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이 정도의 위기는 없었다. 한국 남녀배구가 동반으로 전대미문의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세계무대는 고사하고 아시아에서도 3류로 전락한 초유의 상황이다. 일시적인 부진이 아니라 한국 배구의 현 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다.
 
임도헌 감독이 이끄는 남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9월 22일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 중국 경방성스포츠센터 체육관에서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배구 12강 토너먼트에서 세트 스코어 0-3(19-25, 22-25, 21-25)으로 완패했다.
 
이로써 한국 남자배구는 이번 대회 공식 개막식이 열리기도 전에 12강에서 탈락하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아직 7-10위 순위 결정전이 남아 있지만 금메달이 목표였던 대회에서 입상권 밖으로 밀려나며 이미 체면은 완전히 구겨졌다.
 
심지어 '노메달'은 무려 61년 만의 굴욕이다. 1958년 배구가 아시안게임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한국은 꾸준하게 메달권에 이름을 올려왔다. 1962년 자카르타 대회에서 5위를 기록한 이후 한국은 1966년 방콕부터 2018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은메달)까지 '14회 연속 메달' 획득이라는 쾌거를 이뤘던 한국이지만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됐다.
 
임도헌호는 지난 20일 남자배구 C조 조별리그 1차전에서 FIVB 랭킹 76위의 인도를 상대로 범실만 36개를 기록하는 졸전 끝에 세트 스코어 2-3(27-25 27-29 22-25 25-20 15-17)으로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하며 대참사를 예고했다. 남자 배구가 국제대회 공식 경기에서 인도에게 패한 건 2012 아시아배구연맹컵(AVC) 이후 11년 만이었다.
 
2차전에서 FIVB 랭킹조차 집계되지 않는 최약체 캄보디아를 3-0 잡으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듯 했지만, 곧바로 다음 상대였던 파키스탄을 만나자 한국은 또다시 처참하게 무너졌다. 세계 랭킹 28위인 한국은 51위인 파키스탄에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고 그야말로 압도당했다. 프로 선수들로 구성된 한국이 프로리그가 없는 파키스탄에 무너진 것은 처음이었다.
  
패장인 임도헌 감독은 "국제대회에서 우리의 실력이 이 정도"라며 "정말 앞으로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 기본적인 디펜스를 포함해 우리 선수들이 다듬어야 할 것이 많다"며 씁쓸한 소감을 남겼다.
 
사실 이번 항저우 참사는 이미 예고된 비극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 배구 대표팀은 임도헌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세대교체'를 표방했지만 성적은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안방인 서울에서 열린 2022 FIVB 발리볼 챌린저컵에서 3위, 같은 해 아시아배구연맹(AVC)컵에서도 4위에 머물렀다.
 
2023년에도 AVC 챌린지컵에서 라이벌 중국과 일본이 출전하지 않았음에도 우승은 커녕 FIVB 랭킹 72위 바레인에게 발목을 잡혀 결승진출조차 실패하며 3위에 머물렀다. 아시아선수권에서는 8강에서 2진을 내보낸 중국 에서 1-3으로 패하며 5위에 머물렀다.
 
한국 남자배구는 1980-90년대만해도 국제무대에서도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최고성적인 4위까지 올랐고, 아시안게임에서는 1978년 방콕 대회에부터 2002년 부산과 2006년 도하에서 총 3회 금메달(은메달 7개, 동메달 4개)을 수확했다. 김세진-신진식-김상우같은 선수들은 국제무대에서도 세계적인 선수들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 배구의 경쟁력은 점점 추락했다. 올림픽 본선은 2000년대 시드니 대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인연이 없었다. 이렇다 할 국제적인 선수들을 배출해내지 못하며 점점 세계배구 변방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그리고 이제는 아시아 무대에서 한 수아래로 꼽히던 팀들에게조차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여자배구(FIVA랭킹 38위)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불과 2년전 2020 도쿄올림픽에서 '배구여제' 김연경을 앞세워 4강신화를 이뤄냈던 여자배구는 이후 김연경과 황금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세자르 에르난데스 곤살레스 감독이 이끄는 여자배구대표팀은 최근 폴란드 우치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예선 C조에에서 5연패를 당하며 올림픽 본선 출전이 좌절됐다. 한국은 17일 이탈리아에 0-3, 18일 폴란드에 1-3, 19일 독일에 2-3, 20일 미국에 1-3, 22일 콜롬비아에 2-3으로 내리 패했다. 한국은 23일 태국(13위), 24일 슬로베니아(28위)와의 경기를 남겨두고 있는데 현재의 전력과 분위기라면 7전 전패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유력해졌다.
 
도쿄올림픽 4강을 이끈 전임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 체제에서 전력분석코치였던 곤살레스 신임 감독은 2021년 10월 여자대표팀의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이후 곤살레스호는 2022년과 2023년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에서 2년 연속 예선 전패라는 희대의 불명예 진기록을 세웠다. 2022년 9~10월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4연패를 포함하면 국제경기 27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최근 태국에서 열린 2023 아시아선수권에서도 태국-베트남-카자흐스탄 등에 줄줄이 패배하며 최악의 성적인 6위로 마무리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배구 일정은 28일부터 시작한다. 한국은 베트남, 네팔과 C조에 편성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보여준 경기력으로는 메달권 진입이 매우 비관적이다.
 
남녀배구대표팀의 충격적인 동반 몰락은, 결국 한국 배구계가 자초한 구조적 비극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남녀 프로배구 선수들의 연봉대우는 세계적으로 봐도 수준급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에 비하여 경쟁력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하락했다.
 
사실상 국내 남녀 프로배구팀의 대부분은 걸출한 외국인 선수 한명에게 전력의 절반 이상을 의존하는 '몰빵배구'로 성적이 좌우되는 게 현실이다. 국내에서 충분히 안정된 대우와 환경을 제공받는 선수들은 축구나 야구처럼 더 큰 무대로 나아가 도전하겠다는 동기부여가 없다.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하면서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같은 큰 무대에 나갈 기회도 줄어들고 있다.
 
한국 남녀배구사를 통틀어 해외까지 진출하여 메이저 국가대항전과 세계 최정상급 프로리그에서 모두 월드클래스로 인정받은 선수는 여자배구의 김연경이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김연경이라는 슈퍼스타 개인에만 철저하게 의존했기에 이후, 후배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나 국내 배구계의 인프라 개선 등이 연속성있게 이어지지 못했다는 한계도 분명했다. 실제로 김연경이 태극마크를 반납하자마자 그동안 가려져있던 한국 배구 국제경쟁력의 민낯이 처참하게 드러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 배구는 이미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추락했다.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선수들이 아시아 2-3류팀에게도 셧아웃 패배를 당하는 남녀 배구대표팀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나온다. 과거의 지나간 영광이나 자국리그 인기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다는 각오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한국배구는 팬들의 싸늘한 외면을 받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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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배구 임도헌감독 항저우아시안게임 김연경 여자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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