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마라토너' 손기정(孫基禎, 1919-2002) 선생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인 운동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마라톤의 영웅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시대의 한계로 당시 손기정은 조선인이지만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야 했던 비운의 마라토너이기도 했다. 손기정은 금메달을 따고도 오히려 슬퍼하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베를린 대회 이후 해방된 조국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것'은 손기정에게 평생 이루고 싶은 숙원으로 남았다. 그리고 손기정은 베를린 대회로부터 무려 52년의 세월이 흘러, 무려의 76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 한을 풀 수 있었다.

9월 20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74회에서는 '손기정은 왜 76세가 되어서야 태극마크를 달았나' 편을 통하여 마라톤 영웅 손기정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손기정은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손기정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힘겨웠다. 남들처럼 배부르게 먹거나 장난감을 구입하는 등의 일상은 딴 세상의 이야기였던 손기정에게 유일한 취미는 '달리기'였다. 손기정은 자서전에서 "오직 달리기만이 어떤 장애도 비용도 들지 않는 멋진 운동이었다"고 회상했다. 어린 손기정은 달리기를 할 때 만큼은 배고픔도 잠시 잊고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손기정은 학창 시절부터 달리기에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보통학교 6학년 때 이미 신의주 대표 선수로 뽑힐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손기정을 생계를 위하여 취직을 선택해야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달리기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도 저녁에는 어두컴컴한 길을 달리며 달리기 연습을 계속했다. 손기정은 크고 작은 대회에서 우승을 거듭하며 선수의 꿈을 이어나갔다.

 1932년, 20세의 손기정은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경영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이는 손기정의 첫 마라톤 대회이기도 했다. 손기정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달리기 연습을 해왔지만, 육상 최장거리 종목인 마라톤은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경험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첫 출전에서 2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통치방식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화책의 일환으로 스포츠 대회를 활용했다. 또한 조선인들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운동경기를 통해서라도 만회하여 자존감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 더 적극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경영마라톤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손기정은 스무 살의 늦은 나이에 육상부가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특별입학을 하게 된다. 손기정은 잠시 생계일을 미루고 달리기 선수의 길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손기정은 처음으로 체계적인 달리기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육상부에서 훗날 그의 평생 동료가 되는 동갑내기 남승룡(南昇龍,1912-2001)을 만나게 된다. 

손기정이 달리기 선수로서 꿈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극심한 가난으로 하숙비를 마련할 돈도 없었던 손기정은,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용 선배 김봉수의 가정교사로 위장하여 선배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주거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손기정의 은사인 체육담당 김수기 선생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제자를 위하여 매일 박봉을 쪼개어 급식비로 떼어줬다.

1933년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 본 육상계 선배인 권태하는 편지를 보내어 "세계마라톤을 제패하여 일본의 콧대를 눌러주라"고 부탁한다. 권태하는 1932년 LA 올림픽에 출전했던 실력파였지만 선발전 1등을 차지하고도 본선에서는 일본인 선수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강요받아야 했던 아픔이 있었다. 권태하는 이를 거부했고 좋지못한 성적을 거둔 일본 선수단은 부진의 책임을 모두 권태하에게 떠넘겼다.

귀국하면 일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을 직감한 권태하는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렀다. 권태하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후배로 손기정을 지목하여 편지를 썼던 것. 권태하의 편지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진 손기정은 그때부터 '조선인으로서 당당히 우승하여 일본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

국내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조선의 마라톤 일인자로 우뚝 서게 된 손기정은 마침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출전 기회를 잡게 된다. 선발전에서 올림픽 본선까지 일본의 방해와 텃세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모두 극복해낸 손기정은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동양인 최초의 마라톤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에 등극했다.

당시 손기정의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이자 마라톤 역사상 최초로 '마의 2시간 30분대'의 벽을 깬 기록이었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 역시 3위를 기록하며 조선인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휩쓰는 쾌거를 달성했다. 

생애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영광스러운 수상대에 올랐지만, 정작 손기정은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손기정은 하늘 높이 올라가는 일장기와 일본 국가를 들으며 현실을 직감했다. 지금껏 조선인을 멸시해온 일본인들이 자신이 금메달을 수상하자 '일본의 자랑', '진정한 일본인'이라고 칭송하는 모습은 손기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토록 꿈꿨던 순간이 찾아왔음에도 손기정은 가슴에 밀려드는 슬픔을 참지못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손기정은 머리에 쓴 월계관으로 눈을 가렸고, 손에 들고 있는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가 최대한 보이지않도록 가렸다. 나라를 잃은 조선인으로서 손기정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그렇게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은 짧은 영광과 슬픈 시상식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금메달 소식을 보도하며 시상대 위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1936년 8월)이었다. 분노한 조선총독부는 보복으로 <동아일보>의 발간을 10개월이나 정지시켰다. 일제는 영웅으로 부상한 손기정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결집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또한 손기정은 베를린 대회에서 일장기가 없는 훈련복을 고집했으며, 사인을 할 때는 항상 한글을 고집하며 본인이 조선인임을 강조하곤 했다. 본인의 방식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일제에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는데 손기정 본인도 훗날 "내가 1등을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경기 후 바로 체포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손기정이 올림픽 금메달로 세계적인 선수가 되면서, 일제로서도 국제여론을 의식하여 손기정을 함부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손기정은 올림픽을 마치고 귀국한 후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거듭되는 감시 속에 더 이상 일본대표로도 뛰고 싶지 않았던 손기정은, 결국 1940년 아직 전성기에 마라톤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은행원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1945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해방이 찾아온다. 새로운 꿈이 생긴 손기정은 은행에 사표를 내고 절친 남승룡과 함께 조선 마라톤 보급회를 결성한다. 지도자로 마라톤으로 돌아와 자신의 후계자를 양성해내겠다는 것이었다. '태극마크를 단 우리 나라 선수가 국제무대에서 출전하여 당당히 우승하는 것'이 손기정의 새로운 목표였다.

손기정이 주목한 인물은 당시 22세의 대학생이었던 서윤복이었다. 그는 160cm에 55kg로 마라톤을 하기에 이상적인 체격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매일 전차를 따라 15km를 달릴 정도로 성실한 성품까지 겸비한 노력파였다. 손기정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도 늘 최선을 다하는 서윤복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 데자뷔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손기정은 선수단과 함께 기상하여 아침 일찍 애국가를 부르고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손기정은 항상 선수들을 독려할 때마다 "조국을 위해서 뛰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손기정이 무리하고 혹독한 훈련을 시켜도 선수단이 불평불만을 말하지 못한 것은, 항상 손기정과 남승룡 등 코치진이 훈련 때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7년,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함께 경쟁했던 미국 선수였던 존 켈리로부터 한 통의 엽서를 받게 된다.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 당시 켈리의 부탁으로 신고있던 운동화를 선물해준 인연이 있었다. 10년 후 켈리는 정말로 그 운동화를 신고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며 손기정에게 감사를 전한 것.

하지만 손기정이 엽서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바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존재였다. 보스턴은 세계 4대 마라톤 대회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지만, 정작 손기정은 켈리의 엽서를 받기 전까지 이 대회의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손기정은 올림픽 외에도 자신의 후배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나설 수 있는 국제대회가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도전을 결심한다. 

당시는 1947년으로 아직 대한민국 공식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인 미 군정 시절이었고, 한국인의 해외출국은 금지된 상태였다.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명성을 이용하여 미군정을 찾아가 선수단의 여권을 대신할 여행증명서를 발급받는 데 성공했다. 1947년 4월, 손기정은 남승룡, 서윤복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 선수단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대회 장소인 보스턴에 도착했지만 모든 상황은 순조롭지 않았다. 처음 탄 비행기에 첫 해외원정, 시차적응, 서윤복의 컨디션 난조 등 여러 가지 악재가 선수단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한국 선수단은 한국 교포와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응원단을 조직했다. 손기정은 마라톤 코스의 중요한 길목마다 한인 응원단을 '인간 이정표'로 배치하여 길잡이로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교민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동포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1947년 4월 19일,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당시 8개국 153명의 선수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고 그중에는 태극마크를 단 서윤복도 있었다. 그리고 서윤복의 곁에는 놀랍게도 코치였던 남승룡이 또다른 선수로서 함께 했다. 당시 남승룡은 이미 35세로 마라톤을 하기에는 노장이었지만 그저 태극마크를 달고 뛰어보고 싶다는 염원 하나로 출전을 결심했다. 

첫 출전임에도 서윤복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쟁쟁한 선수들을 따돌리며 선두권을 달렸다. 서윤복은 유럽 챔피언이었던 우승후보 피타넨(핀란드)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레이스 중반에 마라톤 코스에 개 한 마리가 난입하여 서윤복이 넘어져서 부상을 입는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서윤복은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다시 안간힘을 다해 뛰면서 격차를 좁혔다.

서윤복은 대회 최대의 난코스로 불린 2Km의 오르막길 구간인 '상심의 언덕'에서 체력고갈로 페이스가 떨어진 피타넨과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기적같은 역전에 성공했다. 손기정과 한국에서 오랜 시간 함께해온 오르막 훈련의 효과가 뒤늦게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결국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할 당시 서윤복의 기록은 2시간 25분 39초. 심지어 이전의 기록을 무려 4분이나 앞당긴 대회 신기록까지 달성했다. 태극기를 달고 뛰고 싶었던 손기정의 간절한 염원이 제자 서윤복을 통하여 한을 푸는 순간이었다. 

한편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남승룡은 153명 중 12위를 차지하는 선전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11년 전 올림픽에서의 손기정과 달리, 당당히 시상대 위에 오른 서윤복의 가슴에는 선명한 태극마크가 박혀있었다. 손기정은 그러한 서윤복의 모습을 바라보며 북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흘렸다. 이 이야기는 하정우(손기정)-임시완(서윤복) 주연의 신작 영화 <보스턴 1947>의 소재가 되었다.  

한국 선수단은 1947년 6월, 인천항을 통하여 금의환향했고 수만명의 인파에 둘러싸여 전국민적인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서윤복의 마라톤 우승은 해방 이후 여전히 혼란과 가난, 남북과 좌우분열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민족이 모처럼 한마음으로 뭉쳐 자존감을 회복하고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남긴다.

이후로도 손기정은 마라톤 지도자로 승승장구하며 한국 마라톤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는 어느덧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성화봉송주자로 나서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고령을 우려하여 만류했지만 손기정은 직접 주자로 나서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1988년 9월 17일 잠실주경기장, 백발의 손기정은 성화를 들고 마치 춤을 추듯 폴짝폴짝 뛰면서 달려나갔다. 그의 가슴에는 선명한 태극마크가 달려있었다. 52년 전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에게 마라톤이 아픈 손가락이었다면, 1988년 당당히 대한민국 성화 봉송 주자로 뛰는 순간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꿈이자 환희'였다. 반세기가 흘러서야 자신이 한국인임을 전 세계에 당당히 알릴수 있다는 것은, 손기정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손기정 선생은 성화봉송주자로 나섰던 순간에서 "남의 나라 국기로 우승했던 내가 50여 년 후에 우리 서울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것은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상으로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너무나도 기뻐서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회상한바 있다.

"모든 것이 길이었고 모든 곳을 달렸다. 오로지 달릴 뿐이었다." 손기정 선생이 자신의 마라톤 인생을 요약하며 남긴 어록이다. 한평생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으며 마라톤에 바쳐온 그의 고군분투 덕분에 오늘날 한국 육상의 성장과 태극마크의 가치가 주는 신성함이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벌거벗은한국사 손기정 서윤복 1947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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