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한 장면.
KBS2
다만 직업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내용도 내용이지만 OST들이 어떻게 장면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긴 하다. 이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1987년'이라는 특정한 시대를 가장 잘 나타내고 확정할 수 있는 노래들에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어쩌면 이 드라마의 음악감독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사랑의 세레나데로 수시로 흘러나오는 노래 '스잔'의 첫 구절, 저 유명한 '스잔, 찬 바람이 부는데...'에서 나는 허리가 꺾이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스잔 찬바람이 부는데, 스잔 땅거미가 지는데
너는 지금 어디서 외로이, 내 곁에 오지를 않니
스잔 보고 싶은 이 마음, 스잔 너는 알고 있잖니
그날의 오해는 버리고, 내 곁에 돌아와 주렴
스잔 난 너를 사랑해, 후회 없이 난 너를 사랑해
스잔 잊을 수 없는 스잔, 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스잔
스잔 찬바람이 부는데, 스잔 땅거미가 지는데
너는 지금 어디서 외로이, 내 곁에 오지를 않니
<간주>
스잔 난 너를 사랑해, 후회 없이 난 너를 사랑해
스잔 잊을 수 없는 스잔, 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스잔
스잔 찬바람이 부는데, 스잔 땅거미가 지는데
너는 지금 어디서 외로이, 내 곁에 오지를 않니/ 김승진, <스잔> 가사
1985년에 김승진이라는 가수가 발표해 히트를 기록한 곡이다. 한없이 부드럽고 또한 청량하고 순수하다. 곡이 그렇고, 가사가 그렇다. 이 곡을 부르는 가수가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고등학생 가수라는 것과 풋풋함이 묻어나는 미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후광효과'로 작용했다.
거기에다 노래에서 그토록 애타게 부르는 '스잔'이 대체 누구일까라는 물음도 이 곡의 히트에 한몫을 했다면 했을 것이다. 요즘처럼 가수에 관한 모든 것이 곡 발표와 함께 공개되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노래가 대중에 전해지고 인기를 얻을 무렵, 믿기 어렵겠지만 상이하게도 대학가에선 민주화를 갈망하며 항상 시위가 있었고 사흘이 멀다 하고 최루탄의 매운 기운이 도서관에까지 스며들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간절함의 뒤꼍엔 이런 사랑의 달콤함도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랑, 사랑으로 가슴 아픈 청춘, 그리고 외로움. 이런 것들이 아무리 혼돈과 뜨거움의 시대라 한들 완전하게 사라질 수 있으랴. 사랑은 불멸이며 불확실성을 지닌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므로.
아마도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 '노천 계단'에 홀로 앉아, 때로는 매캐한 내음으로 뒤덮인 6월의 푸른 소나무 아래에 숨어들어 몰래몰래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오던 이 노래를 들었던 이유가.
▲KBS2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한 장면.KBS2
대놓고 사랑할 수도 없는 치열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이었다. 그 뒤꼍에 앉아 아주 잠깐씩 부채의 마음을 가진 채 머물며 듣던 노래, 바로 그 노래가 '스잔'이었고. 그런데 예의 무해한 곡조와 가사 그대로 1987년을 무대로 한 드라마를 물들이고 있는 걸 보니 미안하게도 다시 마음이 끝 간 데 없이 몽글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사랑이 다시 올 리 없다는 걸 너무도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왜 '1987'년이고, 하필이면 이 노래 '스잔'이어야만 했을까. 역사가 스포이기는 하지만 '군부독재'의 시대를 마감시키는 거대한 물결이 일고 그 물결의 끝에는 엄중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오래도록 눌러 놓았거나 숨겨 놓았던 '청춘의 사랑'을 조금씩은 이야기해도 된다는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노래의 쓰임새가 꼭 그랬으면 좋겠다.
내게도 드라마에서처럼 근사한 '타임머신'이 주어지고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어느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나는 '스잔'을 몰래몰래 듣던 푸른 눈의 대학생으로 회귀하고 싶을까? 어쩌면 그 시절 누군가의 '스잔'이었을지도 모를 나에게 가만히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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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