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길복순>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주인공 길복순은 차민규(설경구 분)가 대표로 있는 M.K.엔터의 에이스 킬러다. M.K.엔터는 <길복순>에 등장하는 살인청부회사로 연습생 킬러들을 육성할 정도로 국내 굴지의 킬러회사로 나온다. M.K.엔터는 단순히 규모가 큰 회사일 뿐 아니라 주변 회사들에 대한 영향력도 대단해 대부분의 살인청부 회사들이 M.K.의 차민규 대표가 정한 룰과 규칙을 따라야 한다.

영화에서는 킬러들끼리 친분을 나누기도 하고 알력다툼을 하면서 서로를 죽이기도 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특히 국내에서는 전문킬러와 살인청부회사가 존재할 확률은 매우 낮다. 무엇보다 한국은 경찰이나 군인 같은 특수 직업군을 제외한 일반인들의 총기 소지 및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는 나라다. 만약 일반인이 어디선가 불법으로 총기를 밀수해 누군가를 죽이는 데 사용했다면 분명 언론과 SNS 등을 통해 세상에 크게 알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길복순>의 전설적인 킬러 길복순과 그녀가 속한 회사 M.K.엔터처럼 영화에서는 얼마든지 가상의 전문킬러와 살인청부회사가 등장할 수 있다. 그리고 흔히 킬러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액션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영화는 액션보다는 코미디에 집중돼 있다. 지난 2001년 10월에 개봉해 조폭 코미디의 범람 속에서도 관객들의 쏠쏠한 사랑을 받았던 장진 감독의 <킬러들의 수다>다.
 
 <킬러들의 수다>는 조폭 코미디의 공세 속에서도 독특한 웃음코드로 서울관객 87만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킬러들의 수다>는 조폭 코미디의 공세 속에서도 독특한 웃음코드로 서울관객 87만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주)시네마 서비스

 
다양한 장르로 만들어진 킬러영화들

현재 '킬러영화의 바이블'로 불리는 작품은 나탈리 포트만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배출한 뤽 베송 감독의 <레옹>이다. <레옹>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고독한 킬러 레옹(장 르노 분)과 비리경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소녀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레옹 신드롬'을 일으켰다. 지난 2015년에는 이 영화를 모티브로 한 노래(이유 갓지 않은 이유의 <레옹>)까지 나왔을 정도.

40~50대 관객들에게 최고의 킬러영화는 단연 <레옹>이겠지만 20~30대 젊은 관객들에게 킬러영화의 대명사는 <존 윅>이 더욱 익숙하다. 결혼과 함께 은퇴를 선택한 전설적인 킬러가 아내와 사별한 데 이어 입양한 반려견마저 조직에 의해 목숨을 잃자 피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액션영화다. 시리즈가 거듭될 때마다 점점 제작비가 올라가고 있는 <존 윅>은 현재 4편이 세계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을 이어준 <미스터&미세스 스미스>는 2005년에 개봉해 세계적으로 4억 8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코믹 액션영화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서로의 정체를 속이고 부부생활을 이어가던 존과 제인의 일상과 입담이 영화에 잘 녹아 들며 관객들에게 웃음과 재미를 선사했다. 존과 제인 모두 킬러로 나오지만 청부살인보다는 조직에서 하달하는 미션을 해결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지난 2017년에 개봉한 라이언 레이놀즈와 사무엘 L.잭슨 주연의 <킬러의 보디가드>는 3000만 달러의 많지 않은 제작비로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1억 7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2021년 속편까지 제작됐다. 현지 평론가들에게 썩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지만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재미요소를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160만 관객을 기록하며 선전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한국영화 중에서는 지난 2017년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던 보기 드문 여성 원톱 액션영화 <악녀>가 대표적인 킬러영화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를 통해 주가를 올리던 김옥빈이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숙희로 연기변신을 하며 화제를 모았다. <악녀>는 감독 지망생 시절 서울액션스쿨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정병길 감독의 영화답게 액션연출 만큼은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이었다.

작은 디테일 속에 숨어있는 영화의 재미
 
 원빈과 신하균,정재영(왼쪽부터)은 <킬러들의 수다> 출연 당시엔 신예였지만 훗날 천만 배우로 성장했다.

원빈과 신하균,정재영(왼쪽부터)은 <킬러들의 수다> 출연 당시엔 신예였지만 훗날 천만 배우로 성장했다. ⓒ (주)시네마 서비스

 
사실 충무로에서 장진 감독만큼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감독도 많지 않다. 장진 감독은 '유쾌한 재담꾼'으로 1990년대 중반 연극계부터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지만 2010년대 들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실제로 장진 감독은 2009년 258만 관객을 모은 <굿모닝 프레지던트> 이후에 연출한 4편의 영화(<퀴즈왕> <로맨틱 헤븐> <하이힐> <우리는 형제입니다>)가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킬러들의 수다>는 장진 감독에 대한 관객들의 호감지수가 한창 높았던 2001년에 개봉한 영화다. 실제로 <킬러들의 수다>가 개봉하기 2주 전엔 서울관객 141만의 <조폭 마누라>가 개봉했고 <킬러들의 수다> 개봉 한 달 후에는 서울관객 125만의 <달마야 놀자>가 개봉했다. <킬러들의 수다>는 2001년 하반기 대한민국 극장가를 지배했던 두 편의 조폭 코미디 영화 사이에서 서울관객 87만을 동원하며 대단히 선전했다.

제목에 '킬러'가 들어간다고 해서 이 영화에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킬러들의 수다>는 청부를 받아 사람을 죽이는 킬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액션보다 '수다'에 집중하는 영화다. 실제로 <킬러들의 수다>는 인물들이 툭툭 던지는 대사는 물론이고 하연(원빈 분)이 맡은 내레이션에서도 장진 감독 특유의 농담과 유머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는 주요 스토리가 아닌 작은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당시엔 평범한 캐스팅에 가까웠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킬러들의 수다>는 1999년에 개봉했던 <쉬리>나 <주유소 습격사건> 못지 않은 호화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킬러를 연기한 4명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고 킬러들을 쫓는 조검사 역의 정진영, 이 영화의 유일한 악역 탁문배 역의 손현주,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나 선생님을 죽여 달라고 의뢰하는 여고생 여일 역의 공효진 등 스타배우들이 대거 조연으로 출연했다.

한편 <킬러들의 수다>에 함께 출연한 신현준과 정재영은 영화 개봉 후 운명이 엇갈렸다. 스타배우였던 신현준은 <킬러들의 수다>로 변신에 성공했지만 <가문> 시리즈와 <맨발의 기봉이> 정도를 제외하면 출연한 영화들 대부분이 흥행 실패하며 슬럼프에 빠졌다. 반면에 <킬러들의 수다>가 주연 데뷔작이었던 정재영은 2년 후 <실미도>로 천만 배우가 됐고 <웰컴 투 동막골> <바르게 살자> <강철중:공공의적1-1> 등을 연이어 히트시켰다.

2001년, 정재영보다 훨씬 유명했던 정진영
 
 4명의 주인공에 비해 분량이 썩 많지 않았던 정진영(오른쪽)은 높은 인지도 덕에 엔딩 크레딧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올랐다.

4명의 주인공에 비해 분량이 썩 많지 않았던 정진영(오른쪽)은 높은 인지도 덕에 엔딩 크레딧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올랐다. ⓒ (주)시네마 서비스

 
<킬러들의 수다>의 엔딩 크레딧에는 상연 역의 신현준에 이어 주연인 정재영이나 신하균 대신 조 검사 역의 정진영이 두 번째로 이름이 올라갔다. 영화계에서 인지도가 낮았던 정재영이나 아직 신예 딱지를 떼지 못한 신하균보다 <약속>의 엄기탁 역으로 이름을 알린 정진영이 관객들에게 더 익숙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킬러들을 쫓던 조 검사는 영화 막판 자수하러 온 상연을 전화기와 모니터 수리비 35만 원만 받고 돌려 보내는 아량을 베푼다.

장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과 두 번째 영화 <간첩 리철진>에서는 여주인공 포지션의 오연수와 박진희가 모두 '화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화이'라는 이름은 <킬러들의 수다>의 오승현까지 이어진다. 화이는 정우(신하균 분)의 제거대상이었지만 정우가 화이의 청순함과 순수함에 반하면서 목숨을 구했고 결국 정우는 화이를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킬러들의 수다>에 등장하는 네 명의 킬러는 극 중 아침 뉴스를 진행하는 오영란이라는 앵커를 좋아한다. 상연은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살인을 의뢰 받지만 현장을 답사한 재영과 정우는 삼엄한 경비를 확인하고 의뢰를 거절하자고 한다. 하지만 의뢰인이 오영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4명의 킬러들은 의뢰를 수용하고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한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오영란을 연기했던 고은미는 현재 MBC일일드라마 <하늘의 인연>에 출연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킬러들의 수다 장진 감독 신현준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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