지나는 아빠를 닮았는지 미술에 독창적 재능을 보이지만 과격한 작품세계 탓에 또래들에게 배척당한다. 지나의 생계는 엄마가 책임져주지만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아무래도 아빠 윤철에게 물려받은 모양새다. 그런 어느 날 윤철은 바쁜 전처 대신 딸의 학교에 찾아가 교사와 상담할 것을 요청받는다. 학교에 가 보니 지나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화풍 때문에 왕따 수준의 가해를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철은 아빠로서 제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딸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한다. 전처는 그런 윤철이 자기 밖에 모른다며 거세게 화를 내지만 윤철은 그저 회피할 궁리만 하는 모양새다. 자기 역시 10대 시절 불우하고 방황을 거듭하면서 부모의 갈등을 목격한 터라 오히려 자신의 지우고 싶은 기억만 재현될 뿐이다.
 
그런 가운데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된 인문학 강사 영지는 초반에 윤철을 기선 제압할 정도로 시원시원하고 강인한 매력을 뽐낸다. 핀잔을 먹이긴 했지만 어수룩한 윤철이 마음에 들었던지 둘은 곧 연인관계가 된다. 하지만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느낌일 만큼 윤철은 무엇 하나 분명하게 결단하거나 집중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떠다니기만 거듭한다. 마치 자신만의 절해고도를 찾아내 도피처로 삼으려는 사람 행색이다. 걸리버 선장이 후이넘의 나라에서 추방되고 인간세계로 귀환을 모색하는 대신 자신만의 무인도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윤철은 겉으로만 보면 좀 독특할 뿐 무난해 보이지만, 정작 기대를 갖고 함께 살아보면 공허한 관계에 그칠 뿐이다.
 
그런 우유부단함에 질린 나머지 영지는 그의 곁을 훌쩍 떠나버린다. 아마 윤철의 전처 역시 처음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로서의 윤철에게 반했겠지만 함께 살면서 환멸을 느꼈을 테다. 아무래도 윤철은 비슷한 경험을 거듭 반복하며 살아왔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결정타는 따로 있다. 딸 지나는 느닷없이 미대 입시를 팽개치고 중이 되겠다며 절에 들어가 버린다. 윤철은 대체 어떻게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은은한 반전이 그려내는 성찰과 연대의 풍경화
 
 영화 <절해고도> 스틸 이미지

영화 <절해고도> 스틸 이미지 ⓒ 무브먼트

 
이때까지만 놓고 보면 <절해고도>가 펼치는 이야기는 기획된 비극적 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실존을 고민하는 한국독립영화의 전형적인 불행 스토리에 그칠 테다. 하지만 3명의 주요 인물들(윤철-지나/도맹-영지)은 모두 각자의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상태를 겪게 되지만, 그 귀양에 처한 곳에서 삶을 재구성하거나 혹은 고립을 피하기 위한 연락수단을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각자의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다.
 
윤철은 마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경유하듯 일정한 계기를 맞이하고 이후 이제는 지나라는 이름 대신 작은 암자에서 수행중인 도맹 거사로 부르게 된 딸을 틈틈이 방문해 만남을 이어간다. 영지의 소식은 알 길이 없지만 한참이 지나 잠결에 문자가 문득 도착한다. 전반부에서 쫓기듯 고립되어가던 윤철은 마치 딸과 더불어 수행에 들어간 듯 주기적으로 도맹의 암자를 방문해 이것저것 일을 돕고 딸이 의탁한 수행센터의 여승에게 상담도 나누며 예전의 고립된 삶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비로소 윤철은 이제는 (딸의 예전 이름을 부르진 못해도) 딸과 스스럼없는 대화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전환의 과정은 명쾌하게 직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마치 선문답처럼 그저 암자를 수리하고 함께 밥을 먹고 찾아왔다 떠나기를 거듭하기에 관객의 눈에 더욱 윤철 본인의 수행과정처럼 비춰지는 형세다.
 
그리고 영지가 돌아온다. 하지만 잔뜩 병들고 쇠약해진 상태다. 윤철은 자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매몰차게 떠난 옛 연인의 귀환에 화를 내기는커녕, 위로하고 보살피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에서 윤철과 영지 그리고 도맹은 같은 밥상에서 숟가락을 기울이고 비록 통상적인 가족의 형태와는 전혀 다르지만 지금껏 윤철이 형식적으로만 가져봤던 게 아닌 마음이 통하는 신뢰관계를 마침내 누리게 된다. 그 순간은 은은한 수묵화처럼 유려하게 흘러간다.
 
물론 일반적인 사회적 잣대로만 보면 이들의 상황은 탄식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여전히 가난하고 전망 없는 예술가-중병에 걸려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언제든 위급상황에 빠질 수 있는 비정규직 강사-재능이 부여한 기회를 마다하고 뜬금없이 창창한 청춘을 중이 되겠다고 산에 들어간 말 지지리도 안 듣는 딸까지, 그야말로 환장의 조합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세상의 척도에 얽매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영화의 매력을 형성하는 감독과 배우들의 활약
 
 영화 <절해고도> 스틸 이미지

영화 <절해고도> 스틸 이미지 ⓒ 무브먼트

 
김미영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절해고도>는 그야말로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것만 같은 존재들이 자신들만의 연결 통로를 마련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각자가 유배된 섬과 섬들을 이어가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이 유려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다. 1971년생, 한국나이로 50대 중년에 접어든 감독의 이력은 (개봉 전후 여러 곳에 소개된 인터뷰 등에서 찾아보면) 요즘 독립영화감독들의 전형적인 경력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감독 역시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사회적 잣대로 정해진 궤도를 스스로의 의지로 이탈해 산전수전 겪어가면서 다양한 행로(이공계통 전공 → 영화동아리 활동 → 영화전문지 기자 → 한국영화아카데미 진학 → 임권택 감독 연출부 10년까지)를 걸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경력 덕분에 청년세대의 재기발랄함 대신에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겪어본 이가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작업할 수 있었을 테다. 작품 역시 별 특별한 게 없어 보이지만 인물의 심경과 주변 환경 변화를 특별한 해설 없이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이미지 연출이 은근히 비범하다. 영화의 템포 또한 전반부의 서서히 가라앉는 분위기 vs 후반부에서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의 대비 묘사를 제대로 분리해 펼쳐 보인다.
 
그렇게 천천히 확인되는 꼼꼼한 연출과 함께 연기자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겠다. 이제 베테랑이 되어가는 윤철 역 박종환 배우는, 마치 얼굴 표정 스틸 컷만으로도 영화의 스토리가 다 풀어질 것 같은 인상적인 이미지를 거듭 선보인다. 그리고 독립영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중견 연기자 강경헌 배우의 매력적인 영지 캐릭터, 요즘 각광받는 젊은 신성 배우 중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임에도 본 작품을 위해 과감히 삭발을 감행한 이연 배우, 역시 독립영화에서 보기 힘든 얼굴인 관록의 연기자 박현숙 배우의 깜짝 등장, 이후 드라마 주연 급으로 부상한 정수빈 배우의 반가운 발견, 현재 한국독립영화계에서 신뢰의 아이콘들이라 할 장준휘, 강길우, 이태경 배우들의 든든한 뒷받침이 영화의 안정감을 지탱해준다.
 
영화를 보고 감흥에 잠긴다면 하나 더 참조할 게 또 있다. <절해고도>는 요즘 흔히 써먹는 원작 각색 대신 온전히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데에서 소재를 끌어오는 대신에 흔하지 않은 도전을 행했다. 오히려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병행 생산하려는 시도다. 해당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시인들이 창작한 시를 수록한 동명의 옴니버스 시집이 개봉과 함께 출간되었다. 영화를 보고 곧이어 해당 도서를 펼쳐본다면, 마치 절해고도에 갇혀서도 정신만은 자유롭게 바다 위를 떠다니는 새들을 닮고자 애써 집필활동에 나섰던 조선시대 유배자의 심정을 이해할 법하다. 그렇게 영화와, 그에게서 파생된 문집을 함께 누리는 것도 일종의 풍류가 될 수 있겠다.
 
<작품정보>
절해고도 A Lonely Island in the Distant Sea
2021|한국|드라마
2023.09.27.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김미영
주연 박종환(윤철 역), 이연(지나/도맹 역), 강경헌(영지 역)
출연 박현숙(금우 역), 정수빈(연희 역), 장준휘(경수 역), 강길우(재훈 역),
최희진(혜영 역), 이태경(담임선생님 역), 구자은(현지 역),
천방이&아롱이(천방이 역)
제작 보리와 오디 영화사
배급책임 아이 엠
공동배급 및 홍보/마케팅 무브먼트
 
2021 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
2022 9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라이징 스타상(배우 이연)
2021 47회 서울독립영화제
2022 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3 20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절해고도 김미영 감독 박종환 이연 강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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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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