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클래식 음악 팬이라면 귀를 쫑긋하게 세울 만한 영화 한 편이 개봉한다. 한국 음악가 여럿이 세계음악계에 얼굴을 내미는 등용문이 되어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무대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관객이 직접 마주하는 경연무대만이 아닌, 경연에 서기까지의 과정이 영화의 뼈대를 이룬다. 있는 그대로의 다큐멘터리가 아닌, 성장과 좌절이 섞인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영화와 음악 애호가 모두를 잡아당길 만한 흥미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콩쿠르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프로의 세계에 입문하는 등용문으로 불린다. 특히 세계 3대 콩쿠르는 수상만 하면 평생의 입지가 보장될 만큼 중요한 무대다. 신인의 등용문이기에 나이 등 엄격한 제한이 있고, 폐쇄적인 업계 특성 탓에 불공정과 관련한 논란이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한다. 논란이 일어도 유력 콩쿠르의 명성은 무너질 줄 모른다.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 다수가,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일류 클래식 음악가들이 콩쿠르 출신인 것이다.
 
뮤직 샤펠 포스터

▲ 뮤직 샤펠 포스터 ⓒ 해피송

 
한국에도 익숙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라 불린다. 러우 전쟁 이후 차이콥스키 대신 반 클레이번을 넣는 경향이 발견되긴 하지만, 무튼 퀸 엘리자베스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음악경연 중 하나인 것이다.

2015년 임지영이 바이올린 부문 1위, 2011년과 2014년, 그리고 올해 성악 부문에서 홍혜란, 황수미, 김태한이 1위를 차지해 화제가 됐다. 폐지된 부문인 작곡에서는 2008년과 2009년 연속으로 조은화와 전민재가 1위를 차지했고, 첼로 부문에서도 지난해 최하영이 1위를 수상했다. 이 중 임지영의 수상 전후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파이널리스트>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이 대회가 한국 클래식팬들에게 크게 회자됐던 사례도 있다. 다름 아닌 2003년,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은 임동혁이 참가했던 바로 그해다. 심사위원단은 완벽에 가까운 연주였다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임동혁을 폰 에커슈타인과 셴웬유의 뒤인 3위로 평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임동혁이 수상을 거부하고 사무국에 심사에 대한 불만을 전달한 것이다. 2위 수상자인 셴웬유의 연주가 터무니없는 수준이어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상위 수상자들을 가르친 이가 당시 심사위원이었다는 사실이 호사가들을 통해 전해지며 커다란 파문으로 이어졌다.
 
뮤직 샤펠 스틸컷

▲ 뮤직 샤펠 스틸컷 ⓒ 해피송

 
최종 경연 직전 2주의 합숙... 그 비밀스런 세계
 
고고하기만 할 것 같은 클래식 세계다. 그러나 그곳 또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계다. 1위를 하면 평생이 보장되는 자리다. 퀸 엘리자베스 수상자는 1년 동안 최고 마스터에게 직접 사사할 수 있다는 특전이 주어진다. 자연히 경쟁은 치열할 밖에 없다. 콩쿠르의 뒷얘기는 우리의 생각보다 적나라할 수도 있다.
 
뮤직샤펠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최종 경연 진출자들이 마지막 2주를 보내는 숙소다. 벨기에 워털루에 위치한 이 궁에서 참석자들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연습에 매진한다. 노트북과 스마트폰, 라디오를 포함한 전자기기 일체가 몰수된다. TV 시청조차 금지되는 환경 속에서 오로지 경연할 악보 한 장과 피아노만 주어지는 것이다. 경쟁자들과 합숙하며 얻는 스트레스가 상당하여, 본 무대만이 아닌 2주의 합숙 또한 경연을 이룬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13일 개봉을 앞둔 <뮤직 샤펠>이 이 과정을 다룬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부문 최종 경연 진출자 12명, 소위 파이널리스트들의 합숙 동안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제니퍼(타커 니콜라이 분)다. 제게 거의 전 인생을 건 엄마(루스 벡쿼트 분)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뮤직 샤펠에 들어온 그녀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참가자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두꺼운 벽을 쌓고서 다른 참가자들과 특별한 대화조차 하지 않는다. 실력은 참가자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낼 만큼 뛰어나지만 어딘지 모를 불안이 그녀 주변을 떠돈다.
 
뮤직 샤펠 스틸컷

▲ 뮤직 샤펠 스틸컷 ⓒ 해피송

 
골이 깊을수록 봉우리는 높아질까 
 
파이널리스트는 죄다 내로라하는 실력자다. 특히 나자렌코(재커리 샤드린 분)라는 피아니스트는 특출난 재능을 가졌다. 마지막 예선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제니퍼가 눈물을 쏟았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제 음악과는 영 딴판인 인물로, 거의 괴롭힌다고 해도 좋을 만큼 출연자들의 신경을 건드린다. 다른 참가자들이란 모두 경쟁자이고 밟아서 없애버려야 하는 상대란 식이다. 2주의 합숙 동안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며 우정을 나누고, 경쟁하며 대립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뮤직 샤펠에 오기까지 제니퍼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조금씩 드러나며 영화는 진면목을 보인다.
 
빛에는 그림자가, 표면에는 이면이 따르는 법이다. 호수 위를 고고하게 유영하는 백조가 물 아래서는 끊임없이 발차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빛나는 예술적 성취 또한 대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제니퍼의 연주 아래 담긴 이야기는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불행한 부모,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딸을 아꼈다. 어머니는 제가 닿지 못한 꿈을 그녀에게 투영하고, 아버지는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그녀는 제가 선택한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생각하면 '겨울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는 겨울을, 그 추위를 끔찍이 싫어한다고도 말한다.
 
겨울과 추위를 싫어하는, 그러나 러시아에서 태어나 겨울과 추위를 연주하려는 이 피아니스트는 2주의 시간 동안 이제껏 겪은 바 없는 시험을 요구받는다. <뮤직 샤펠>은 그녀가 제게 닥친 시험에 맞서는 이야기이며, 좌절과 고통이 예술에 닿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술과 음악과 영화를, 클래식과 라흐마니노프와 겨울을 좋아하는 이라면 반드시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뮤직 샤펠 스틸컷

▲ 뮤직 샤펠 스틸컷 ⓒ 해피송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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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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