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永樂帝, 주체, 1360-1424)는 명(明)의 건국군주인 태조 홍무제(주원장)의 4남이자, 3대 황제로서 당시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이던 명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로 꼽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아버지 홍무제를 능가하는 잔인무도한 ‘공포정치’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피의 폭군'이기도 했다. 그가 후대까지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인 자금성(紫禁城)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국 정치문화의 중심이자 절대권력의 상징으로도 불린다.
 
4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피의 군주 영락제와 자금성 잔혹사’ 편을 통하여 중국 정치의 중심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공간인 자금성의 탄생과, 그 설계자 영락제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조영헌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영락제는 어릴때부터 성품이 호방하고 무용이 뛰어나며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던 영락제는 아버지 홍무제가 사망하자 ‘정난의 변(1399-1402)’을 일으켜 조카이자 2대 황제이던 건문제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다.
 
재위 4년째인 1406년(영락 4년), 영락제는 원래 수도였던 남경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이미 원나라 시절에 지어졌던 궁성을 보수-확대하여 거대한 황궁을 짓도록 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영락제는, 화려하고 거대한 궁궐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황제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효과를 노렸던 것. 바로 600여년에 걸쳐 이어질 자금성 역사의 시작이다.
 
자금성은 건립까지 약 1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약 10만명의 장인(기술자)와 100만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자재로 사용될 나무와 돌을 중국 각지에서 운송해오기 위하여 대운하가 건설되었고, 마차로 운송하는 게 불가능한 돌은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서 물을 길어서 길에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동원되어 엄청난 규모의 궁궐 건립을 위하여 댓가없는 노동착취와 가혹한 수탈을 감수해야했다.
 
1421년, 마침내 자금성이 완공된다. 자금성은 약 980여 개의 건물과 9천여 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뉜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업무장소인 태화전(太和殿)· 회의실인 중화전(中和殿)· 연회장이자 과거 시험장으로 활용되던 보화전(保和殿)으로 나뉘며 이를 ‘삼전’이라 불렀다.
 
외조에서는 황제의 즉위식이나 책봉식등 황실 공식행사를 담당했으며 오늘날 현대 중국 정부에서도 세계 정상이나 국빈들이 방문하여 외교행사를 벌이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조의 중심인 태화전에는 절대권력의 상징인 왕좌가 있다. 왕좌를 비롯한 자금성 곳곳에는 ‘용(龍)’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내정은 주로 환관-궁녀 등 궁의 직원들이 지내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내정에는 영락제의 침궁인 건청궁(乾清宮), 황제 부부의 신혼방인 곤녕궁(坤寧宮)과 휴식공간인 교태전(交泰殿)의 3궁이 속해 있었다. 건청궁 앞에는 태화전과 같이 사자상이 건립되어있는데, 특이하게도 태화전과의 차이는 귀가 덮인 모양새라는 것이다. 이는 황제가 “내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듣지도 보려고 하지도 말라”며 궁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자금성은 1400년대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현대까지 무려 600여년간 침수 피해가 단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자금성은 건설 당시부터 북쪽 지대를 높게 만들어 남쪽으로 물이 흐르게 하고, 용머리로 만들어진 배수구를 통하여 물이 하천으로 배출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있었기 때문이다. 2021년 중국을 강타한 '베이징 폭우' 사태때도 유독 자금성만큼은 멀쩡하여 시대를 앞서간 배수시설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자금성이라고 웅장하고 화려한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금성 내부에 위치한 ‘냉궁’은 황제에게 버림받은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으로 활용됐다. 죄인으로 전락하여 냉궁에 갇힌 많은 후궁들은 생필품을 전달하는 아주 작은 창을 제외하면 모든 출입구를 봉쇄되고 환관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비참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해야했다.

중국에서는 ‘냉궁에 갇히면 뒤를 돌아보지말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며 냉궁에서는 한맺힌 삶을 마감한 원혼들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유명하다. 중국 당국에서는 자금성을 민간에 공개한  이후에도, 냉궁만큼은 비공개 공간으로 분류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자금성 건립과 함께 영락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관(宦官)들을 정치의 중심에 기용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내시들과 비교하면 고환만 거세한 조선과 달리, 중국의 환관들은 음경까지 제거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거세의 이유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존재가 되어 오직 ‘황제만을 위해서는 일하는 존재’로 만드는게 그 목적이 있었다.
 
영락제의 비정한 권력장악과 숙청 방식은 아버지 태조 홍무제(洪武帝)와 판에 박은 듯 흡사하다. 홍무제와 영락제는 둘다 명분없는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적들을 무자비한 무력으로 굴복시켜야했으며, 또한 집권 후에는 언제든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수 있는 신하들을 경계하느라 숙청을 거듭하면서 끝없이 무수한 피를 뿌려야했다는 공통점이다. 이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무도한 형벌들이 속출했고, 공신들을 숙청하거나 십족까지도 멸하는 ‘공포정치’가 일상이 됐다.
 
영락제는 왜 자신의 수족이 될 친위세력으로 환관을 선택했을까. 환관은 오직 그들을 뽑아준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집단이었고, 황제의 존재가 곧 그들의 유일무이한 권력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3천년 가까운 중국 환관의 역사에서 정치개입은 이전의 왕조에도 있었지만,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영락제가 친위세력인 환관들을 조직적으로 육성하며 그 영향력이 한층 비대해진다. 오히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 사이에서는 신채적 장애를 감수하고라도 황제의 측근에서 일하며 권세를 누릴 기회를 얻을수 있는 환관의 인기가 높아지며 명 말기에는 3천명의 환관을 모집하는데 2만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동창(東廠)은 이처럼 명나라 시대 환관들의 높아진 위상과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동창은 환관들로 이루어진 황제 직속의 정보기관이자 비밀경찰 기구였다.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그 권위에 언제든 위협이 될만한 황족-귀족-관료들에 대한 밀고와 감시를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세력이 점점 비대해진 동창은 체포와 심문권을 남발하여 황제의 이름으로 정적들을 숙청하는 정치테러조직이자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변질됐다. 동창의 표적이 된 이들은 잔혹한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고, 훗날에는 자국만이 아니라 조선같은 이웃국가들도 감시대상에 포함되었다. 황제는 환관들을 앞세워 절대권력을 독점할수 있게 되었고, 환관은 그런 황제의 최측근에서 눈과 귀가 되어 군림을 도왔다.
 
한편으로 환관이라서 해서 모두 음험하고 지저분한 일만 맡았던 것은 아니다. 일부 환관들은 외교 등 다양한 실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영락제가 가장 신임했던 환관인 정화(鄭和)은 이른바 ‘중국판 콜럼버스’로 불리우는 ‘정화의 대원정(下西洋)’를 이끈 탐험가이자 제독이다.
 
정화는 본래 오늘날의 회족에 해당하는 외국인(색목인)이사 이슬람교도 출신으로, 장군이었지만 명나라 군대의 포로로 잡인 이후 환관이 됐다. 정화는 영락제가 건문제를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한 ‘정난의 변’에서 활약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영락제는 제국의 영역을 넓히고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하여 정화에게 대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원정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여기에는 생사 여부를 알지못하고 실종된 조카 건문제가 인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약 28년에 걸쳐 무려 7번이나 원정에 나섰고, 함대의 규모는 62척에 승조원은 무려 2만7천여명(1차 원정)에 이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정화의 대함대는 오늘날의 베트남, 인도, 아라비아 반도에 이어 아프리카까지 도달하며 약 20여개국이 명나라에 조공품을 바치게 되었다. 이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원정보다도 무려 87년이나 앞서서 이뤄낸 성과로,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중국 해항력의 최고점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영락제는 육지로도 북으로는 몽골, 남으로는 베트남을 정벌하며 국토를 확장했고 서쪽으로는 티베트에 사절단을 보내어 조공관계를 맺는데 성공한다.이 시기 명나라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렀고, 영락제는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절대군주로 자리매김했다.
 
정화가 해외 원정에서 확보한 조공품 중에는 기린, 코끼리, 원숭이같은 동물도 있었다. 특히 기린은 중국식 발음으로는 ‘치린(Qirin)’으로 불리우며 이름이 흡사하다. 중국인들은 사슴의 몸과 소의 꼬리-뿔을 지린 기린을 ‘상상속의 동물’로 영험하게 여겼고, 영락제도 기린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기린은 영락제 치세의 정치적 안정을 상징하는 동물로 선전됐다. 이에 조선에서도 축하사절을 보냈다는(세종실록)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대원정과 조공무역을 통하여 영락제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조카와 신하들을 제거한 잔인무도한 폭군에서, 명의 위세를 드높이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성군’으로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을 이뤄낼수 있었다.
 
한편 영락제는 조선의 태종에게 아름다운 조선 여인들을 선발하여 공녀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이 후궁에 반열에 오른 조선 여인이 바로 현비 권씨다. <명사 후비전>에 따르면 영락제는 처음 만난 ‘권현비가 옥퉁소를 불자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여러 여인의 위에 놓았고 한달에 지나 후궁에 책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락제가 권현비의 미모와 퉁소실력을 총애하자 궁중에서 앞다투어 그녀를 모방했다고 한다.
 
영락제는 정비인 인효문황후가 사망한 후 새로운 황후를 들이지않고 총애하던 권현비에게 사실상 황후에 버금가는 권한을 위임하면서, 권현비는 조선 여인임에도 사실상 ’자금성의 안주인‘으로 등극했다.
 
영락제는 몽골 원정에도 권현비를 동행시킬 정도로 아꼈지만 전투중에 권현비가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만다. 조선을 떠나 명나라에 온지 약 1년 6개월만이었다. 권현비는 “다시는 폐하를 모실수 없게 되었구나”라는 유언을 남겼고, 영락제는 그녀가 끝내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고 통곡했다고 한다.

그런데 권현비의 죽음은 황실에 뜻하지 않은 피바람을 몰고온다. 권현비 사후 4년 만에 그녀가 또다른 조선출신 후궁인 여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분노한 영락제는 여미인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한편 권현비 독살사건을 폭로했던 명나라 출신 후궁 여씨는 또다른 궁녀 어씨와의 간통이 발각되어 불안을 이기지못하고 함께 자결했다. 수상함을 느낀 영락제는 사건을 재수사하다가 여씨가 총애받던 여미인을 시기하여 누명을 씌운 것이 드러났다.
 
이성을 잃은 영락제는 죽은 여씨의 시녀들을 고문하여 언급된 인물 모두를 남감없이 처형해버렸다. 이 당시 고문과 억지 자백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은 무려 28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발단이 된 두 궁녀의 성씨를 딴 ‘어여의 난’으로 불리우며 중국 황실 역사상 최악의 내부 학살극이자, 영락제의 광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으로 회자된다. 영락제가 이 사건을 통하여 자금성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영락제의 폭주를 지켜본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진실에 함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후 자금성에게는 대화재가 발생한다. 하늘에서 돌연 먹구름에 이어 천둥벼락이 내리치며 궁궐에 불이 붙었고 태화전 등 삼전이 불바다로 변했다고 한다. 이 대화재는 어여의 난과 경제난 등으로 가뜩이나 흉흉해져가던 민심이 영락제에게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 영락제는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업보와 쇠약해진 건강속에서 고통받다가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던 1424년 7월, 6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당시 풍습에 따라 황제가 사망하면서 30여명의 후궁들이 순장되었는데, 씁쓸하게도영락제는 죽을때까지도 무고한 목숨들을 대거 앗아가는 최후를 보여준 것이다.
 
영락제가 남긴 자금성은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때까지도 중국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었다. 오랫동안 금지된 공간으로 남아있던 자금성은, 청나라가 몰락한 이후 1925년에 이르러서야 중국이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으로 바꾸며 500여년만에 민간에게 공개되기에 이른다.
 
영락제는 분명히 나름의 능력도 있었고 많은 업적을 남긴 군주였지만, 그 지나친 잔혹함과 폭주로 인하여 자신의 명성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그가 남긴 환관정치와 공포정치, 대숙청, 무리한 대외 원정들이 남긴 부작용은, 영락제 사후 명나라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책임과 권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권위가 없는 책임이란 있을수 없으며, 책임이 따르지않는 권위도 있을수 없다.’는 막스 베버의 격언은 오로지 본인의 절대권력만을 위하여 끝없이 타인을 소모품처럼 희생시켰던 영락제의 삶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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