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메모리> 포스터

영화 <이터널 메모리> 포스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년을 연애하고 결혼에 이른 연인이 있다. 기자이자 작가로 칠레의 민주화에 공헌한 아우구스토 공고라, 배우이고 활동가이며 민주화된 칠레에서 문화부 장관을 한 파울리나 우루티아 부부다. 25년 동안 만남을 이어온 이들의 일상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연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어떤 남자도 사랑할 수밖에 없을 선하고 예쁘고 지혜로운 여자가 존경스런 마음이 절로 드는 지적이고 용감한 남자를 사랑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건 저러한 짝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온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면 혼자인대로 마음껏 즐거워하던 나조차 그런 생각에 이르고 만다.
 
<이터널 메모리>는 아우구스토와 파울리나 부부의 이야기다. 선댄스 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상영하는 곳마다 눈물바람을 일으킨 화제작이다. 제15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개막작으로 점찍어올 만한 그런 영화라 하겠다.
 
 영화 <이터널 메모리> 스틸컷

영화 <이터널 메모리>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 최고 다큐영화제 2023년 개막작
 
영화는 아우구스토가 알츠하이머로 서서히 저를 잃어가는 모습을 담는다. 파울리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그를 곁에서 살뜰히 돌본다. 그를 데리고 공연장을 오가며 연기를 하고, 그가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함께 산책을 한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책을 읽어주고 씻는 일까지 돕는다. 말동무가 되어주고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정성을 다해 한다.
 
그러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알츠하이머가, 퇴행성 질병들이 그러하듯이. 기자와 작가로, 기록하고 싸우는 사람이었던 그다. 피노체트의 폭력에 맞서 마침내 승리를 보았던 그가 알츠하이머 앞에서는 무력하게 무너져간다. 그 모두를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파울리나의 모습이 참담하다.
 
마침내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겨우 책 몇 권을 손에 쥐고서 엉엉 울어버리는 늙고 약한 사내가 초라하기만 하다. "여긴 우리 집이고 이 책들 모두 당신이 고른 당신 거예요" 하고 말하는 파울리나다. 그러나 아우구스토는 손에 책 몇 권을 꼭 쥔 채로 "책은 내 전부야 절대로 줄 수 없어" 하고 울어버릴 뿐이다.
 
 영화 <이터널 메모리> 스틸컷

영화 <이터널 메모리>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사라지는 기억 사이 흘러가는 현대사
 
또 어느 날 파울리나는 반나절 동안 저를 알아보지 못해 애를 먹인 남편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는지를 하소연한다. 그러자 남편은 제가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그녀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마침내 가장 귀한 것들까지 산산이 흩어버리는 이 몹쓸 질병으로부터 아우구스토와 파울리나가 저들의 기억을 지켜내려는 투쟁이 힘겹다.
 
이들의 고통 사이사이 굴곡진 칠레의 현대사가 흘러내린다. 한국과도 꼭 닮아 있는 칠레의 역사가, 군부의 쿠데타와 고통으로 점철된 민주화항쟁이, 또 마침내 이뤄진 승리가 우리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우구스토의 가까운 친구는 피노체트의 부하들에게 잡혀가 어느날 시체로 발견된다. 목이 그어진 채 발견된 그 시체는 그저 본보기였을 뿐이었다고, 아우구스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회상하다 마침내 울어버린다. 아우구스토는 세상 모든 것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 친구의 기억을 붙든다.
 
귀하게 기른 자식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칠레의 어머니들과 그럼에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칠레의 젊음들과 너무나 많았던 헛된 죽음들과 그러나 마침내 맞이한 눈부신 봄을 아우구스토와 파울리타가 떠올린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를 아우구스토는 마침내 잃어만 간다. 끝없이 사라져만 가는 기억들 앞에서 두려워하는 아우구스토, 한없이 나빠지기만 하는 제 사랑 앞에 눈물을 쏟고 마는 파울리나의 모습이 애처롭다.
  
 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그 무엇도 해하지 못할 사랑이야기가 있다면
 
마이테 알베르디 감독은 이 영화를 사랑이야기라고 했다. 역사와 세상과 용기와 저항과 영화 속 등장하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가장 귀한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뜻이겠다. 파울리나와 아우구스토가 나누는 순간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어쩌면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정말이지 하나쯤은 있고 그게 바로 이들 사이에 피어난 사랑이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큰 행사에서 꼭 한 마디 해야겠다고 연설문까지 써왔던 주한칠레대사는 영화를 본 뒤 연설문은 되었다며 파울리나를 꼬옥 안아주고 자리로 들어갔다. 아우구스토는 올해 세상을 떠났고 파울리나는 "그가 있었다면 모두가 열렬히 반겨주는 이 자리를 기뻐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영화를 찍자고 한 것도 아우구스토였다면서.
 
아우구스토가 피노체트 치하에서 6년을 바쳐 <금지된 기억>이란 책을 써냈다. 그는 이 책을 파울리나에게 선물하며 맨 앞장에 이렇게 적었다.
 
파울리나, 이 책을 쓰는 데 6년이 걸렸어요.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꼭 오늘 주고 싶어요. 이 책엔 고통과 공포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귀함도 있지요. 여전히 금지된 기억이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해요. 세상엔 고집세고 완고한 사람들이 있어요. 기억하려는 이들, 용기 있는 사람들, 파울리나 당신처럼 씨를 뿌리는 이들이오. 당신은 기억하려 하고 용기가 있고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아우구스토.
 
이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던 어느 귀한 사랑의 기록이다.
 
 영화 <이터널 메모리> 스틸컷

영화 <이터널 메모리>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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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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