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헌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 감독(왼쪽)-루벤 바레인 대표팀 감독

임도헌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 감독(왼쪽)-루벤 바레인 대표팀 감독 ⓒ 아시아배구연맹

 
충격적이지 않은 충격패. 그래서 더 후유증도 크다. 남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14일 대만에서 열린 2023 아시아 챌린지 컵 대회 준결승에서 바레인에게 세트 스코어 0-3으로 패했다.

결과만 보면, 분명 충격적이다. 이날 경기 직전까지 세계랭킹 29위였던 한국이 77위에 불과한 바레인에게, 그것도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고 완패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바레인은 한국 남자배구가 실력적으로도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개인 기량도 바레인의 주 공격수 모하메드 야쿱(29), 세터 마흐무드(30)는 한국 대표팀보다 수준이 높았다. 바레인은 지난해 8월 열린 AVC컵 대회에서도 한국을 3-0으로 완파하고 3위를 자치했었다. 당시에도 바레인은 세계랭킹이 70위에 불과했다.

놀라운 점은 또 있다. 바레인은 대표팀 선수 전원이 자국 선수였다. 감독만 외국인이었다. 중동의 신흥 강호 카타르처럼 유럽, 남미,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을 귀화시켜 만든 다국적 팀이 아니었다. 한편, 바레인 대표팀 감독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벤(53) 감독이다. 외국인 감독이 남미식 조직력과 빠르고 강한 공격 스타일로 다져가고 있었다.

'3부 리그' 아시아 중하위권 대회에서도 '휘청'

한국 남자배구가 이번 아시아 챌린지 컵 대회에 출전한 건, 세계 16강이 겨루는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 대회 출전권을 따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3위로 마감하면서 초장부터 그 꿈이 무산됐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남녀 배구 모두 VNL 대회를 유럽 프로축구 리그처럼 '승강제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

때문에 VNL 출전 자격이 없는 아시아 국가가 VNL 출전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3부 리그 격인 '아시아(AVC) 챌린지 컵(Challenge Cup)'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야, 2부 리그 격인 '국제배구연맹(FIVB) 챌린저 컵(Challenger Cup)' 대회에 진출할 수 있고, 이 대회에서도 우승을 해야 1부 리그 격인 VNL 출전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올해 VNL에서 '도전 팀 중 최하위'는 FIVB 챌린저 컵 대회로 강등된다. 한국 여자배구는 '핵심 팀'이기 때문에 2024년 VNL까지는 강등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올해 한국 여자배구는 국제대회 1부 리그인 VNL에서 전패를 했고, 남자배구는 3부 리그인 아시아 챌린지 컵에서도 3위에 그쳐 체면을 더욱 구겼다. 더군다나 이 대회는 일본, 이란, 중국, 카타르 등 강호들이 출전하지 않는 아시아 중하위권 대회였다.

감독과 68일 훈련, 정지석 복귀... 결과는 '또 참사'
 
 한국 남자배구, 세계랭킹 77위 바레인에 완패 경기 (2023.7.14)

한국 남자배구, 세계랭킹 77위 바레인에 완패 경기 (2023.7.14) ⓒ 아시아배구연맹

 
씁쓸하고 뼈아픈 대목은 또 있다. 남자배구는 이번 아시아 챌린지 컵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임도헌(51) 대표팀 전임 감독이 선수들과 함께 지난 5월 1일부터 대회 개막 전날인 7월 7일까지 무려 2개월이 넘는 68일 동안 대표팀 소집훈련을 실시했다. 여자배구 대표팀의 VNL 준비 소집훈련 기간(36일)보다 두 배나 많이 했다.

또한 남자배구는 '데이트 폭력' 의혹으로 국가대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던 정지석(28)까지 징계 기간이 끝나자 바로 대표팀에 복귀시켰다. 도덕성 논란이 있는 선수에 대한 팬들의 인식이 여전히 좋지 않지만, 국제경쟁력 회복을 위해 재발탁했다.

그런데도 결과는 아시아 중하위권 대회에서도 힘겨운 수준이라는 냉혹한 현실만 또다시 확인했다. 실리와 명분 어느 것도 얻지 못했고, 대표팀 이미지도 마이너스가 됐다.

그러다 보니, 임도헌 감독을 향한 배구팬들의 비판도 커지고 있다. 임 감독은 지난 2019년 5월부터 5년째 남자배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대표팀의 플레이 스타일이 과거와 달라진 면이 잘 보이지 않고 정체됐다. 반면, 세계 강호와 아시아 중하위권 팀들까지 급성장하면서 국제 무대에서 한국 남자배구의 위상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는 임도헌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남자배구가 국제경쟁력을 잃고 V리그 인기까지 동반 추락한 데는 국내 감독들의 무책임, 세계 배구 흐름과 거리가 먼 패턴 고수도 절반 이상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경쟁력·V리그 인기 '추락'... 국내 지도자도 책임 크다

특히 지난 2019년 5월, 도쿄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올림픽 세계예선전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발생한 '대표팀 감독 이탈 사태'는 남자배구 역사에 치명타가 됐다.

당시 김호철 남자배구 대표팀 감독은 '대표팀 전임 감독을 맡고 있던 도중에 프로팀으로 가기 위해 국내 프로구단 고위층을 만나 감독직을 요청한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그 일로 대한배구협회와 대한체육회로부터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고, 김 감독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대표팀 감독을 자진 사퇴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호철 대표팀 체제에서 수석코치를 맡고 있던 임도헌 감독이 바톤을 이어받았지만, 잘 풀릴 리가 만무했다. 결국 남자배구는 올림픽 세계예선전에서 3전 전패로 탈락했고, 2020년 1월에 열린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에서도 3위에 그쳐 도쿄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다. 반면, 여자배구는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고, 올림픽 4강 신화까지 달성하는 기적의 드라마를 썼다.

그 여파는 국내 프로 리그인 V리그에서 여자배구 인기 급상승, 남자배구 인기 추락으로 직결됐다. 실제로 여자배구는 그해 열린 2019-2020시즌 V리그부터 지난 시즌까지 케이블TV 시청률에서 프로야구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솟은 반면, 남자배구는 2019-2020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지속적으로 TV 시청률과 관중이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또한 남자배구도 V리그에서 외국인 선수에 의존하는 몰빵 배구가 국제경쟁력 추락의 주 요인으로 지적돼 왔지만,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남녀 모두 대표팀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가면, V리그와 전혀 다른 배구 스타일과 플레이 패턴 때문에 당황하고, 배구를 새로 배운다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구단 이기주의는 공멸 '산증인'... 대표팀은 '희생' 아니다

한편, 남자배구 대표팀은 18일부터 다시 진천선수촌 소집훈련에 돌입했다. 8월 19일부터 26일까지 이란에서 열리는 아시아 선수권 대회, 9월 19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표팀 선수 상당수는 무려 5개월 동안 소속팀과 떨어져 있게 됐다.

과거 같으면, 아시아 챌린지 컵 대회는 프로구단들이 선수 피로도와 V리그 준비에 차질을 준다는 등의 이유로 출전 자체를 포기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VNL도 세계 강호들에게 연패할 바엔, 차라리 안 나가는 게 낫다는 인식도 있었다. 배구계 주변에선 선수 연봉은 구단이 주는데, 왜 대표팀에 희생해야 하느냐며 거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남자배구는 현재 인기 추락의 엄청난 후폭풍을 맞고 있다. 장기간 주요 국제대회에 출전조차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대중 스타 선수가 소멸되고, 일반 대중의 신규 팬 유입도 끊겼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V리그에서는 모든 흥행 지표가 여자배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본격적인 위기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V리그를 주관하는 KOVO(총재 조원태)도 고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VNL 출전권을 다시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출전 자체를 기피했던 아시아 챌린지 컵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2개월이 넘도록 대표팀 소집훈련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구단의 이익을 앞세우다 큰 숲을 보지 못하면 공멸할 수 있다는 걸, 남자배구의 현주소가 여실히 증명해준 셈이다.

잃을 소도 없는 남자배구... '무관심'이 더 무섭다

국내 스포츠에선 종목을 막론하고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같은 메이저 국제대회 출전과 좋은 성적이 프로 리그 흥행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대중 스타를 배출할 수 있는 최고 루트이고, 대중들이 국내 리그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는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대표팀 선수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다는 관점이 컸지만, 최근에는 선수 본인과 프로구단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로 바뀌었다. 선수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면 연봉도 올라가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프로 구단들도 리그 인기가 높아야 관중 수익과 모기업의 광고·홍보 효과가 커진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배구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기 위해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신축을 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고인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여자배구는 '배구 황제' 김연경과 양효진·김수지까지 황금 세대 장신 트리오가 2021년 도쿄 올림픽 4강 신화 이후 동반 은퇴하면서 급격한 세대교체의 고통이 본격화됐다. 그러나 남자배구는 지난 5년 동안 국제대회 경쟁력이 계속 추락하고 있음에도 달라진 게 거의 없다.

현재는 스스로 변화할 의지도 변화를 외쳐줄 팬들도 사라져 가는 상태,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는 '무관심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남자배구가 아시아선수권과 아시안게임만이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불씨를 살려주기를 배구계와 팬들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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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레이크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남자배구 임도헌 배구협회 KOVO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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