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작사나 감독 입장에서는 영화를 만들 때 당대 가장 잘 나가는 최고의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 것이다. 아무래도 연기 잘하고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배우가 출연하면 그만큼 영화의 완성도도 좋아지고 흥행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비와 시나리오, 배우의 스케줄 등 여러 문제로 인해 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을 때가 적지 않다. 특히 노출 장면이 있는 영화들은 여성배우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상당히 많다.

그런 이유로 기성 배우들이 출연을 꺼릴 경우 제작사들은 '플랜B'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인지도는 떨어져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신인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다. 실제로 경력이 그리 많지 않은 신인배우를 캐스팅해 흥행에도 성공하고 좋은 배우를 발굴했던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 김고은을 라이징 스타로 만들었던 정지우 감독의 <은교>와 김태리의 상업영화 데뷔작이었던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대표적이다.

사실 여성배우가 노출이 있는 작품을 꺼리는 것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배우일수록 노출이 있는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망설여 지는 것은 세계공통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유로 신인급 배우를 캐스팅했다가 의외로 크게 성공을 거두는 영화도 있다. 탕웨이라는 걸출한 스타배우를 발굴하면서 200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던 이안 감독의 <색, 계>가 대표적이다.
 
 <색,계>는 200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색,계>는 200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의 배우

중국 저장성의 항저우시에서 태어난 탕웨이는 공리와 장쯔이 등 세계적인 배우들을 배출한 중국희극학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후 2004년부터 배우활동을 시작했다. 데뷔 초기만 해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탕웨이는 2007년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의 <색, 계>에서 막부인으로 위장해 친일파 간부 이모청(양조위 분)을 유혹하는 왕치아즈 역을 맡았다.

배우 데뷔 첫 주연작이나 다름 없었던 <색, 계>에서 파격적인 노출과 함께 단아하면서도 고혹적인 왕치아즈의 다양한 매력을 잘 표현한 탕웨이는 일약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배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탕웨이의 고국이었던 중국에서는 항일운동을 하는 여성이 친일파 간부를 사랑하게 되는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탕웨이에게 3년간 영화출연을 금지시켰다. 한창 성장하고 있는 신예였던 탕웨이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징계였다.

결국 탕웨이는 배우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2008년 홍콩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활동 무대를 홍콩으로 옮겼다. 홍콩 활동시기에 출연했던 대표적인 작품이 장학우와 호흡을 맞췄던 <크로싱 헤네시>였다. 그러던 2011년 탕웨이는 한국영화 관계자들과 인연이 닿아 최고의 스타였던 현빈과 영화 <만추>에 출연했다(탕웨이는 현빈과 핑크빛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정작 탕웨이는 2014년 <만추>를 만든 김태용 감독과 결혼했다).

중국에서의 출연금지가 풀린 탕웨이는 2013년 <시절연인>, 2014년 <황금시대>에 출연하며 중국 활동을 재개했고 2015년에는 마이클 만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블랙코드>에서 '토르'로 유명한 크리스 햄스워스와 연기호흡을 맞췄다. 2016년에는 <북 오브 러브>를 통해 역대 중국멜로영화 흥행기록을 세우며 중국 내에서도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2018년에 출연했던 <지구 최후의 밤>은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 받기도 했다.

그리고 탕웨이는 2022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를 연기하며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1963년부터 시작돼 2022년까지 43회를 맞은 청룡영화상에서 외국인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탕웨이가 최초였다. 탕웨이는 올해 박보검과 배수지, 정유미, 최우식 등과 함께 남편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신작 <원더랜드>를 선보일 예정이다.

섬세한 심리묘사와 배우들의 열연
 
 탕웨이(왼쪽)와 양조위의 섬세한 심리변화야말로 노출과 배드신에 가려진 영화 <색, 계>의 진정한 재미요소다.

탕웨이(왼쪽)와 양조위의 섬세한 심리변화야말로 노출과 배드신에 가려진 영화 <색, 계>의 진정한 재미요소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색, 계>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홍콩과 상하이에서 벌어진 대학 연극부와 항일 단체의 친일파 간부 암살작전을 그린 영화다. 멜로와 첩보, 심리스릴러 등 여러 장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영화지만 국내에서는 중국 신인배우 탕웨이의 파격적인 노출만 집중적으로 홍보가 됐다. 덕분에(?) 전국 186만이라는 쏠쏠한 흥행성적을 올렸지만 많은 관객들이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탕웨이는 <색, 계>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3년 동안 활동이 금지됐다. 사실 탕웨이는 열심히 연기한 죄(?) 밖에 없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한국 입장에서 봐도 중국이 <색, 계>에 좋지 않은 시선을 보인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만약 한국에서도 일제시대 때 친일파 고위간부를 미인계로 접근해 암살하려던 독립단체 여성요원이 친일파와 사랑에 빠져 동지들을 배신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엄청난 비난여론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떠나 영화 자체로만 보면 두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표현한 이안 감독의 연출과 이를 완벽하게 소화한 양조위와 탕웨이의 열연은 그 어떤 극찬도 아깝지 않았다. 2000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홍콩 금상장 남우주연상 7회 수상에 빛나는 중화권 최고의 배우 양조위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왕치아즈를 극도로 경계하다가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복잡한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양조위는 <색, 계> 출연 당시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연기파 배우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색, 계>에서 정말 관객들을 놀라게 한 배우는 탕웨이였다. 이안 감독을 만나 <색, 계>에 출연하기 전까진 신인에 가까웠던 탕웨이는 막부인으로 변신해 연기에 몰두하다가 이모청에게 사랑을 느끼는 역할을 멋지게 소화했다. 특히 항일단체에 이모청 사살을 요구하다 묵살 당하고 우영감(탁종화 분)에게 복잡한 심정을 토로하는 연기는 단연 일품이었다.

이처럼 <색, 계>는 157분의 짧지 않은 런닝타임 동안 긴장을 늦추지 않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스토리에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수위 높은 배드신과 탕웨이의 파격적인 노출, 그리고 제모를 하지 않은 탕웨이의 겨드랑이였다. 이를 두고 중국여성들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1930~1940년대 중국의 시대상을 제대로 고증한 장면이었다.

탕웨이를 불행으로 인도한 못된 선배
 
 왕리홍이 연기한 연극반 선배 광위민은 결과적으로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를 파멸로 인도한 최악의 선배가 됐다.

왕리홍이 연기한 연극반 선배 광위민은 결과적으로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를 파멸로 인도한 최악의 선배가 됐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중일전쟁 발발 후 영국에 있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홍콩으로 피난을 가 링난대학(1888년에 개교한 실제 존재하는 대학이다)에 재학 중이던 왕치아즈는 평소 호감이 있던 선배 광위민의 권유에 애국 연극서클에 가입한다. 만약 그때 연극서클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왕치아즈는 친일파 암살을 위해 막 부인으로 위장해 목숨을 걸고 이모청에게 접근할 필요도, 이모청과 사랑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순진한 여대생 왕치아즈를 어두운 길로 빠지게 하는 선배 광위민은 상하이에서도 왕치아즈를 찾아내 왕치아즈를 상하이의 항일 애국단체에 들어오게 만든다. 광위민은 이모청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흔들리는 왕치아즈에게 키스를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왜 3년 전에 하지 않았어?"라는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광위민 역시 마지막에는 왕치아즈를 비롯한 나머지 동지들과 함께 체포돼 처형을 당한다.

대만배우 탁종화가 연기한 우영감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항일단체의 리더다. 광위민을 비롯한 링난대학 출신의 애국 연극서클 멤버들을 이끄는 인물로 왕치아즈에게 미인계로 이모청을 유혹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나마 흔들리는 왕치아즈를 작전에서 제외시키자고 했던 광위민과 달리 우영감은 끝까지 왕치아즈를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 우영감은 마지막에 부하들이 모두 잡혔을 때도 혼자서만 탈출에 성공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색, 계 이안 감독 탕웨이 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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