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책 종이 가위> 포스터 이미지

영화 <책 종이 가위> 포스터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책을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참 무던히도 열심히 책을 이것저것 사서 모으며 살았다. 중간에 장마에 침수되어 날려먹기도 하고, 이삿짐 와중에 폐품으로 잘못 넘겨져 영영 잃어버린 것도 적지 않지만, 기이하게도 장서량이 줄어들 때마다 마치 벌충이라도 하려는 양 더 맹목적으로 책을 다시 끌어 모으곤 했었다. 그 결과는 아껴 모았다면 집 한 채 장만했을지도 모를 거대한 책의 무더기와 그 곁에서 새우잠 자는 필자의 초상이다.
 
내용이 좋아서 애착을 가지는 책이 있고, 그 책을 수중에 넣던 과정이나 다시 삶에 사연이 깃들어 유독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책을 구하느라 제법 많은 것을 포기해가면서 어렵게 마련한 책들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첫 아르바이트를 통해 장만한 모 사회과학서 전집, 절판되어 희귀본이 되고만 단행본, 여러 번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 특유의 의역이 더 정감 가는 판본 등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책의 디자인이 아름답거나 우아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특히 더 애정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부터 책의 저자 외에도 외서의 경우엔 번역자가 누구인지, 출판사가 어디인지 눈여겨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나름대로 자신의 선구안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도가 생겨나면서 그런 척도는 몇 가지 더 추가되기 시작했다. 편집자가 누구인지, 해당 판본의 신뢰도와 인지도 수준,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의 디자인이다. 단지 금테를 둘렀다고 좋아할 게 아니다. 얼마나 책의 내용을 소화하고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해당 서적의 품격을 상승시키는가가 담긴 문제다. 지나치게 책을 펼치기 복잡하게 만들거나 아예 포기하게 만든다면 올바른 디자인은 아닐 것이다. 수수하면서도 책을 집어들 때 보람과 기쁨이 충만하도록 해주는 마법과도 같은 역할을 북 디자인은 담당하고 있었다.
 
자신의 작업으로 '만권당' 넘어선 북 디자이너 이야기
 
 영화 <책 종이 가위> 스틸 이미지

영화 <책 종이 가위>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여기에 30여 년간 1만 5000권이 넘는 책의 디자인을 수행한 이가 있다.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는 일평생 수작업으로 인문학 커버디자인 위주로 책이 탄생하는 마지막 과정을 담당해 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문하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30대 초반의 히로세 나나코 감독은 극영화 <여명>에 이어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첫 장편 다큐멘터리로 이 장인의 삶과 작업을 농축한다. 제목 또한 주인공의 작업 스타일을 고스란히 형상화해놓은 모양새다. <책 종이 가위>. 이보다 단순명료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영화 시작부터 등장하지만 구구절절한 해설이 바로 따라붙진 않는다. 첫 번째 장의 표제는 '진열하다'. 기쿠치 노부요시가 작업한 결과물로서의 책이 차례로 등장한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대표작들이 별다른 설명은 따로 붙지 않은 채 표제 그대로 화면 가운데 '진열된다'. 그렇게 관객은 주인공이 마치 분신처럼 자신의 조각들을 떼어 옮긴 것 마냥 북 디자인의 정수를 훑어가며 주인공과의 대면을 기다리게 된다. 흑백의 글자와 여백으로 구성된 고즈넉한 작은 정원을 보는 느낌이다. 주인공과의 만남을 상상하며 그가 어떤 얼굴과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순간이 거듭 이어진다.
 
이제 완성되기 전 단계의 작업장과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다. 두 번째 장의 표제는 '자로 재다'. 그리고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책의 구성 요소들이 하나둘 그림으로 설명되기 시작한다. ① 띠지 ② 커버 ③ 표지 ④ 가름끈 ⑤ 헤드밴드(꽃천), 대략 이 다섯 가지 지점이 저자와 편집자의 손을 떠난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독자 앞에 드러나기 전 단계에서 기쿠치 노부요시를 비롯한 북 디자이너들이 소화해야 할 몫이다. 그는 70이 훌쩍 넘은 노구에도 여전히 정확한 손과 녹슬지 않은 눈썰미로 mm 단위의 차이를 포착하고 이것저것 시도해가며 그만의 이상화된 북 디자인에 도전한다. 그의 구상을 디지털 작업으로 옮기는 어시스턴트 역시 38년째 그와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디지털 작업 역시 아날로그적 향취를 물씬 풍긴다.
 
이어서 주인공의 간략한 일생이 요약된다. 1943년생 소년은 19세에 북 디자인에 매료되고 만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작가이자 평론가 모리스 블랑쇼의 1955년작 <문학의 공간>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1960년대 격동의 시대, 상아탑에 갇힌 디자인 철학과 자신이 맞지 않다 여겼던 청년시절 주인공은 명문 미술대를 중퇴하고 상업디자인 현장에서 12년간 종사한 후 31세에 전업 북 디자이너로 나선다. 프리랜서로 살겠다는 제법 비장한 결심이었던 셈이다. 초창기에 그가 맡았던 대표작의 작가인 후루이 요시키치와는 일생의 벗이 되고 이후 30여 년을 소처럼 일해 왔다.
 
일흔 넘은 나이에도 길 찾아 떠나는 장인의 모험
 
 영화 <책 종이 가위> 스틸 이미지

영화 <책 종이 가위>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세 번째 장 '연결하다'에선 기쿠치 노부요시의 디자인 철학에 대한 주변인들의 소회와 입장이 소개된다. 출판사 관계자들의 고충 토로와 공감이 교차하고, 평범한 이들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미묘한 북 디자인 요소들의 관계성이 설명된다. 명조체를 구사하면서 여백과 원고 내용의 조화를 중시하는 기쿠치 노부요시와 그의 제자인 미토베 이사오의 보다 신세대 취향인 고딕체의 비교와 함께 제자의 스타일을 자기 방식대로 취합해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 않는 주인공의 태도에 대한 제자의 코멘트가 뒤따른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스승님의 평가를 물으니 자기 세대 작업에 '수의'를 입히는 역할이라 답을 들었다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는 제자의 표정이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네 번째 장 '찾다'는 '만권당'이란 말도 있지만, 그를 훌쩍 넘어버린 수량의 책을 디자인하면서 아이디어가 고갈되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이는 주인공이 새로운 창의력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다룬다. 자신의 글을 모은 에세이 출간을 준비하며 분주한 주인공은 북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에 더해 창작자로서의 동기부여 문제에 대해 지난 수십 년간 이어온 고민을 지인들과 나눈다. 작가와 편집자, 번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북 디자이너의 영역, 하지만 원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명을 전제로 작업하는 그로서는 그 간극은 평생 넘어설 수 없지만 돌파하고픈 심연의 틈 같은 천형일 테다.
 
다섯 번째 장 '묶다'에선 그런 기쿠치 노부요시의 고민이 더 확장되어 선보인다. 그와 오랜 교분을 쌓아온 출판사 관계자들이 주인공이 몇 해 전부터 유독 위기의 출판시장에 정면으로 반하는, 마치 도발하는 것처럼 읽혀지는 북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고 증언한다. 그중에는 심지어 채택을 거부당한 것까지 나왔다. 신뢰와 경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해당업계로서는 드문 일일 것이다. 해당 작업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일본 내에서 구텐베르크 이후 이어져오던 활판인쇄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얼어붙은 출판시장 상황 때문에 결국 소멸하는 과정이 애잔하게 덧입혀진다.

그런 암울한 업계 전망 가운데 전통적인 북 디자인을 고수하는 기쿠치 노부요시와 그의 직계 제자로 일가를 이루는 데 성공한 제자 미토베가 마침내 한자리에 만난다. 제자의 작품에 대한 소회와 함께 동료로서 서로의 책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대목에선 사제 관계를 떠나 신구세대 북 디자이너의 교류를 구현하는 장면으로 관객에게 압축적으로 선보여진다.
 
그 다음, 여섯 번째 장은 '만지다'란 표제다. 그로 하여금 북 디자인의 세계로 인도하게 했던 모리스 블랑쇼의 신간을 수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쿠치 노부요시는 떠맡게 된다. 그것도 그가 청년기를 보낸 1968년 혁명 당시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대담집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시작을 복기하며 주인공은 정열적으로 작업에 임한다. 이제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단종 예정된 고급종이를 공장에 방문해 선별하고 색상을 손본다. 자기 욕심 덕분에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죄송하다며 직원들에게 사죄하는 풍경, 그리고 출판 불황시대에 서점에 신간이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며 자신의 작업이 끝났음을 각인하는 시간이 연속된다.
 
마지막 일곱 번째 장 '놓아주다'가 도래할 시간이 다가온다. 스스로 뜻 깊었던 모리스 블랑쇼 연작을 마친 후 소회와 함께 자신이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 미팅 룸 대용으로 단골이 된 고풍스러운 카페 '꽃나무'에 얽힌 일화들, 그리고 원고와 편집이 마친 뒤에야 임무가 맡겨지는 수주 작업에서 어떻게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평생의 질문에 주인공은 응한다. 그는 주어진 역할 아래에서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는 것에서 창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토록 찬란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성취감이 없다'는 표현을 구사하는 주인공의 답변에 관객은 흠칫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회한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자신에게 기력이 남은 한 비록 새로운 시대의 유행과는 동떨어져 보일지라도 작업에 계속 도전하겠다는 타고난 북 디자이너의 결기 표현일 테다.
 
기예가 극한에 다르면 '도'와 통한다
 
 영화 <책 종이 가위> 스틸 이미지

영화 <책 종이 가위>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우리는 일본이나 독일의 기술 장인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볼 때마다 '장인'이란 표현을 떠올리곤 한다. 단지 기술을 물려받고 전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순히 고급 기술자로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읽던 직업의 '자아실현' 기능을 한몸에 구현하다시피 한 그런 존재들을 볼 때마다 경외심에 휩싸이게 된다.

여기에서 <책 종이 가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누군가는 그저 기능적인 역할로 치부할지 몰라도 그 스스로 일가를 이룬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는 자신만의 책에 대한 철학과 함께 자신이 그 책을 완성시켜낸다는 자부심과 그 일의 엄중한 무게감까지 단 한 번도 영화 속에서 소리 높여 외치지 않을지언정 온전히 화면의 공기 속에 자신의 이념을 채워내고 있었다.
 
히로세 나나코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서 착실히 배웠을 대상에 대한 존중과 함께 장인의 인문학적 태도에 깊이 감화되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감독의 부친도 북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주변 지인들이 기쿠치 노부요시에게 보내던 무한대의 신뢰와 경외심을 감독 또한 한 차례도 놓지 않고 카메라를 들었음직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라면, (비록 영화가 공개된 2019년 이후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위기로 출판업계는 더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잘 만들어진 책 한 권의 향기에 취해가며 조심조심 띠지를 만지는 순간에 기쿠치 노부요시의 손길을 떠올릴 이가 제법 여럿 나올 만하다.
 
<작품정보>
책 종이 가위 book-paper-scissors
2019|일본|다큐멘터리
2023.09.13. 개봉|93분|전체관람가
감독/촬영/편집 히로세 나나코
출연 기쿠치 노부요시, 미토베 이사오, 후루이 요시키치, 히로미 진보
기획/제작 분복(分福)
수입 (주)디오시네마, 게이트식스
배급 (주)디오시네마
공동 배급 게이트식스
 
2019 24회 부산국제영화제
2019 20회 도쿄필멕스국제영화제 특별언급
책 종이 가위 히로세 나나코 감독 기쿠치 노부요시 미토베 이사오 후루이 요시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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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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