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은 크리스마스 아침 머리맡에 놓여 있을 선물꾸러미를 기대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붉은 옷을 입은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하늘을 날아와서는 굴뚝도 없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가리라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거라는 얘기다. 머리맡에 영어단어가 잔뜩 녹음된 카세트테이프가 놓이기 전까지는 나 역시 산타클로스와 그의 방문을 진실로 믿었었다.
 
서구의 설화와 자본주의의 요구, 대충매체가 심어준 이미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오늘의 크리스마스는 국경과 문화를 넘어 전 세계 아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즐거운 날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합리성이 제일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일상 가운데서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영역을 앗아가지 않기 위하여 품을 들이는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구해서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머리맡에 살포시 그를 놓아두고, 다음날 아이가 포장을 뜯고 웃는 그 모습을 보는 것으로 모든 수고가 보상을 받았다며 만족해한다.
 
그래서일까. 크리스마스엔 유독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가 많이 등장한다.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오로지 크리스마스만 있는 건 아닐 텐데도 이 날엔 유독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가질 법한 생각들이 자유롭게 넘실대는 이야기를 선보이곤 하는 것이다.
 
닥터 후: 더 스노우맨 포스터

▲ 닥터 후: 더 스노우맨 포스터 ⓒ BBC

 
아이들의 날을 사수하려는 각별한 노력
 
<닥터 후>는 각별히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오래된 시리즈다. 크리스마스면 정규 시즌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거나 휴방기거나 상관없이 독자적인 스페셜 회차를 만들어 방영하고는 한다. 2005년부터 출발한 뉴 시즌은 매년 크리스마스 스페셜을 별도로 발표했는데 <닥터 후: 더 스노우맨>도 그중 하나다.
 
<더 스노우맨>은 <닥터 후> 뉴 시즌 7 방영 중 맞이한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제작됐으며 시즌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가름하는 의미 있는 회차로 편성됐다. 11대 닥터(맷 스미스)와 함께한 두 컴패니언 에이미 폰드(카렌 길런 분)와 로리 윌리암스(아서 다빌 분)가 하차하고 뒤를 잇는 클라라 오스왈드(제나 콜먼 분)가 등장하는 의미 있는 편이기도 하다.
 
뉴 시즌 여덟 번째 크리스마스 스페셜로 나온 이 작품은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다. 소년 월터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다. 특이한 건 다른 아이들이 월터를 따돌리는 게 아니라 월터가 그들과 함께 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월터는 다른 아이들이 멍청하다고 여기고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리하여 그가 평소처럼 홀로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닥터 후: 더 스노우맨 스틸컷

▲ 닥터 후: 더 스노우맨 스틸컷 ⓒ BBC

 
외로운 영웅이 외로운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이 서로 눈싸움을 하고 뒹굴던 어느 겨울, 월터는 홀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선생님이 다가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라 권해보기도 하지만 월터는 그녀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리고는 "애들은 멍청해"라고 반복해 이야기한다. 그때 월터의 귀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월터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무대는 월터가 자라 박사가 된 뒤로 옮겨간다. 월터는 제게 말을 걸어온 것이 눈사람이라 믿고 눈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목소리는 서서히 제 힘을 키우고 월터와 함께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낼 때를 준비한다. 바로 그 때, 런던에 닥터가 도착하는 것이다.
 
한 시절을 함께 한 컴패니언을 영영 잃어버린 닥터다. 어느덧 천 살이 넘어버린 닥터는 벌써 여러 명의 컴패니언과 이별을 했다. 에이미와 로리 또한 그중 둘일 뿐인데, 이별이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으로 닥터는 여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수시로 닥터 곁을 떠나고 마침내는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혼자 남은 닥터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제 종족 가운데 마지막 남은, 또 가까운 이를 죄다 잃어버려야 하는 저의 운명에 괴로워할 뿐이다.
  
닥터 후: 더 스노우맨 스틸컷

▲ 닥터 후: 더 스노우맨 스틸컷 ⓒ BBC

 
아이에게 꿈과 환상을 주어야 하는 이유
 
그런 닥터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나니 그녀가 바로 클라라 오스왈드가 되겠다. 이후 긴 시간을 함께 할 새로운 컴패니언의 등장이 혼자 남은 닥터를 사로잡는다. 사람의 상실은 사람으로 덮는 법이라고, 클라라의 등장 뒤 닥터의 세계엔 다시 활기가 돈다. 그들 앞에 나타나는 역경은 둘의 마음을 깊게 하는 과제일 뿐이다. 닥터는 월터와 그의 스노우맨이 불러온 위기를 솜씨 좋게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기에 이른다.
 
<더 스노우맨>은 <닥터 후>의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모험은 계속되고 문제는 해결된다. 간절히 믿으면 이뤄지고 상상은 자주 현실이 된다. 이 엄혹한 세상에선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일이 <닥터 후>의 세계에선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 아이들은 이로부터 산타가 가져다주는 선물과 같은 소소한 기적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른의 그것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넓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넓은 세상을 살아낸 아이는 마침내 어른이 되어 제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 넓혀낼 수 있을 것이다.
 
<닥터 후>가 거듭 크리스마스 스페셜 회차를 제작하는 건, 그 가운데 꿈과 환상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이 같은 이유 때문일 테다. 끝없이 펼치는 상상, 미지의 세계로 거듭 나아가는 용기야말로 이 드라마가 오랜 인기를 구가하는 비결이라고 나는 믿는다.
 
닥터 후: 더 스노우맨 스틸컷

▲ 닥터 후: 더 스노우맨 스틸컷 ⓒ 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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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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