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로라 앤 썬> 스틸컷

영화 <플로라 앤 썬> 스틸컷 ⓒ CJ CGV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존 카니 감독을 생각하면 역시 제일 먼저 <원스>(2007)가 떠오른다. 극 중 그녀의 대사 '밀루유 떼베'(당신을 사랑해요)를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러닝타임 내내 음악이 멈추지 않도록 했던 작품. 대표곡인 'Falling Slowly'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까지 수상하며 영화만큼이나 알려진 음악이 되었다. 이 작품 이후에도 존 카니 작품은 음악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워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스크린 바깥의 관객들을 연결시키는 작업들을 이어낸다. 어느 한쪽을 뾰족하게 다듬어낼 수 있다면 다른 약한 부분을 상쇄할 수 있다고 했었나.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두 남녀의 사랑에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떨리는 마음을 멈추지 못했던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영화 <비긴 어게인>(2014)과 <싱 스트리트>(2016)에 이은 이번 작품 <플로라 앤 썬>(2023) 역시 그런 존 카니 감독의 스타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극의 이야기 속에 깊이 관여했던 다른 작품 속 음악들처럼 이 작품에서도 음악은 인물의 삶을 이야기하고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으로 활용된다.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감정적 어려움을 겪는 엄마와 아들은 물론, 음악을 매개로 만나게 되는 두 남녀의 모습에까지 영화는 언제나 음악을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
 
지난 작품으로부터 7년, 그 사이의 팬데믹 시기를 겪으면서 감독의 작품 속에서도 변화는 엿보인다. 직접 만나 함께 연주하고 아날로그적인 소통에 집중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랜선을 통한 교류가 등장한다. 단순하게 모바일을 활용한 연락 정도가 아니라 주요 인물이 서로 직접적인 대면을 갖지 않고 소통하는 방식의 활용이다. 이와 더불어 고전적인 의미의 연주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의미의 미디, 디지털 음악을 극 안으로 끌고 들어온 것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다.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감독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겠지만, 어떤 음악적 형태를 활용하더라도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관계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감이 담겨있기도 하다.
 
02.
영화는 엄마 플로라(이브 휴슨 분)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드러내며 시작된다. 밤새 클럽에서 춤을 추고 이름 모를 남자와 원나잇을 즐기는 그녀의 모습이 처음이다. 아들 맥스(오렌 킨런 분)가 등교를 제대로 했는지는 관심도 없이, 어젯밤 만난 이름만 겨우 아는 남자와 함께 안방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그녀.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아들과의 관계도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맥스 역시 잦은 절도로 인해 지속적인 보호 관찰을 받는 등 도덕적인 문제를 겪는다. 부모의 이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래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들이 가끔 집에 없기를 바라는 플로라의 속마음이다.
 
"이게 내 이야기가 되면 안 돼"
 
영화는 이 문제들을 끊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으로 기타를 플로라의 손에 건넨다. 그녀가 아들 맥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미 생일이 하루 지났다는 이유로, 또 자신을 위해 사 온 것이 아니라 길에서 주워 수리한 고물이라는 이유로 그로부터 퇴짜를 맞게 되지만, 이를 계기로 플로라는 자신이 직접 기타를 한 번 배워보기로 한다. 그 결심을 처음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유명 베이시스트 출신의 전 남편 이언(잭 레이너 분)은 기타를 배우기 위해서는 오랜 노력과 희생, 그리고 헌신이 필요하다는 말로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영화 <플로라 앤 썬> 스틸컷

영화 <플로라 앤 썬> 스틸컷 ⓒ CJ CGV

 
03.
사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가볍게 지나가면 극의 주인공이 기타를 배우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극의 초반부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된 이 장면들에는 보여지는 것보다 조금 더 의도적으로 형성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바로 현시대의 문화와 이를 접하고 소비하는 대중의 태도에 대한 부분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존 카니 감독의 작품 전체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먼저 플로라가 기타를 구하고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갖기까지의 과정에 놓인 장치들을 보자. 영화는 결과의 화려한 부분과 그에 대한 찬사만을 보여주는 매체, 오디션 프로그램의 부정적인 면과 온라인상의 수많은 콘텐츠 속 속성 강좌들에 관객들을 꽤 오랜 시간 노출시킨다. 이는 극중 인물인 플로라 역시 마찬가지. 이후 LA의 뮤지션인 제프(조셉 고든 래빗 분)을 만나 본격적으로 기타 레슨을 받기 전까지 그녀 앞에 던져지는 모든 미디어는 결과 중심적인 콘텐츠에 해당된다.
 
이 작품에서 극의 진행을 위해서가 아닌, 존 카니 감독 자신이 바라보는 현재의 문화적 특징과 그에 대한 비판을 유일하게 담아내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야기한 대로 그는 자신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음악을 극 안으로 끌고 들어와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전반부에 깔아놓은 이 장치들을 통해 한발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 설정들은 플로라와 제프가 함께 형성하는 플롯 위에서도 내면의 성장과 진정한 의미의 감정적 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04.
"음악은 사랑이 전부예요"
 
플로라와 제프의 만남, 더블린과 LA의 장거리 교류가 시작되고 난 이후, 영화는 회복과 성장의 내러티브를 쌓는데 몰두한다. 여전히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전 남편이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라며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플로라. 반면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능력이 평생에 걸쳐 자신을 표현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될 것이라 말하는 제프. 그런 두 사람의 교류는 어린 시절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모두를 포기해야만 했던 엄마 플로라가 다시 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이자 성장의 발판이 된다.
 
두 사람의 관계 사이에서 그녀가 음악을 배워가며 성장하는 동안, 이미 자신의 음악을 홀로 만들고 있던 아들 맥스는 엄마의 사랑을 통해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400유로짜리 신시사이저를 훔치다 가게 주인에게 잡혀 법정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엄마 플로라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감응이다. 이 지점에서도 엄마의 역할에 앞서 스스로의 자리를 먼저 찾게 만드는 영화의 문법적 순서는 인상적이다. 엄마라는 자리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성장의 과정을 채우는 것은 역시 음악과 사랑이다. 물론 현실적인 제약은 분명히 존재한다. 누군가의 음악처럼 큰돈을 들여 화려한 작업을 할 수도 없고, 지금 당장 서로의 뮤즈가 되는 존재를 향해 달려갈 수도 없다. 음악이 현실의 모든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 과정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감정의 회복을 얻게 되었다고 해도 지나온 걸음 위에 놓인 죄와 벌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카니 감독은 이야기한다. 음악은 사랑이 전부이고,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우리를 사랑하게 만든다고.
 
 영화 <플로라 앤 썬> 스틸컷

영화 <플로라 앤 썬> 스틸컷 ⓒ CJ CGV


05.
무대 위에 오른 모두가 과거에 한 번씩 상처받은 경험이 있고, 지금 채워지지 못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런 걸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등장하는 모두의 합주 장면은 상투적이지만 의외로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한 사람의 변화와 가족의 이야기,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미소 지을 수 있을 한 시절의 로맨스까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영화 속 이야기들이 다시 한번 펼쳐지기 시작한다. 음악을 통해 마음을 위로받게 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4주간의 수감 기간 동안 아들 맥스는 평생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엄마와 함께 곡을 만들던 때를 꼽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지나고 난 후에 그는 어쩌면 모두가 함께 작은 무대 위에 올라 연주했던 그 순간을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제프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곡을 함께 연주하던 그날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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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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