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SBS
<악귀> 제5회가 5분을 넘었을 때, 민속학 교수 염해상(오정세 분)이 귀신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장승의 신비한 기능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염해상이 이렇게 말했다.
"장승은 그 마을의 수호신 역할만 한 게 아니에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 있었죠. 마을의 동서남북 방위에 위치해 있는 장승은 당시 나그네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해줬습니다. 그뿐 아니에요. 주요 목적지까지 거리를 표기한 노표 장승은 현재의 표지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장승은 현재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던 겁니다."
장승이 도로표지판으로 부각된 것은 임진왜란 100년 이전의 어느 시점이었다. 염해상의 대사에 언급된 '노표 장승'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노표(路標) 장승 고찰'이란 논문에 따르면, 1592년에 일본군이 침략하기 1세기 이전에 장승의 그런 기능이 두드러졌다.
한국민속학회가 1980년 8월에 발행한 <한국민속학>에 실린 김두하 민학동지회장의 위 논문은 "15세기 후반에는 이미 리수(里數)를 적은 노표가 노방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장생(長栍)으로 표기됐다며 "이 노표는 상부에 장승의 면상을 조각"했다고 설명한다.
논문에 제시된 참고문헌 중 하나는 유학자 성현의 <용재총화>다. 이 책 제5권에 나오는 "김해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이야기하다가, 장승을 보면 반드시 하인한테 거리의 원근을 자세히 보게 하고"라는 대목이 근거 중 하나다. 장승에 지명과 거리가 표기돼 있었기 때문에 노비에게 장승을 보고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노비 같은 서민층은 글자를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관청 민원실에서 서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관노비였다. 그리고 한문은 모르더라도, 한자로 표기된 이두문자를 이해하는 서민층은 많았다. 민간의 계약서는 한문이 아닌 이두로 표기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선비들이나 지주층뿐 아니라 상당수 서민들도 장승에 적힌 지명과 거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식자율이 어느 정도 확보됐기에 장승을 도로 표지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장승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 제2권에 실린 '광주(廣州) 가는 도중'이란 시에서 "이정표가 망가졌다. 가을 장마에 거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같은 책 제62권에서 그는 요즘은 이정표가 장승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2권에 나오는 이정표는 장승을 가리킨다.
이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가을은 음력 7월부터다. 여름 장마로 인해 장승 표면의 글자가 어느 정도 훼손된 상태에서, 가을 장마 때문에 장승이 더욱 훼손됐던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비가 심하게 오면 도로 표지판이 지워지지 않을까도 걱정해야 했다.
이정표 역할 했던 흙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