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 장혜령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을 첫 방문지로 선택한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시종일관 딸과 애틋한 관계임을 드러냈다. 한국을 잘 알고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아는 딸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지난 1일 입국해 다양한 일정을 소화한 후 6일 종로의 한 호텔의 루프탑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는 산불이 번져오는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고 사랑과 낭만에 흠뻑 취한 네 젊은이가 벌이는 한 여름의 이야기다.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거장 감독이라 불리는 그는 <어파이어>로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전작 <바바라>에 이어 두 번째다. <운디네>에 이어 원소 3부작 중 '불'을 테마로 했다.

"젊은이들이 더 이상 여름을 갖지 못할까 걱정"
  
 <어파이어> 언론시사회

<어파이어> 언론시사회 ⓒ 장혜령

 
- 언론 시사회에서 아시아 최초 방문이고 한국을 첫 번째로 찾은 이유가 딸의 추천이라고 들었어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요. 지하철에서 빨간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의 다리 타투를 유심히 보게 되었죠. 딸이 한국은 타투가 금지였던 나라라고 알려줬거든요. 그 여성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웃고 있었어요. 제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어서인가 싶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같이 있던 남성이 여자친구라며 <옐라>의 주인공처럼 입고 있다고 말해주더군요. 그 순간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겪은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창동 감독, 오정미 각본가와 저녁 식사 자리였어요. 영화 제작에 대해 지체 없이 바로, 거침없이 술술 대화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좋아하는 감독님을 만나는 멋진 순간이었죠."
 
- 그동안 디스토피아 혹은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셨어요. <어파이어>는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경쾌한 톤인데요. 
"영화의 톤이 밝아도 현장은 무겁고 힘든 경우가 많은데요. <어파이어>는 가벼운 톤이지만 힘들지 않았어요. 팀이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주었고 그게 영화에 잘 반영되어서 즐거운 경험이었죠."
 
- 역사 3부작이라고 불리는 <바바라>, <피닉스>, <트랜짓>에 이어 원소 3부작 중 <운디네>는 물을 주제로 하고, 이번 <어파이어>는 불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요. 
"솔직히 전 무척 게으른 사람이에요. <운디네>를 만들고 성취감에 빠져 누워만 있고 싶어졌거든요. 역사 3부작을 마치면서 원소 3부작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죠. 공식적이라 어떻게든 하게 되는 거죠. 이제 '공기'를 주제로 한 영화가 남았는데요. 지금 인터뷰 중에도 바람도 불고 공기도 가득하고 어쩌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네요. 3부작의 세 번째 영화보다는 다른 것을 먼저 만들지 않을까 싶어요."
 
- '불'은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호주에서 산불이 났었는데 코알라가 불이 붙어 죽는 장면을 본 적 있어요. 가족과 튀르키예 갔을 때도 산불로 폐허가 된 지역을 봤습니다. 생명체가 죽어있는 느낌이었고 아무 소리도 없었죠. 인간이 지구와 기후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일이 산불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청년들이 와인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춤추며 즐길 수 있는 여름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겠다는 걱정이 컸던 것 같네요."
 
- '불'은 사랑이거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죠. 영화의 결말이 모호하게 끝났습니다. 미래의 희망은 없는 건가요. 일부러 배제한 건지 궁금해요.
"어제 호텔방에서 차기작의 중요한 신을 썼어요. 평소라면 어려웠을 생각을 시차 때문에 5일 만에 쓸 수 있었죠. 딸은 제 영화 대부분을 슬퍼하는데 '아름답다'고 코멘트해 줬어요. 아마 다음 영화에서는 확신에 찬 희망을 볼 수 있을 겁니다(웃음)."
 
- 영화가 레온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초반에는 산불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는데요. 눈짓이나 시선을 통해 여운을 주는 특징이 좋았습니다.
"(선물 받은) 에릭 로메르 DVD에 작은 책이 같이 있었어요. 그 책에 '카메라의 위치는 도덕적 위치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죠. 영화란 자화상이에요. 우리는 레온도 아니고 영화도 레온이 아니죠. 오만하고 겁 많은 사람의 자화상이 영화예요. 객관적 현실과 레온을 통한 주체, 이 두 가지의 합입니다. 과거와 현재,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게 영화의 본질인 거죠."
 
- 레온은 작가의식에 빠져 있는 서독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이 느껴졌습니다.
"서독은 미국의 자본주의를 따랐고 동독은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따랐잖아요. 저희 부모님이 동독에서 서독으로 피난 오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동독 출신임에도 서독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게 투영되었어요. 레온은 동독을 장난스럽게 다루고 미국인이 되고 싶어 해요. 이름도 미국식인데 아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만함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 감독님의 작품이 베를린이나 발트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요.
"베를린은 유년 시절을 보내서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운 도시였어요. 베를린에서 첫 영화를 촬영하기까지 거리 두기와 시간이 필요했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영화도 찍게 되었습니다. 발트해는 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베를린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바다예요. 베를린에 가기 위한 바다였는데요. 지금은 연결돼서 2시간 이내로 가능한 기차가 다녀요. 그리움의 공간이 영화를 위한 공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어파이어> 스틸컷

영화 <어파이어>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 여성 주인공이 '니나 호스'에서 '파울라 베어'로 세대교체된 건가요.
"세대교체는 아니에요. 니나랑은 6개 작품을 했고 당연히 한 번쯤은 작업할 겁니다. 어쩌면 아내보다 더 자주 봤었겠네요. <피닉스> 이후 모든 것을 쏟아 냈다는 느낌을 서로 받았어요. 니나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 했고 저도 페촐트의 배우로 남아 있길 원하지 않았거든요. 파울라와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과 찍은 <프란츠>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놀라웠고 새로움을 느꼈습니다. 둘은 엄연히 달라요."
 
- 토마스 슈베르트, 랭스턴 위벨 등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다른 영화에도 나올 예정인가요.
"독일에는 영화업계가 없다고 보면 돼요. 미국이나 프랑스에 비하면 매우 작은 편이죠. 이유는 과거 나치 정부와 선전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 공동체가 축소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동맹을 만들어 내야 해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이 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서로 잘 통해서 계속 작업 가능한 집단을 만들어 나가는 게 목표입니다."
 
- 독일은 영화 강국이고 많은 감독을 배출하기도 했어요. 영화 업계의 축소 혹은 소멸 이야기를 듣자니 놀랍습니다.
"독일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마렌 아데, 빔 벤더스 같은 감독을 배출했습니다만 이들은 흔히 독일에서 말하는 TV 산업과 대척점에 선 사람들이에요. 독일의 주류를 거부하고 독일 영화 산업을 반대하면서 태동한 사람들이죠."
 
- 최근 OTT에서 대중적인 작품이 주류인 상황인데요. 이 분야에서 기회를 얻을 생각이 있으신가요.
"전 TV나 컴퓨터로 보는 OTT 쪽은 관심 없어요. 시청 형태가 완전히 다르니까요. 여럿이 함께 보는 극장과 혼자서 보는 경험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 감독님의 영화에는 주인공이 자전거 타는 장면이 종종 나와요. <어파이어>에서도 나디아가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감독님에게 자전거는 어떤 존재인지요.

"자전거는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깊어요. 자전거와 차와는 다른 이동 수단이잖아요. 15년 전부터 독일도 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고무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20년 전 니나 호스랑 처음 찍은 영화 <볼프스부르크>가 베트남에서 상영한 적 있어요. 자전거 타는 장면으로 대대적인 홍보 포스터를 만들었더라고요. 베트남 관람객이 자전거 타는 장면을 대부분 인상적으로 꼽길래 자전거와 아시아 문화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죠. 그밖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만춘>을 보면 해변에서 자전거 타는 장면이 나와요. 아름다운 사랑 장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침실에 그 장면을 걸어두고 매일 보기도 했어요."
 
- 영화의 미장센도 멋졌지만 음악 선곡, 음향도 멋졌습니다. 벌레 소리가 끈질기게 들리고 레온의 소설 '클럽 샌드위치'가 전복되는 것, 내레이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프닝 곡이나 삽입곡 등은 사전에 음악감독님과 협의된 건가요?
"시나리오 쓸 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반복적으로 들어요. 배우들에게 이 장면에서 이 음악이 삽입된다고 말해줘요. 그러면 상상해 나가면서 춤추듯 연기가 나와요. 예전에는 줌 촬영이나 보이스 오버를 싫어했었는데, <트랜짓>에서 처음 시도해 보고 좋아서 이번에도 넣었습니다. 화자가 말하는 순간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건 현재지만 동시에 과거가 되어버리잖아요. 영화에서 여름을 이야기해도 가을에 접어들면서 여름을 기억하는 멜랑꼴리함이 느껴집니다. 영화는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되는 거죠. 영화에는 이미지만큼 듣는 공감도 중요한데 시각적인 것에 빼앗겨 청각적인 것을 놓치게 되죠. 영화에서 산불이 나면서 아무 소리도 느낄 수 없게 되잖아요. 그래서 곤충, 새의 아름다운 사운드와 불의 파괴력, 숲의 풍부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 미디어 아티스트 '하룬 파로키'와 작업하기도 하셨죠. 감독님은 영화 비평가, 미디어 아티스트, 영화감독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셨어요.
"비평가 활동은 사실 학생 때 공짜로 영화 볼 수 있어서 선택한 거예요(웃음). 하룬은 저를 영화계로 인도해 준 친한 동료이자 축구 동아리 팀원, 교수님이에요. 영화감독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미디어 아티스트로 큰 성공을 거두었죠. 13개의 공동 각본을 썼어요. 그가 만들지 못한 커리어를 만들고 싶어서 영화감독이 되었던 것도 있어요. "

"남과 북, 함께 성장하기 위해 많은 시간 필요해"
  
 크리스티안 페촐트

크리스티안 페촐트 ⓒ 장혜령

 
- 독일은 통일을 했지만 한국은 아직 분단국가입니다. 부럽기도 해요.
"독일의 분단은 스스로 잘못해서 된 결과이자 홀로코스트도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어요. 한국은 잘못이 없다는 게 큰 차이점이죠. 잘못한 국가가 먼저 통일된 끔찍하고도 슬픈 결과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다가 아니에요. 남한과 북한도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통일 이후 태어난 사람과 만나도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있거든요. 아직도 같은 독일인이고 같은 언어를 써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 과거 독일과 같은 분단국가를 방문하면서 어떤 영감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 와서 어떤 영화를 만들겠다는 영감은 받지 못했지만 분명한 건 돌아가면 다른 시선을 갖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독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독일은 과거의 잘못을 씻어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당시 청년들은 본인 삶을 즐기지 못해 불만이 쌓였고 이로 인한 분노를 자주 목격했거든요."
 
- 한국에서 <엘리멘탈>이 성공하고 <바비>가 실패한 것처럼 (나라마다) 문화적, 경험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감독님 영화는 역사, 신화, 음악 등 인문학적 소양이나 문화적 배경이 두꺼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파이어>를 한국 관객이 어떻게 봐주었으면 하시는지요.
"<버닝>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장면에서 선전 방송이 들리는데 출처를 몰랐어요. DMZ도 알지 못해서 그저 나라의 분열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죠. 영화를 관람할 때 누구나 모든 역사와 상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보편적인 정서를 추측할 수 있는 꿈의 공장이라는 거죠. 영화는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우듯이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는 대상이 아니에요. 놀라운 점은 어떤 점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을수록 멋지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영화의 역설이랍니다."
어파이어 크리스티안페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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