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킴스 비디오> 포스터 이미지

영화 <킴스 비디오> 포스터 이미지 ⓒ 오드

 
2023년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연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는 <킴스 비디오>였다. 전주는 이제 공식 명칭은 사라졌지만 '영화의 고고학'이라 해석하면 됨직한 '시네마톨로지'라는 섹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비록 섹션 명칭은 사라졌지만 해당 카테고리에 부합되는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었다. <셀지오 레오네: 미국을 발명한 아메리카인>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같은 다큐멘터리들이 이번에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킴스 비디오>는 여유가 되면 봐야지 하는 정도로 후순위에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들려오는 입소문이 범상치 않았다. 상영이 끝나는 순간 객석은 함성의 도가니가 되고 주인공이 영화제 현장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궁금증에 순번을 변경해 영화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침을 꿀떡 삼키며 (국제영화제 상영작 치고는) 그리 길지 않은 상영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침내 영화 속 주인공이라 할 'Mr. Kim', 김용만씨가 무대에 등장했다. 관객들은 환호와 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극장 안이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넘쳐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입소문을 타며 작은 돌풍을 일으킨 영화는 극장개봉에 이른다. 영화제가 주류 상업영화 외에도 세상에는 참 다양한 영화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모범 사례가 된 셈이다. 하지만 막상 개봉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과연 <킴스 비디오>가 '영화제용 영화'의 벽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의심암귀가 귓가에서 사악한 주문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혹은 세상의 벽은 만만치 않다며 말이다.
 
이 영화는 광기와 집착의 결과물이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피하고픈 마음이 절로 생기지 않는가. 하지만 심지어 그 부정적 개념들의 샌드위치맨 같은 존재가 이 영화를 만든 공동감독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무모하고 대책 없는 도전은 지금의 세상에서 지극히 찾아보기 힘든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라는 지점에 닿고 있었다. 아마 이 영화를 본 이들이 열광하는 것 또한 바로 그런 진귀함 때문일 테다. 대체 영화가 무엇을 담고 있기에?
 
'킴스 비디오'의 전설을 찾아 모험을 떠나다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이미지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이미지 ⓒ 오드

 
제목의 <킴스 비디오>는 뉴욕에서도 인디/대안문화의 본산이라 할 이스트 빌리지 어딘가에 있던 비디오 대여점이다. 전성기에는 11개의 지점을 보유하고 5만 5000개의 희귀 비디오와 25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던 일종의 '성지'와도 같았던 곳이다. 본인은 그저 이름만 들어본 곳이지만 해외 출장이나 유학을 통해 이 공간에 물질적으로 도달 가능했던 이들에게는 '성지순례'의 경험으로 남아 있어서 정말 궁금하던 곳이다. 물론 동 시기에 미국은 '블록버스터'나 'TNT' 같은 대형 비디오 대여점 체인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곳은 그들과는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화와 전설의 근원에는 베일에 쌓인 창업주 '킴'이 어둠의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킴스 비디오'는 수만 점의 대여용 비디오 중 상당수를 전 세계 영화제에 직원을 파견하거나 대사관을 통해 입수한 독립예술영화로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킴'의 방침으로 공식적으로는 유통되지 않는 학생영화나 영화제에서만 상영된 작품까지 '해적판' 컬렉션을 방대하게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특출하고 희소성 가득한 라인업 때문에 이곳은 일반 대여회원 뿐 아니라 영화계 관계자들, 당대의 영화작가들이 찾는 명소로 점점 성역화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달은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20세기 말에 전성기를 맞았던 비디오 대여문화는 디지털 시대로 전환된 21세기 초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는다. 물질적 저장매체에서 비물질적 온라인 스트리밍과 파일 전송의 시대가 도래하고 만 것이다. 킴스 비디오의 지점들은 차례로 정리되었고 2008년 이후 뉴욕의 본점도 문을 닫는다. 문제는 수만 점의 소장 목록이다. 킴스 비디오 본점의 그 어디에서도 비견될 수 없는 컬렉션은 그 자체로 영화 라이브러리를 형성하기에 그 가치는 환산하기 어려운 경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폐업 소식이 느닷없이 찾아든다. 직원들조차 거의 당일 공지를 보고 알았다는 회고와 함께 5만 5000개의 희귀 비디오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10여 년이 지나 킴스 비디오가 존재했다는 희미한 기억 외에 현재 상황에 대해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킴스 비디오>의 감독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광'의 순정이 이정표처럼 안내하는 길
 
공동감독들은 자신들이 영화에 대해 처음으로 접했던 추억을 회고한다. 이들은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인생을 정리해 표현할 수 있다. 그 외엔 너무나 서툴러서 타인에게 온전히 자신을 전하기 어려울 테다. 자기가 맨 처음 만난 영화부터 주요 국면에서 자신의 행보나 결단을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봤던 영화의 장면과 대사를 통해서만 객관화할 수 있다. '시네필'이라 불리는 이들의 전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이들은 과거 자신들이 열광하던 킴스 비디오가 사라진 경위와 그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던 보물창고의 행방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 나선다.
 
이스트 빌리지를 찾아 킴스 비디오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지만 그곳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처럼) 이제 술집과 오락실, 노래방으로 변해 있고 옛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당혹해하던 이들은 주변 시민들 아무나 붙잡고 킴스 비디오를 아느냐고 질문을 반복한다. 느닷없는 질문이지만 워낙에 명소였던 곳이라 그런지 어렴풋이 또는 아련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감독들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수소문해 전 직원들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별로 아는 게 없다. '킴' 사장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사람들과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하면 할수록 킴스 비디오의 실체와 '킴'이란 사람은 더욱 더 수수께끼가 되어간다.
 
하지만 끈덕진 조사 덕분에 컬렉션의 행방이 서서히 확인되기 시작한다. 폐업을 앞두고 컬렉션을 보관할 장소를 공개적으로 수소문하던 '킴'은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에 기증하기로 한다. 40여 곳의 학교와 기관이 의향서를 보냈지만 당시엔 낙점된 곳이 가장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이탈리아 남쪽 끝, 시칠리아의 소도시 살레미였다. 대여점 문화가 쇠락한 후 문을 닫게 된 킴스 비디오의 5만 5000점 소장 영상물을 이 소도시에서 소장 공간 제공은 물론, 모든 작품을 디지털 변환을 통해 영구보관하고, 기존 회원들에게는 무료 관람과 대여까지 허용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파격적인 조건이라 '킴'은 국외 반출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살레미를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비디오를 찾았을 뿐인데, 거대한 어둠과 마주하다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이미지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이미지 ⓒ 오드

 
이제 감독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으로 향한다. 분명히 살레미 시와의 합의서에는 기존 킴스 비디오 회원에게 컬렉션이 개방된다는 내용을 믿고 말이다. 감독들은 살레미에 도착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몇 년째 사업 관련 진척은 전혀 없었다. 무려 10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원래 약속과 달리 공개되지 않고 엉망진창으로 방치된 킴스 비디오 소장품을 목격하고 만 감독들은 충격에 빠진다. 이들이 살레미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파헤치면서 영화는 어느새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어렴풋하게 감독들이 조금씩 다가가는 진실은 너무나 어둡다. 그런데 따져보면 그들이 목격하게 된 진상은 한국에서도 드물지 않게 목격되는 지점이라는 게 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살레미라는 소도시는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재건사업 도상에 있었다. 마침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재기를 노리며 시장으로 부임한 정치가가 도시 부흥을 위한 재원 마련과 홍보 이슈를 위해 킴스 비디오 컬렉션을 악용한 뒤 방치했던 것이다. 한국의 지자체 일부가 보이는 전시행정과 후속관리 부재의 극단화된 형태다. (여기에 재건사업 특수를 노린 지역 마피아의 개입 또한 의심으로 등장한다.)
 
감독들은 의분에 불타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왕년에 킴스 비디오 회원이었다는 것 말고는 컬렉션 자체에 접근할 권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이들은 세속의 규제에 가로막혀 포기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필사의 수소문으로 살레미 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찾아 헤맨다. 바로 '킴'이다. 역시 그들의 지난 삶처럼 지독히 '영화적으로' 킴과의 연락이 이뤄진다. 감독들은 킴의 일정 때문에 서울로 날아가야 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전설의 존재와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감독들의 기대와 달리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킴은 지금 자신이 뭘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다고 답한다. 여기에서 영화가 끝나야 정상이다. 세상은 그런 거라는 체념과 함께 말이다.
 
현대판 '돈키호테'가 풍차 괴물과 맞서 승리하다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이미지

영화 <킴스 비디오> 스틸 이미지 ⓒ 오드

 
그러나 감독들은 그런 합리성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 '시네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들이 봉착한 장애물을 돌파해버린다. 그들 주변에 떠돌던 영화의 유령들을 소환해서 말이다. 그 모험활극의 결과로 킴스 비디오의 방치되어 있던 소장품 컬렉션에 마침내 십수 년 만에 햇볕이 내리쬔다. 우리가 보고 싶었지만,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으리라 포기했던 기적을 보았다. 아마 본 작품에 대한 소수의 열광은 그 지점을 목격했기 때문이리라.
 
이들이 온갖 위험을 각오한 (건지 대책이 없는 건지는 모호하지만) 끝에 저지른 사건을 들은 '킴'은 내내 '언빌리버블!'을 연호한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표정이다. 하지만 감독들만으로 불가능한 규모일 텐데 하며 던진 질문에 감독들은 천연덕스럽게 (관객이 화면에서 목격한 대로) 고다르가 그래도 된다고 했다 답한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킴은 고다르가 허락했다면 수긍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도의 정치적 과정을 감내한 킴의 결심 덕분에 10여 년이 지나 킴스 비디오의 컬렉션은 원래 목표로 했던 활용의 길로 접어든다. 이 공간을 추억하는 많은 이들이 새 출발을 축하하러 와줬고, 최대 연체의 주인공 코언 형제는 연체료 탕감을 받았다고 전한다.
 
예전에 < KINO >라는 영화잡지가 있었다. 늘 번역체와 오역에 욕을 퍼부으면서도 절대 빠지지 않고 매월 구입하던 책이다. 문어체가 극심했지만 가끔씩 가슴 속에 뽕이 차오르는 표제만 봐도 두근거리곤 했다. 그중에도 대표 격이던 게 "영화광은 어떻게 세상과 싸우는가?"라는 기획이었다. 문득 그 글귀가 떠올랐다. <킴스 비디오>에서 진행되는 사건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만큼 엉뚱하기 짝이 없는 영화광들의 활극이다. 참담한 실패와 해프닝으로 끝나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라 하지만 적지 않은 부분이 재연되거나 편집되었음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적어도 무기력한 좌절과 푸념 대신에 자신들이 애정을 듬뿍 전하던 존재가 부당하게 당하는 대우를 타파하기 위해 행동했고, 세상은 여전히 그런 각성과 헌신으로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다는 명제를 증명해냈다. 세상을 좋게 바꿔나가기 위해서는 불평불만을 넘어선 행동이 필수인 법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어쩌면 생명까지 건) 위험을 감수하며 결코 작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의 감동은 결코 가볍지 않은 성격의 것이다.
 
<킴스 비디오> 완성한 이들에게 화답할 방법을 찾아서
 
하지만 여기에서 괜한 심술 하나 끼얹어본다. <킴스 비디오>를 보며 열광하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바로 지금 (독립예술)영화가 당하는 부당한 대우들, '킴'과 같은 이들이 헌신해 꾸려온 소중한 영화의 성지와 신전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저 소비자의 태도로 일관하거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이라며 도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2023년 한국의 영화적 상황은 <킴스 비디오>를 그저 즐겁게 볼 수 없게 만든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시네필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선 신경써야 할 게 너무 많다. 영화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거대한 빙하기로 접어들 것만 같은 불안이 한국의 영화광-시네필들에게 겨울 폭풍처럼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무슨 내용인지는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부연하지 않겠다. 정책적 방향과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킴스 비디오'를 기억하고 애쓰던 이들이 단지 '고객'으로 이 공간을 대하지 않았다는 걸 영화 내내 뼈저리게 체감할 테다.

문화 다양성과 공공성에 대해 '야만'에 가까운 폭거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권력에게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현대판 문화유산이라 할 컬렉션을 자신의 출세와 성과에만 악용하고 모르쇠 하던 이탈리아 정치인의 추악한 이면을 자연스럽게 투영할 것이다. 문화강국이라는 몇몇 국가들도 따져보면 관료주의와 전시행정의 본질을 극복하기란 지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건 컬렉션의 가치와 영화공동체의 소중함을 체험한 '시민'들의 활약이다. 공공기관의 일방통행을 견제하고 목소리를 내건, 시민사회 속에서 지역 영화문화의 가치를 강조하고 섬처럼 흩어져 명맥 유지에도 허덕이는 소중한 '요새'들을 지원하는 역할은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시네필들이 수행해야만 하는 과업이 되고 만다. <킴스 비디오>를 본 이들에게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그런 질문을 폭격처럼 투하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 땅의 영화광들이 응답해야 할 숙제가 영화를 보고 나면 한 가득이다. 그저 영화를 즐겁게 보고 싶을 뿐인데 2023년 한국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작품정보>
킴스 비디오 KIM'S VIDEO
2022|미국|다큐멘터리
2023.09.27. 개봉|88분 10초|12세 관람가
감독 데이비드 레드먼, 애슐리 사빈
출연 김용만
수입/배급 오드
 
2023 선댄스영화제 공식 초청
2023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023 트라이베카영화제 공식 초청
2023 시드니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023 텔룰라이드영화제 공식 초청
2023 오스틴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023 로마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킴스 비디오 데이비드 레드먼 애슐리 사빈 김용만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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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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